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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생활체육]게이트볼의 유래와 한국게이트볼의 도입과 ..
사회

단독]-[생활체육]게이트볼의 유래와 한국게이트볼의 도입과 발전사

심종대 기자 입력 2016/06/21 18:04


이태원2동 게이트볼 클럽(회장 정정웅)은 오는 24일 반포대교 밑 게이트볼 전용경기장에서 치러질 용산구 게이트볼회장배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지난 17일 남산게이트장에서 연습 후 승리를 기원하면서.../사진=심종대 기자

[뉴스프리존=심종대 기자]게이트볼은 막대기(채, 스틱)로 공을 쳐서 관문(gate)을 통과시키는 경기로, 고대로부터 막대기로 공을 치거나 게이트를 통과시키는 경기는 여러 나라에서 존재했다. 중국의 추환, 한국의 격방, 서양의 골프나 크로케, 크리켓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격구나 서양의 폴로와 같이 말을 타고 관문(gate)을 통과시키는 방식도 있다.

게이트볼의 기원은 크로케(croquet)에서 찾을 수 있다. 크로케는 1300년대 남부 프랑스 농부들의 놀이에서 기원했다고 전한다. 이 놀이는 버드나무 가지를 구부려 철주문을 만들고, 양치기의 지팡이를 닮은 갈고리가 달린 나무망치를 가지고 공을 철주문 안으로 쳐서 통과시키는 놀이였다. 이러한 놀이를 프랑스에서는 페일메일(paille maille) : 후에 펠멜(pall mall)로 불렸다. 이 놀이가 17세기 이태리와 스코트랜드 등 유럽 여러 나라에 전파되면서 영국에서 크로케란 명칭으로 불려졌다.

이러한 크로케는 영국으로 전파돼 17세기 무렵에 이르러 찰스 2세를 비롯한 영국 왕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가 됐고, 1830년경부터 한 때 크로케 동호인들이 테니스 동호인들보다도 훨씬 많을 정도였다. 그 후 영국민에 의해 인도, 호주, 뉴질랜드 및 미국에까지 보급됐다.



하지만 크로케는 세계적으로 보급되지 못하고 미국에 300여 개의 클럽을 비롯한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의 국가에서만 사교적인 스포츠로 자리잡게 됐다. 크로케가 한국에 소개된 기록은 없다. 일본에 소개된 것은 1880년경으로 알려져 있을 분 당시에 크로케는 소개된 것에 그칠 뿐 보급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다시 크로케를 받아들인 것은 2차대전의 패전 직후인 1947년 스즈끼 가즈노부(鈴木和信)에 의해 변형 보급됐다.

스즈키 가즈노부(鈴木和信)는 1947년 2차 대전 패전이후 어린아이들을 위해 손쉽고 건전한 놀이로 나무가 많은 훗카이도(北海道)의 특성을 고려해 경기용구와 홈볼, 관문(현재의 골폴과 게이트)을 만들어 게이트볼이라 명명했다. 이렇게 완성된 게이트볼은 1948년 3월 아사이가와(旭川)시의 특허청에 용구의 실용신한 등록을 출현하면「ゲトボル競技の仕り方及規則(게이트볼 경기의 요령 및 규칙)이라는 소책자 발행을 통해 알려졌다.

최초의 게이트볼 단체는 ‘일본게이트볼협회’로 1953년 스즈키 가즈노부의 주도로 결성됐고, 또한 1953년에는 최초의 전국대회인 동경도지사배 일본게이트볼 선수권 대회가 30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됐으나, 게이트볼은 일본에서 훗카이도(北海道) 지방에서만 주로 성행했다. 일본에서 게이트볼이 성행하게 된 것은 1964년 토쿄(東京)올림픽이후 일본 사회 전반에 생활체육의 붐과 함께 1970년 대 이후 쿠마모토(熊本)현을 비롯한 전국에서 게이트볼 단체가 구성되면서부터이다.


게이트볼이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게 된 것은 1980년대 초반부터로, 일본 게이트볼 연합이 설립되면서 체계적인 보급 및 활성화가 되기 시작했다. 각 지역마다 단체가 난립하고 경기규칙 또한 다른 부분이 많아 경기규칙의 통일에 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각 단체가 통합을 결의하고 1984년 12월 21일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재단법인 일본게이트볼연합’의 설립을 인가 받고 발족됐다.

이듬해인 1985년 3월20일에는 통일된 공식 게이트볼 경기규칙을 발간해 이를 계기로 일본 전국에 게이트볼을 보급시키는 반면 한국, 중국, 대만, 미국 등의 해외 보급도 추진됐다. 1985년 9월 26일에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미국 (하와이), 브라질 등 6개국이 모여 세계게이트볼연합을 설립하고 1986년 8월 26일부터 27일에는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하면서 해외에 보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현재 게이트볼은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미국(하와이, 남캘리포니아), 캐나다, 아르헨티나, 페루, 파라과이, 브라질, 볼리비아, 싱가포르, 홍콩, 마카오,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우루과이 등이 세계연합에 가맹돼 있다.



# 한국게이트볼의 도입과 발전

게이트볼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현재 1980년대 초반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이전에도 한국에는 게이트볼이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1956년에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의 김명조 교수가 게이트볼을 소개했다고 한다. 또 1959년 서울 진명여고 졸업사진첩에는 당시 교사들이 게이트볼을 행한 장면이 있다. 당시 교사 5-6명이 게이트볼 장비를 들여와 게이트볼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65년에는 일본레크리에션대회에 참석한 김명조 교수가 부산대학교에서강습회를 실시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당시 게이트볼은 일본에서도 훗카이도(北海道) 지방의 스포츠로 일본 전역에 확산되기 이전이었고, 한국에서도 경제적 사정이 어렵고 체육에 관한 인식이나 관심이 매우 낮은 시기로, 이 시기에 게이트볼이 보급되기에 힘든 상황으로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게이트볼은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1980년 대 초반 정부는 스포츠 입국을 강조하면서 스포츠 정책을 표방하던 시기로, 이를 위해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고, 1982년 체육부 설치,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 프로씨름 등이 출범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전반에는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경제 성장으로 인한 새로운 여가가 필요한 여가의 시대가 도래했고, 또한 사회 발전으로 인한 노령화 사회로 노인 체육의 관심이 일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한국의 사회적 배경에 1980년대 초반 일본 게이트볼이 성행한 점도 한국에 게이트볼이 도입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즉 1980년 대 초반 일본에서는 사회전반에 노령인구의 증가와 함께 생활체육의 열기가 매우 고조된 상태였다. 이러한 시기에 일본 사회에서 게이트볼이 전국적인 노인 스포츠로 자리잡고 큰 인기와 더불어 참여하는 동호인 수가 크게 증가했다.

또한 게이트볼의 보급의 눈을 해외로 돌려 관광객이나 이민자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본의 분위기는 한국에 게이트볼이 들어오는데 기여했다. 실제로 한국 게이트볼은 일본 게이트볼 동호인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국내 게이트볼 동호인들을 조직했다. 이와 함께 한국 게이트볼은 무엇보다 노인체육의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도입을 모색했다.

한국에 게이트볼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1980년대 초반으로, 경주, 대구, 부산 등지로 보급된 게이트볼은 ‘한.일 게이트볼 보급협력회’ 와 대구의 ‘오구협회’, ‘한국 게이트볼 보급회’, ‘한국 게이트볼 협회’등을 거쳐 1988년 올림픽경기대회 이후 일반 국민의 체육활동 참여열기가 고조되고, 국민건강 및 여가 선용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면서 민간 차원의 생활체육을 육성하고 건전한 체육문화를 창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국민생활체육협의회가 1991년 출범하고 ‘생활체육전국게이트볼연합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인 발전에 이르게 된다.



생활체육전국게이트볼연합회는 초대회장에 국제변호사인 이병오 회장이 취임해 한국 게이트볼 보급과 활성화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연합회를 설립한 첫해인 1991년 10월 10일에는 제1회 문화관광부장관기 전국대회를 개최됐다.

초기에는 작은 규모로 시작된 이 단체는 국민생활체육협의회를 통한 국고 예산지원과 지방자치단체의 후원에 힘입어 매우 큰 조직으로 발전해 나갔다. 또한 1995년 1월에는 대한게이트볼연맹 및 한국지체장애인협회 게이트볼동호회를 흡수 통합하면서 규모가 더욱 커졌다. 그 해 3월 국회의원이던 백남치 회장의 취임과 함께 국제게이트볼연합과 아시아게이트볼연합에 가입하면서 한국에서 가장 큰 게이트볼 단체가 됐다. 이와 함께 전국규모 대회인 회장기 전국게이트볼 대회를 창설하면서 많은 동호인을 흡수했다.

1997년 이강두 회장의 취임은 게이트볼에 전반적인 발전 기회를 맞는다. 공직 경험이 많은 현역국회의원이었던 이강두 회장은 정부로부터 많은 예산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편 게이트볼이 노인 스포츠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고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는 스포츠로의 발전을 모색했다.

1998년 청소년 대회의 창설과 초.중.고 교원강습회, 여성게이트볼대회 창설, 대학게이트볼선수권 대회 등은 이러한 노력으로, 대통령기, 국무총리배,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국민생활체육회장기, 전국게이트볼연합회장기 대회 등 전국규모의 대회가 확대 개최됐다. 현재 60만명 이상이 즐기는 생활체육 중심종목으로 성장했다.

이태원2동 게이트볼클럽 정정웅 회장은 게이트볼의 운동 효과에 대해 "게이트볼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기 좋지만, 특히 노년층에 적합한 운동”이라면서, “규칙이 이해하기 쉽고 도구가 간단한데다 운동량이 적당하다. 게이트볼은 전신운동 효과가 있다. 한게임당 30분씩 걸으면서 공을 줍기 위해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다 보면 몸 전체의 근육을 사용하게 되고, 허리를 구부린 자세로 하는 스윙동작은 허리와 복부근육도 강화시켜 준다.”고 말했다./자료 및 사진출처=(사)한국게이트볼 협회

심종대 기자, simjd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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