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1890년대 작자미상의 제목 없는 조선지도첩 중의 <대조선국전도>. 18cm x 26cm, 이 지도의 동해상에 울릉도의 중봉, 그 동쪽 오른쪽에 우산(于山) 즉 독도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지난호에 이어
[뉴스프리존=심종대 기자]독도는 조선 전기부터 우산도(于山島)또는 삼봉도(三峰島)로 불리면서 울릉도와 함께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돼 있었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성종실록(成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등의 문헌에도 그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조선 후기의 민간외교가 안용복은 1696년 일본으로 하여금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인정하게 했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 의하면, 섬 주변에 가제(강치)가 많이 서식해 1794년경부터 가지도(可支島)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다가 1881년경부터는 독도로 불리고 있고 1906년 울릉군수 심홍택의 보고서에서 최초로 ‘독도’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에 의하여 독도의 존재가 유럽인에게 알려졌다. 프랑스인들은 독도를 처음 발견한 배의 이름을 본 따 리앙쿠르 암초라고 불렀다.
그 후 1854년 러시아 군함이 독도를 발견하고 독도의 서도를 올리부차, 동도를 메넬라이라고 불렀고, 1855년에는 영국 군함 호네스트호에 의해 측량돼 영국의 해도(海圖)에 호네스트 암초로 기재됐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해 독도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같은 해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통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개칭하고 일방적으로 시마네현에 편입시킨다.
이 얼마나 천인공노할 일인가. 남의 땅을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일본! 이후 계속해서 일본은 일방적으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해오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1954년 8월에 등대를 건설하고, 1982년에는 독도 주변을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했고, 1997년 11월에는 주 부두와 간이 부두, 진입로를 갖춘 독도 접안시설을 갖추는 등 실효적인 지배 장치를 강화해오고 있다. 이런 노력에도 일본 시마네현 의회는 지난 2005년 3월 16일 해마다 2월 22일을 ‘다케시미의 날(竹島)’로 정하는 조례를 가결했다.
이로 인해 한일 간의 영토 문제가 또 다시 대두되어 시민들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는 등 사회적 파장을 낳았고, 시미네현의 조례안 가결에 대응해 한국 정부는 일반인의 독도 방문을 전면 허용하고 대일(對日) 신 독트린을 발표했다.
대한민국 독도경비대/사진제공=동북아역사재단
# 독도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우산도(于山島)
독도의 명칭은 일찍부터 기록에 오르내린 울릉도와 관련지어 살펴보아야 한다. 본토 유목민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울릉도의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된 것은 6세기 초(512년)이었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에 ‘6월에 우산국에 신라에 속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후 울릉도라는 명칭이 정착됨에 따라그 부속 도서인 독도로 우산이라는 명칭이 이동하게 됐다.
조선 1454년 단종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강원도 울진현 조에서도 ‘우산, 무릉 두 섬이 현(縣, 울진)정동(正東) 바다 한 가운데 있다’하여 동해상에 무릉과 우산 두 섬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1530년 중종 25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강원도 울진현 조에 ‘우산도, 울릉도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다.
독도는 조선시대에 각각 삼봉도(三峰島), 우산도(于山島), 가지도(可支島)라고 불렀고,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던 독도를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 제41조에 의해 독도를 울릉군의 한 부속도서로서 공식적으로 강원도에 편입했다. 행정지명으로서 ‘독도’라는 이름은 1906년 울릉군수 심홍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됐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상북도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獨島(독도)’로 표기되는 독도는 ‘외로운 섬’ ‘홀로섬’이 아니라 ‘돌섬’이 초기 이주민인 전라도 남해안 출신 사람들에 의해 ‘독섬’ 또는 ‘돌섬’이 되는데, 지금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 혹은 ‘돌섬’으로 부르고 있다.
*삼봉도(三峰島)
일본은, 현재 우리의 옛 기록에 나타나는 삼봉도(三峰島)가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독도가 삼봉도로 불렀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많다. 우선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삼봉도의 형상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아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일본의 전보신문 1906년 5월 27일자 보도 기사에 의하면, ‘러.일 해전의 戰場으로 독도를 소개하고 있다. 그 지형을 설명하면서 동도와 서도, 그리고 관음도(觀音島)라 하여 3개의 섬을 열거했다. 또한 이 신문에 실린 독도의 전경사진에는 3개의 섬, 즉 ’삼봉도‘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끝으로 제3국의 자료를 살펴보면, 1849년 3월 독도를 목격한 미국 포경선 윌리암톰슨호는 그 항해일지에 ‘3개의 바위를 보았다’라고 기록했다. 즉, 독도의 모습을 ‘삼봉도’로 파악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독도가 삼봉도 였음은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제3국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의 진실성은 오늘날 해상에서 독도를 관망해 보면 누구나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실제 독도를 보기 어려운 경우에도 독도가 ‘삼봉’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진은 주위에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한국 기록에 나타나는 삼봉도는 울릉도에 불과하다’는 일본의 주장이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또한 독도에 대한 우리의 기록이 구체적이고 정확했다는 것도 함께 알 수 있다.
독도와 사람들/사진제공=동북아역사재단
*가지도(可支島)
‘가지’는 ‘물개’라는 말로서 물개가 많은 섬이라는 뜻이다.
*석도(石島)
‘석도’라는 말은 ‘돌’의 전라도 방언 ‘독’을 ‘독섬’으로 한자 표기했고, 이는 당시 울릉도에 개척 원주민으로 왔던 전라도 사람들이 사용하던 명칭을 그대로 적었다는 것이다.
1900년 10월 반포(頒布)된 대한민국칙령 제41호는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부르고 군수를 파견해 울릉전도, 죽도, 석도를 관할토록 정하고 있다. 여기서 울릉전도는 울릉도를, 죽도는 울릉도 동쪽에 접해 있는 죽도를, 석도는 독도를 가리키고 있다. 석도라는 명칭은 그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돌섬’이라는 뜻을 한자말로 옮겨 놓은 것으로 돌로 된 섬이라는 ‘돌섬’의 사투리가 ‘독섬’이고, 그것이 소리와 뜻을 따라 ‘석도’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듯이, 석도는 역시 돌섬의 또 다른 표현이다.
*독도(獨島)
돌섬이 초기 이주민인 전라도 남해안 출신 사람들에 의해 ‘독섬’으로 발음되면서 독도로 표기됐다. 공교롭게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헌 가운데서 ‘독도’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일본 측 문헌이다. 일본 군함 신꼬마루는 1904년 9월 25일자 항해일지에 울릉도에서의 탐문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한국 사람이 독도라는 표기룰 쓰고 있었다고 한다./자료출처=독도는 보물섬이다.-다음호에 계속
심종대 기자, simjd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