사진/심종대 기자
[뉴스프리존=심종대 기자]‘人固有一死 或重干泰山 或輕干鴻毛 用之所0異也’(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 섬서성 한성인민정부가 전액 투자하고 (사)뉴서울오페라단(단장 홍지원)이 제작한 한.중 합작 글로벌 창작오페라 <사마천> 공연에 앞서, ‘사마천의 시각에서 바라본 오늘날 한국사회’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지난 3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개최했다.
이번 학술세미나는 뉴서울오페라단에서 주최.주관하고, 한국사마천학회(이사장 이석연)가 후원하는 행사로, 중국인의 자부심이자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대표하는 역사서로, 실제로 시진핑 주석도 인용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현 중국 정부의 지침서인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가치의 정신세계를 재조명했다.
한편으로 한.중 글로벌 창작오페라 <사마천>을 통해 한.중간의 상생발전은 물론 제2, 제3의 한류문화를 전 세계에 확산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키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세미나에는 사마천학회 이사장인 이석현 전 법제처장의 기조발표에 이어 우리나라 사마천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김원중 교수와 김영수 사마천학회 상임이사가 주제발표를 했다.
<사기>는 사마천의 부친의 유언을 받아 집필해 완성되기 몇 년전에 宮刑이라는 치욕을 당하기가지 20년의 세월동안을 쓰고 세상을 떠날때까지 모든 것을 던진 책으로, 수많은 인재들과 수많은 군상들을 다루고 있다. 사마천이 자기가 겪은 궁형이라는 치욕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해 그 사람들 속에서 하나씩 그 인재의 장점을 뽑아내 그것을 역사 속에서 재현해 냈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 나서, 친구 任安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제가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 산소에 올라갈 수 있겠느냐? 그리고 문 밖에 나가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고 그 다음에 하루에도 집 안에 있으면 망연자실하고 창자가 아홉 번 씩 끊어진다. 매번 이 치욕을 생각할 때 마다 등 줄기에서 땀이 온 몸을 적신다’고 하면서 이 편지에서 사마천은 치욕이라는 단어를 19번 썼다. 이처럼 자기가 부모님의 유언을 받아 역사를 집필하면서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치욕의 승화가 바로 사마천의 사기이다.
사진제공/(사)뉴서울오페라단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김원중 교수는 ‘사마천과 <사기>, <사기>와 사마천’이라는 주제발표문에서 “‘사기’는 2000여 년간의 긴긴 시간과 공간을 다룬 책으로, 역사의 태동에서 춘추전국시대와 초한정패 과정의 역사적 전화기요 혼란의 시기를 살다간 인물들의 이야기를 많이 수록했다”면서, “그야말로 궁형의 치욕을 겪은 사마천이 세상의 공정성에 대한 질문과 답변, 인간과 권력에 대한 살아 숨 쉬는 경전으로, 그 속에서 성공하고 살아남고 밀려나지 않기 위한 인간의 모든 군상을 다룬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밝혔다.
<사기> ‘열전’은 ‘백이 열전’으로 시작한다. 이편에는 은나라 고죽국의 군주였던 아버지가 형 백이가 아닌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지만 아버지가 사망하자 숙제는 형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했고, 백이는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 없다면서 나라밖으로 달아나버리고, 도 숙제도 왕이를 거부하고 멀리 도망가 버린다.
결국 왕위는 다른 형제가 돌아간다. 그러나 왕위를 양보하던 두 형제는 이후 무왕이 은나라에 반기를 들어 주나라를 세우자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숨어 지냈다. 또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면서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굶어 죽고 만다.
사마천은 이 이야기를 <사기>의 ‘열전’에 시작해, 자신의 삶을 백이와 숙제에게 투영시키려 했다. 사마천의 삶은 백이와 숙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무제의 대외 이민족들에게 강경 정책을 펴고 있을 때 사마천의 친구 이릉이 흉노에게 포위돼 투항하게 된다.
이릉이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무제는 그의 어머니와 처자를 죽이라고 명하자, 사마천이 나서서 이릉을 변호한다. 이것이 한무제의 逆鱗을 건드리게 되고, 한무제는 궁형을 명한다. 그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를 완성키 위해 이를 갈면서 분을 삭인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의 시작 부분에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 인사나 세사의 냉엄한 현실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
사마천은 이어 공자의 제자인 안회와 춘추시대 말기의 도적인 도척을 비교한다. 안회는 공자가 아끼던 제자로, 핵심인물 77명 중 안회를 대하는 공자의 모습은 평정심을 잃었다 할 만큼 청송 일관이었다. 안희는 안분지족을 실천하면서 살았지만 가난 속에서 술지게미를 먹으면서 목숨을 연명하다가 28살에 요절한 반면 도척은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고 사람의 간을 회로 쳐서 먹기까지 했던 잔인무도한 도적이었으나, 부귀영화는 물론 제 수명가지 다 누리고 죽었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착한 사람은 옳은 것으로 보답 받고, 악한은 그른 것으로 보답받아야 한다. 두 사람의 결론은 바뀌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사마천의 푸념처럼 세상일이란게 ‘인과응보’니 ‘권선징악’이니 하는 말과 꼭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청빈의 자세로 자신을 추스르면서 살다 요절한 안회는 우리에게 시사한 바가 많다”면서, “하늘의 도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옛말에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고 했다. 과연 하늘의 뜻은 늘 옳은 걸까요? 물론 이 질문은 백이와 숙제를 향한 것이지만 궁형이라는 비극에 쳐했던 사마천 자신은 물론이고, 인간의 삶 전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사진제공/(사)뉴서울오페라단
김 교수는 “사마천은 이런 인물들의 성공과 좌절과 재기의 역사를 흥미진진한 작품으로 그려냈다. 그러기에 사기를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여기는지도 모른다”면서, “결국 사마천이 그리고자 했던 세계는 인물들의 역사였다. 그가 내세운 세계는 세상에 절대적인 강자가 없고 약자도 없다는 점으로, 바로 그런 모습을 구현키 위해 사마천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 52만65백자의 사기”라면서 마무리했다.
이어 김영수 사마천학회 상임이사는 “사마천의 <사기>는 ‘백과전서’라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의 폭과 깊이가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사마천의 사상 역시 그 폭과 깊이를 헤아리기가 대단히 어렵고 힘들다”면서, “그의 사상이 무작정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사마천 사상의 정수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부와 연구, 그리고 생각이 따라야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상임이사는 이어 “사마천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생각을 따라야 한다”면서, <사기> 130권의 첫 권인 ‘오제본기’에서 <춘추>와 <국어> 등과 같은 옛 기록을 인용하면서 “사마천은 ‘즐겨 배우고 깊이 생각하는’ ‘호학심사(好學深思’가 학문의 깊이를 좌우한다고 보고, 그의 사상적 깊이의 기초는 바로 이런 공부하는 자세로부터 다져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마천은 처형을 앞두고 있던 入仕 동기인 임안에게 보낸 편지 ‘보임안서’에서 자신이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궁형을 자청하면서까지 구차하게 살아남아 <사기>를 완성하려 한 것은 “문장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면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꿰뚫어 일가의 문장을 이루고자 하였다”는 말로 자신의 역사 연구방법과 목적을 피력했다.
김 상임이사는 “사마천의 사상이 바로 이 대목에 압축돼 있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란 인간의 활동이 전개되는 공간을 가르킨다”면서, “과거와 현재의 변화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활동이 어떻게 변화돼 왔는가를 관통하겠다는 의미로, 이렇게 해서 자신만의 사관을 이루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사마천은 억울하게 궁형을 자청해, 그의 울분과 복수심을 역사서 저술에다 쏟아부어, 이른바 ‘문화 복수’를 위해 <사기>의 완성은 물론 <사기> 곳곳에 자신의 울분과 원한을 대신 표출하는 남다른 역사 서술법을 창안해냈다.
김 상임이사는 “이러한 서술법이 사마천의 역사관을 손상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면서, “팩트와 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역사 문학적 상상력을 과감하게 선택했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역사 연구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이것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되살려야 할 역사정신”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사기>의 문학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요소는 사마천의 현장정신”이라면서, “사마천의 현장정신은 방대한 3천 년 통사 <사기>의 체계구상과 3천 년의 역사를 일관된 기술 원칙과 사관으로 꿰는 출로로 작용해, 특히 수많은 보통 사람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열전 70권의 구상과 구성, 그리고 기술에 절대적으로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그는 “이번 사마천의 제작은 사마천의 삶과 <사기>의 콘텐츠가 한걸음 더 나아가 한중간의 문화교류의 적극적인 매채체로 작용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면서, “이번 이 같은 교류는 중국의 문화 콘텐츠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심상치 않다고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종대 기자, simjd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