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심종대 기자]‘효 교육은 인성교육이며 끝입니다. 처절한 정치권의 이전투구, 돈 자체를 모으기 위하여 골목상권까지 마구잡이로 휘감는 재벌들의 욕심, 이용가치만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들의 양심(兩心), 자신들의 쾌락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어린 자식을 인간적 방법으로 살해하는 부모와 재산을 빼앗으려 하거나 모시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부모를 극살 하는 세태가 이대로 지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의 보복은 우리대가 아니면 다음 세대에 지속될 것이며 잔인하고 무자비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기도 합니다.’- 최기복 교수 ‘인성(人性) 그리고 효(孝)’의 인사말 중에서
작금에도 인간이기를 거절하는 기막힌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사람이 스스로의 존엄을 인정치 않으면 한민족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멈추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저지른 패악과 패륜에 대해 보복을 서슴치 않는다. 한민족이 일제로부터 36년간 식민압제의 아픔을 겪었고 동족상잔의 6.25라는 남북전쟁을 겪었다. 이는 조선 5백년 무능한 왕권의 역사에 대한 보복으로 봐야한다.
원칙 없는 정치와 양심 없는 기업, 희생 없는 종교, 잘못되어가고 있는 가치관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가고 있는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우리는 굽은 것을 펴고 눌린자들을 쳐들어 가면서 사람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사람사는 이유가 어디에 있든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행복이다. 행복은 가까이 있다. 가족과 이웃은 내 행복의 주체이자 객체이다. 세계 최고의 자살 왕국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은 대가족 제도 하에서 독거가족 시대로 홀로 사는 젊은이들이 대종을 이루기 시작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컴퓨터의 관계로 전락되고 있다.
또한 컴퓨터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사악한 업자들은 한참 일할 나이의 젊은이들을 게임 중독자로 만들어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분별하지 못하는 정신병자를 양산한다. 사람은 착한 존재이기도 하고 악한 존재이기도 하다. 모태교육부터 시작해 무덤에 이르기까지 배우고 익히는 교육이 삶이다. 착한 존재라면 보호 양육해 붙박이 문화로 정착해야 하고, 악한 존재라면 교육을 통해 인성을 바꾸는 교육이 여하한 교육보다 우선해야 한다.
그렇다면, 효는 학문인가. 효를 학문으로 보기 어렵다는 일본어 사전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효를 신학, 철학, 문학과 함께 학문적 영역으로 삽입되어야 함은 물론 이 시대의 형이상학의 새로운 장르가 되어야 한다. 물론 학문적 정의가 모호하지만 신학을 학문의 영역으로 본다면 효학 또한 학문으로 볼 수 있다.
효란 우리말 사전에는 ‘부모를 섬김’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부모가 계시지 않으면 효는 이미 끝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인가. 부무가 계시지 않으면 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효는 전승되는 문화가 될 수도 없고 존재의 의미도 부각시켜야 할 책임이나 의무도 없다. 대가족 제도에서만 존재되어온 종속적, 수직적 가족 사랑의 형태를 면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상도 변했고, 가족제도 또한 변했다.
먼저, 효의 시대적 변화를 살펴보자. 대가족이란, 직계존비속이 최소 3대에서 4대가 한 지붕 아래서 함께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가족으로, 할아버지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족은 장수 가족이어서 보기 힘들지만 효를 몸으로 보이는 효 가족으로 추양돼 왔고 직계가 아니라 손 그 자손들은 집단성씨 촌락을 이루고 자기들만의 제사문화라든가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를 이어 열녀비나 효자문을 세워 다른 성씨들과는 차별화를 시도했다. 웃어른은 가문에서는 최고의 통치권자였고, 경제적으로도 불가침의 성역 안에 존재했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상의 계급이 법으로 보장됐던 사회였기에 감히 웃어른에 불순한 언행이거나 불효라고 판단되는 사안은 국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가통으로 다스렸고 그 최고의 위치에는 연로하신 할아버지의 존속 최상위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잘 섬기고 모시는 것은 당연지사였기에 패륜이나 패역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한국의 경우는 일본의 압제 속에서 학도병으로, 정신대로, 노동자로, 저들의 방패막이가 되고 나라를 잃은 백성이 되어 신음하는 처지에서도 가족의 기아를 막으려하는 가장의 비장한 저항 같은 것이 대가족 제도에서의 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어 6.25 전쟁으로 2천만 민족이 서로의 싸움을 통해 1천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자주독립 만세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남과 북은 두 동강이 나고 대가족 제도의 효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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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가 모여서 한 지붕 아래 한솥밥을 먹는 핵가족 시대의 효는 어떻게 변했을까. 가족공동체에서의 할아버지의 교육은 아버지의 절제와 절약은 교훈이거나 교육이 아니라, 잔소리로 전락되어 버렸고, 잔소리가 인성교육의 핵이라는 것을 간과하게 된다.
이 세대는 산업화의 시대를 예고했고, 6.25라는 남북 간의 전쟁이 대가족 제도의 붕괴를 가져오면서 우리네 삶은 극한 상황의 기아와 혼돈으로 국가의 정체성이 생존이었던 시대이다.
또한 나노는 약 10억분의 1을 지칭하는 물리학적 용어로, 나노 가족이란, 가족의 사분오열을 의미한다. 이 가족은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하면서 하루에 단 한끼도 한 식탁에서 둘러 앉아 식사를 하지 않는다. 핵가족은 밥상머리 교육이 존재하지만 나노가족은 그럴 일이 없다.
효의 주체도 객체도 없다. 젊은 세대는 더치페이라는 이름으로 지인 간 혹은 이해 당사자 간의 식사를 할 때는 각각 자기가 먹은 식대는 자기부담으로 하고, 부모 자식간의 대화와 가족 간의 대화도 필요한 것 외에는 거의 단절된 수준이다. 인간의 거래도 보험적 성격을 띈 사안을 제외한다면 받은 것보다 더 베풀지 않고 모든 것을 실용 혹은 이용의 측면에서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정은 당연히 메마르고, 인성은 온데 간데 없어진다.
물질 만능 사회로 바뀌면서 효라는 단어는 최소의 부모봉양에 대한 보은 수준으로 머물러 있고, 자식은 절대로 병든 부모의 수발을 외면한다. 노인요양으로 보내고, 경제적으로 힘이 부치면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일컫는 해외유기로 부모를 버리는 이까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이 세대의 효교육은 어른들의 모범적인 행위를 본받는 일이어서 늘 본받을 어른도 없고 교사도 없기 때문에, 가치 중심의 축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이 모태교육을 시작하는 가정교육이 중요하다. 가정은 붕괴되어 버린 채 한 지붕 아래서 살면서 모두가 다양한 자기 직업을 갖고 바쁘다는 핑계로 한끼의 식사도 같은 식탁에서 이뤄지지 않는다면 효를 별도의 교육으로 충당되어져야 한다. 나노가족의 시대는 가정, 학교, 사회, 국가에서 효를 가르치고 배양하지 않으면 국가는 붕괴되고 만다.
나노 가족의 세대에 이어 독거가족 시대의 효를 살펴보자. 이 시대는 집을 뛰쳐 나와 혼자의 생활을 시작한다. 결혼해 처, 자식을 거느릴 부양능력도 부담이 된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부부간 각자의 이해관계만을 좇아서 생활한다. 간통죄가 폐지되고 성의 자유를 주장하는 세력들은 증가하는 가운데, 부부윤리란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죽음 사이를 갈라 놓을 때까지 함께 할 것을 서약하고 지키는 일임에도 이혼율까지 OECD국가에서 1위를 고수하는 나라가 됐다.
또한 아파트 업자들은 혼자 사는 독신 남녀용을 건축하고, 옆동에 사는 사람과 아래 윗층에 사는 사람끼리도 이들은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마트나 식료품 가계 또한 이들 독신자들을 위한 간편 세트를 개발하거나 간편 포장으로 바꾸어 이를 조장하고 있는 이 시대에 효를 말하려면 어디에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독거가족 시대의 효는 의무다. 세금이 붙지 않고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형식적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의무의 이행이 더 어렵다. 독신자의 윤리강령을 만들어 사회봉사를 시키거나 이웃과의 관계를 강제할 수도 없다.
끝으로, 사물 인터넷 시대의 효를 살펴보자. 사물인터넷의 시대란, 사물에게 인공지능을 부여해 사물끼리 생각하고 행위토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시대에 2천5백년 전 공자의 효를 재탕 삼탕하기에는 석연치 않고, 그렇다고 예수의 효를 이야기하기에도 찝찝하다. 어머니 은혜를 강조한 부모은중경을 바이블로 지은 지은(知恩)과 보은(報恩)의 이야기를 한다해도 시대와는 걸맞지 않다.
이 세대는 년말 연시나 명절에 보내는 축하메시지나 동영상도 해도 그렇다. 저비용으로 타인이 보낸 것을 재탕, 삼탕해 보내면서 기록까지 고스란히 남는다. 부모님을 찾아뵙거나 몸으로 인사하기보다, 스마트폰의 기능을 활용해 기계속의 화면을 향해 인사를 드린다. 그렇다고 효행의 질이 떨어진다고 하거나 효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성마저도 기계속의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버린 상황에서 효교육의 포인트도 선명해져야 하고 앵글은 방향전환을 모색해야 하고 포커스 또한 조정되어야 한다./다음호에 이어
심종대 기자, simjd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