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생태 Life Form 1951, Color on paper, 51.5×87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Collection of SeMA 서른 다섯 마리의 뱀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한국화단에 천경자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준 작품이며, 동시에 작가가 생전에 큰 애착을 가졌던 작품이다. 작가는 뱀을 스케치하기 위해 광주의 뱀집에 투명한 유리상자를 가져가 수십 마리의 독사와 꽃뱀을 넣고 얽히고설킨 뱀의 모습을 그렸다. 천경자는 뱀을 그릴수록 서글프고 깨끗해지는 자신을 발견했으며,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뱀들을 통해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아버지와 동생 옥희의 죽음, 한국전쟁이 남기고 간 시대의 상처, 순탄치 못한 사랑 등으로부터 겪은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사진=심종대 기자
[뉴스프리존=심종대 기자]추상미술을 주도하던 근대 한국화단에서 자신만의 형상화 양식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대표적인 여성작가이자 미술계의 큰 별 천경자는 지난해 8월 6일,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던 미지의 세계로 영원히 그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작품이 흩어지지 않고 영원히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지아래, 작가는 1998년 분신처럼 아끼던 주요작품 93점과 전작품의 저작권을 서울시에 기증했다.
이번 전시 <천경자 1주기 추모전: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는 작가의 작고 1주기에 맞춰 작가의 화업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전시로, 서울시 기증 작품 전체와 함께 개인 콜렉터들의 주요 소장품을 작가의 글, 사진, 기사, 삽화, 영상 등의 아카이브와 함께 전시된다.
전시의 부제는 ‘자유로운 여자’(집현전, 1979)에 등장하는 문장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들-그 위에 人生이 더 있는지도 모른다’에서 인용한 것으로, 삶의 희로애락을 매 순간 솔직하게 마주했던 작가 특유의 시적 감성을 공유하고자 했다.
전시는 인생, 여행, 환상, 그리고 아카이브로 구성된다. ‘인생’에서는 1941년 작가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작업했던 학창시절의 작품부터 6.25 전쟁 직후 사회적, 개인적 혼란의 시기에 살아남기 위해 그렸던 <생태>를 지나 <고>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막은 내리고>와 같은 천경자의 대표적인 자화상과 여인상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
‘여행’에선 1970-80년대 당시 ‘여행풍물화’라고 불렀던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는 대부분 작가가 아프리카, 유럽, 남미, 인도, 미국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영감을 받아 그려낸 밀도 높은 풍경화와 크로키들로, 꽃과 여인을 주소재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는 천경자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끝으로 ‘환상’은 <초혼> <백야>와 같이 몽환적인 색체와 강한 필치가 담겨 있는 1960년대의 작품들과 함께 미완성 작품인 <환상 여행>등을 선보임으로써 천경자가 상상했던 미지의 세계와 내세에 대한 관념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환상 여행>에서는 지우고 덧칠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던 작가의 치열한 작업 과정을 확인 할 수 있다.
한편, 천경자는 완성에 이르면 꿈이 없어지는 것이기에, 진행형을 의미하는 ‘미완성의 인생’이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심종대 기자, simjd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