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 알바'로 일반인 꼬드겨 인출책으로 활용
[연합통신 넷= 이천호기자] 무직자인 김모(27)씨는 1월 초 인터넷 구직 사이트에서 괜찮은 구인 광고를 발견했다.
중국에 본사가 있고 한국에 지사를 두고서 의류와 각종 공산품을 전문적으로 배송하는 일을 하는 업체의 광고였다.
아르바이트생이 하는 일은 은행 송·환금, 출납업무. 무엇보다도 일당이 20만원 이상인 것이 마음에 들었다.
김씨는 구인난에 적힌 070으로 시작된 번호로 연락했고, 무난히 취직했다.
하지만 일하는 방식이 여느 회사와 달랐다.
업체는 중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위챗을 깔라고 했다. 통장, 주민번호, 보안카드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업체 측은 애초 구인란에서 제시했던 업무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스포츠토토 수익금을 찾아주는 일이라고.
김씨는 반신반의했으나 '일당 20만원 이상'이란 유혹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김씨는 업체가 알려준 '선배 아르바이트생'을 경기도 모처에서 만나 일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 선배도 업체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도 다른 선배에게서 일하는 방법만 배웠다고 했다.
김씨가 취직 후 업무를 숙지할 때까지 업체 사무실을 가보거나 업체 관계자를 직접 만나보지를 못했다. 오직 위챗과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로 연락한 것이 전부였다.
김씨가 하는 일은 단순했다.
아침에 지정된 장소로 가면 퀵서비스가 와서 번호가 매겨진 통장 체크카드 10여 장을 건네 준다.
김씨는 은행에 가서 이 카드들이 거래가 되는지를 확인한다. 거래가 정지된 카드를 폐기하고 그 현황을 업체에 보고한다.
이후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커피숍에서 대기한다. '몇번 카드로 돈을 인출하라'고 연락이 오면 그 카드로 돈을 뽑고서는 다시 자기의 통장으로 그 돈을 입금한다.
그러면 업체는 미리 받아둔 김씨의 계좌번호, 주민번호, 보안카드번호로 김씨 통장에서 돈을 인출한다. 김씨에 줄 수수료 명목으로 입금된 돈의 1.5%만을 남겨둔 채.
김씨가 사흘 일하고 받은 돈은 90만원. 기대 이상의 수익을 거뒀으나 경찰(서대문경찰서)에 붙잡혀 구속됐다.
김씨는 경찰조사에서 자신이 인출한 돈이 보이스피싱으로 인한 피해액인 줄 몰랐다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김씨가 한 일이 바로 보이스피싱 인출책의 임무였다.
잠시 주춤했던 보이스피싱 범죄가 진화를 거듭하면서 최근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8일 경찰청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발생건수는 2010년 5천455건에서 2011년 8천244건으로 급증했다가 2012년 금융·수사당국이 금융제도를 개선하고 단속을 강화하자 5천709건으로 감소한 뒤 2013년에 4천765건으로 더 떨어졌다.
하지만 지난해 11월까지 보이스피싱 건수는 6천806건으로 다시 반등하는 모습이다.
수법도 지능화됐다. 단속을 피하려고 '고액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일반인을 인출책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보이스피싱은 주로 중국에 있는 이른바 '콜센터'와 국내의 '통장모집책', '인출책'이 한 팀을 이뤄 실행된다.
통장모집책이 대포통장을 구해 인출책에 팔아넘기면 인출책은 해당 계좌 정보를 중국 콜센터에 알려준다.
콜센터는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당신의 계좌가 범죄에 활용됐다'는 식으로 피해자를 속여 예금을 대포통장 계좌로 이체하도록 유도하면 국내 인출책이 해당 대포통장으로 들어온 피해자의 돈을 찾아 콜센터로 송금한다.
예전엔 중국 동포 등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직접 인출했다면 최근엔 인출책이 잡혀도 윗선이 노출되지 않게 조직원과 전혀 무관한 일반인을 활용하고 있다.
인출에 동원된 일반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의 불법성을 의심하면서도 고수익에 눈이 멀어 불법을 저지르게 된다고 경찰은 전했다.
서대문경찰서가 검거한 김씨의 사례처럼 사회 경험이 부족한 20∼30대가 구직 사이트를 통해 보이스피싱 범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본인이 불법임을 몰랐다고 항변하더라도 현행 전자금융거래법에서는 통장이나 현금카드를 넘겨주거나 받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고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 벌금을 받게 된다.
인출책에 활용되는 일반인들은 추가 범죄 피해에 노출될 수도 있다.
최근 금천경찰서가 적발한 보이스피싱 사례를 보면 인출 아르바이트에 동원된 20대 여성들은 조직원으로부터 "돈을 갖고 도망가면 위험해질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실제 조직원의 가방에는 31cm 길이의 흉기가 있었다. 조직원들은 또 20대 여성들의 사진을 찍어 윗선에 보내기까지 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최근 보이스피싱 발생이 증가하고 있고 수법이 지능화하는 추세"라며 "특히 구인·구직사이트를 활용해 젊은이들을 인출책으로 유인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이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근절을 위해 각 지방청에 지능범죄수사대를 구성했고, 올해 전담팀을 꾸려 대대적으로 단속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