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전경
‘연단조양(鍊丹調陽)’이라 했다. 예부터 단양은 신선이 다스리기 좋은 땅이라 했다. ‘연단’은 신선이 먹는 환약이고, ‘조양’은 볕 잘드는 고장이라는 뜻으로, 이를 줄여 ‘단양’이라 부르게 된다.
오늘날에는 잘 뚫린 중앙고속도로를 통해 서울에서 2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그 예전의 단양은 내륙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땅이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땅이다. 그 옛 선인들은 산길을, 그 물길을 건너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남한강을 따라 뱃길을 쫓아오니 수려한 산세가 객을 맏이 했을 터이고, 바람 일고, 불어 시원함이 가득하고 자연의 빛이 풍부한 단양 땅을 밟게 된다. 휘도리의 물길을 만난다면 딱 아버지의 주름 만큼이고, 오르막의 산길이라면 딱 어머니의 가슴팍 만큼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수려한 산세만큼이나 사람은 그 모습에 마음을 다잡는다.
도담삼봉과 석문, 선암과 함께 삼선구곡의 물길 따라 자리한 3암과 충주호에 몸 담근 2봉우리는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이고, 그것이 그리워 그 자리를 찾으면 역시 그들은 그 자리에서 객을 반긴다. 처음과 지금이 같은 바위와 물이다. 그렇게 지켜진 젊음은 단양의 얼굴이 되고 그 얼굴을 찾는 이는 곧 선비가 된다.
멋진 산수화 속에 마음속 응어리를 풀고 나오면 그 응어리는 그대로 남아 옥아 단양 땅에서 잠든다. 설령, 그 답답함이 그대로 남아있다 해도 깊숙한 땅에 숨은 단양, 그 속일뿐이다. 비록 고개를 넘지 못한 답답함이 산등성이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으나, 이는 바람에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이곳이 단양이다.
풍류와 산수가 어우러진 여덞 가지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여행, 단양팔경(丹陽八景).
대한민국 산수여행의 고전이자 원조다. 물과 바위의 푸르름이 어울리고, 사람과 풍류와 산수가 어울러 지는 곳, 객들의 발걸음을 편히 쉬게 해주는 곳이다. 사람의 인심이 좋고, 그러한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좋다. 거기에 산과 물의 수려함이 있어 더 좋다.
제1경 도담삼봉
제1경은 먼물위에 뜬 세 개의 바위, 도담삼봉(島潭三峯)이다.
지금의 도담삼봉 관광지는 과거 ‘삼봉나루’로 ‘매포’라 불리던 선박의 정박지였다. 강원도 뗏목이 쉬어가던 곳으로 경복궁을 지을 당시 오대산에서 벌채한 금강목이 머물렀던 곳이며, 강원도로 가는 소금배가 머물던 곳이다.
도담삼봉은 영월에서부터 단양을 동서로 흐르며 남한강에 석회암 카르스트지형이 만들어낸 봉우리로 강물이 휘돌아 나가는 길목에 생긴 깊은 여울에 자리한다. 서방의 첩 질에 등 돌려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처바위’와 그러던지 말던지 여전히 교태를 부리며 아기를 가진 모습으로 중봉을 바라보고 있는 ‘첩바위’가 있다. 그 가운데에 6m높이의 늠름한 바위를 중봉이라 하는데,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우뚝서있는 충청도 사나이의 우직함을 가진 ‘서방바위’가 멋스럽다. 단양팔경의 제1경으로 단양군수를 지냈던 퇴계선생은 물론,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등 수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시와 그림을 남긴 곳이다. 한편으로는 삼봉과 호가 같다하여 삼봉 정도전의 관련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또한, 남한강이 흐르는 단양땅의 아름다움을 1894년 비숍여사의 기행문에서 만날 수 있으니, "한강이 소나무로 덮힌 절벽을 둘러싸고 짙푸르게 멀리도 흐른다. 북서쪽으로 강이 수려한 절벽 밑으로 음악소리를 내며 높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수미산의 아래로 사라진다. 공원처럼 생긴 언덕위의 도담마을은 웅대하며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라고 하였다.
제2경 석문
지척에 자리한 제2경 ‘석문(石門)’은 자신을 쉽게 들어내지 않는다.
도담삼봉 관광지 안에 같이 자리한 석문은 삼봉 주차장에서 약 200여m 계단을 따라 오르고, 100여m의 오솔길을 걸어야 만날 수 있다.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 낸 자연 유산으로 석회동굴이 붕괴 되면서 동굴 천장의 일부가 구름다리처럼 형성이 된 것이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석문 자체의 형태도 기이하지만, 석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남한강과 강 건너의 농촌의 풍경도 넉넉함이 가득하다. 또한 석문 아래로는 마고할미의 전설이 깃든 작은 굴이 하나 있다. 이곳은 하늘에서 물을 길러 오는 곳으로, 어느 날 마고할미가 물을 길러 왔다가 이곳에서 비녀를 잃어버리고 그 비녀를 찾고자 손으로 흙을 파낸 것이 99마지기의 논이 되었고, 늘 풍성한 농작물을 만들어 내었다하여 옥전(鈺田)이라 불린다.
이후 마고할미는 비녀를 찾지 못하고 땅을 일구어 내다가 잠시 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하늘나라 보다 더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이 자리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한다. 수확한 곡식은 하늘나라의 양식으로 보내졌으며, 하늘로 오르지 않은 마고할미는 끝내 돌이 되었는데, 남한강에서 바라보면 석문 옆으로 담뱃대를 물고 술병을 들고 있는 형상의 바위를 만날 수 있다고 전한다.
석문 오르는 정자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의 풍경, 시원스럽게 부는 바람 속에 묵은 체증은 깨끗이 사라진다. 도담삼봉을 방문했다면 석문은 놓치면 안 되는 풍경이다.
제3경 구담봉
제3경과 4경은 충주호의 물줄기를 따라 나서야 만날 수 있다. 두 곳 모두 육로에서는 만날 수 없는 풍경으로 장회나루에서 배에 올라서야만 만날 수 있는 풍경들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넋이 빠져 집에 돌아갈 줄 모르고 그 자리에서 굳어 돌이 되어 버린 거북이 한 마리가 너무도 창피한 나머지 충주호의 물속에 비춰져야만 보인다는 ‘구담봉(龜潭峰)’이 제3경이다. 커다란 거북 한 마리가 바위에 오르는 듯한 형상으로 충주호의 물빛에 비추어 보면 거북무늬의 모양이 나타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선생은 이를 보고 당나라의 소상팔경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하였으며, 또한 조선 인종때는 단양과 인연이 깊은 구옹(龜翁) 이지번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지번은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으로, 판관을 지낸 이치의 아들이며, 토정 이지함의 형이다.
또한 조선 선조에 영의정에 올랐던 이산해의 아버지로, 어린 시절 부터 침착함이 으뜸이고, 어머니가 병이 들자 자신의 자리를 찔러 피를 받아 약을 타서 드리니 병을 낫게 한 효자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이지함은 한때 진사에 올랐으나 감안로의 무고로 인하여 해도로 유배되었으며, 김안로의 패망과 동시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이후 성균관 추천으로 재랑이 되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단양을 찾는다. 이지번이 단양땅에 든 계기가 있으니 아들 산해다. 산해를 윤원형이 사위로 삼으려 했던 것이었는데, 이에 퇴계선생의 권유로 1556년 모든 벼슬을 버리고 단양의 구담에 은거하며 살게 된 것이다.
이 때 동생 이지함도 함께 내려와 옥순봉에 자리를 두어 서로 왕래하며 의좋은 형제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벼슬을 버린 이지번은 열심히 학문에 매진하며 단촐한 생활을 즐기게 되는데, 스스로의 생활에 만족하며 살게 되니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신선과 같다하여 구선(龜仙)이라 부르게 된 연유다. 또한 어려서 부모를 여윈 동생 토정 이지함은 형인 이지번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는데, 당시 구담 인근에는 명당자리가 많다며 가족의 무덤을 단양으로 이장 하게 되니, 훗날 아들 이산해가 영의정에 오르게 되면서 명당 단양이라 하겠다. 동생 토정은 이이와 가까웠으며, 구옹은 퇴계 이황선생과 가까이 지내게 되는데, 퇴계선생의 권유로 청풍현감에 제수 되어 백의재상의 면모를 보이며 잘 다스리게 된다.
이는 결국 같은 물길에 자리한 단양팔경 제4경이 옥순봉이 단양이 아닌 제천에 속해 있었지만 단양팔경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기생 두향의 청으로 퇴계선생이 청풍현감이던 이지번에게 허락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제4경 옥순봉
제4경, 옥순봉(玉筍峯),
옥순봉의 정확한 소재지는 제천시다. 절경을 간직한 아름다움은 어디서에도 숨길 수 없는 법,. 단양팔경 제4경에 속하지만, 제천팔경 제7경으로 꼽히는 곳이 옥순봉이다. 희고 푸른빛을 띤 바위들이 힘차게 솟아올라 마치 대나무 순과 같은 모습으로 천 여척을 쌓으니 이는 절개있는 선비의 지조를 보인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단양팔경의 제4경으로 조선 명종때,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선생이 암벽에 단구동문(丹口洞門)이라 암각하며 단양의 관문이자 제천과의 군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곳이며, 아름다운 풍경은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한다. 주변으로 강선대와 이기대가 마주하여 자리하고 있는데, 강선대는 높이 15m의 층대위에 자리하며 그 위에는 100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공간이 자리하여 당시 관기이던 기생 두향이 퇴계를 그리워하던 곳으로 끝내 그 자리에 묻혔으니, 강선대는 옥순봉이 훤히 보이는 자리로 퇴계선생을 향한 애절한 사랑과 옥순봉의 절경이 어우러지며 더 서글픈 두향의 마음을 나타낸 곳이다.
퇴계선생의 매화 사랑은 고고하다. 퇴계선생의 매화사랑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듯이 매화를 노래한 시(詩)만도 백수가 넘는다. 이렇게 끔직한 사랑을 준 매화, 그 처음에는 단양 기생 두향(杜香)이 있었다. 퇴계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이 그의 나이 48세때이며, 당시 두향은 18세였다. 부임한 첫날부터 두향은 대쪽 같은 모습의 퇴계선생을 보고 한눈에 반했으나, 선생의 처신이 흐트러지지 않아 두향은 가슴만을 졸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당시 선생은 부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이었으니 그 빈 가슴이 결코 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애간장만 끓이던 선생은 부임 9개월만에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기게 되자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었다.
단양을 떠나는 마지막 밤, 끝내 퇴계는 두향과 함께 시를 노래하며 "내일이면 떠나니, 다만, 기약이 없음이 두려울 뿐이구나"라고 하자, 두향은 시 한수를 써 내려 간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 때,
어느덧 술 다하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그리고 다음날,
퇴계선생이 떠날 때 두향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을 전하니, 이러한 연유로 선생은 평생을 매화를 가까이 두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퇴계선생이 떠난 뒤 두향은 관기에서 빠져 나와 남한강가의 강선대에 움막을 치고 선생을 그리워하며 살게 된다. 퇴계선생은 이후, 부제학과 공조판서, 예조판서등을 역임하였고 말년에는 안동에 머물다가 1570년 퇴계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 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을 걸어 안동에 이르렀으나, 정작 본인의 신분에 앞에 나서면 선생에 누가 될까 먼발치에서 선생의 모습을 보고 소리죽여 통곡하였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 온 두향, 영원한 이별을 끝내 참지 못하고 남한강에 몸을 던지며, "나 죽으면 이곳(강선대)에 묻어주오"라는 소원대로 그 자리에 묻어 장사를 지냈고, 이 후 기녀들은 이곳을 찾게 되면 반드시 술 한잔을 그녀의 무덤에 올렸다. 당시의 무덤은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사라질 뻔 했으나, 1984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여 해마다 두향을 넋을 위로하는 두향제를 올리고 있다. 퇴계선생이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한 한마디 "매화에 물을 주어라" 라는 말이 유독 가슴 아프게 들린다.
제5경 사인암
제5경은 ‘사인암(舍人巖)’이다. 남조천(운계천)을 따라 절경이 펼쳐지게 되는데, 이를 ‘운선구곡(雲仙九曲)’이라한다. 구비구비 계곡의 지류를 다라 흘러드는 주위의 명경으로 대은담, 황정동, 수운정, 연단굴, 사선대, 도화담, 운선동으로 단양팔경에는 들지 않으나, 이 역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들로 운계천을 따라 펼쳐지는 기암의 풍광이다. 단양출신의 고려 말 대학자 영동 우탁선생이 정4품 사인(舍人)에 재직시 머물렀다 하여 선생의 벼슬을 따서 사인암으로 불린다. 고로 따지고 보면 팔경 중 가장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셈이다.
벼슬만 높은 것이 아닌 실제의 모습도 가장 멋지고 화려하다. 두부를 켜켜히 쌓은 모습이거나 떡을 쌓아 올린 모습으로 사인암의 매력은 난도질당한 바위와 같은 형상으로 하늘을 향해 선 벼락 맞은 바위와 같다. 심오한 아름다움, 난해하지만 눈으로 만나는 사인암의 모습은 그리도 멋스럽다. 단원선생은 사인암을 그리려 하였으나, 사인암의 풍경에 넋을 놓고는 그 자리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고, 1년이나 지난 후에나 '사인암도'를 완성 시켰다. 결국 상상화로 그려 낸 작품이지만, 이 또한 사인암의 치명적인 매력이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인공적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이 빗어낸 아름다움이 깃든다. 단원선생 마저도 직접 보며 화폭에 담지 못하고 훗날 상상으로 그려낼 정도의 상서로움을 간직한 곳으로, 여행자 개인적으로도 단양팔경 중 가장 으뜸으로 꼽는 사인암이다.
제6경 하선암
제6, 7, 8경은 ‘삼선구곡(三仙九曲)’이라 불리는 계곡에 자리한다.
계곡을 휘도는 물길을 살짝 비켜내어 3단으로 이루어진 횐바위가 너른 마당을 만들었고, 밋밋한 너럭바위위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버티고 서니, 이곳이 제6경 ‘하선암(下仙岩)’이다. 백여명의 사람이 너끈히 올라설 수 있는 마당바위 위에 육중한 돌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서니 미륵과 같다하여 ‘부처바위’로 불리는 하선암이다. 또한, 거울과 같은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물속에 비친 바위의 모습이 무지개와 같다 하여 ‘홍암(泓岩)’으로도 불린다. 곁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삼선계곡에서 가장 크게 들리는 곳으로 바람과 함께 하면서 그 시원함이 최고조에 이른다.
제7경 중선암
삼선구곡의 중심이 되어 굴곡 심한 계곡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유독 많은 바위들이 정신없이 널려진 제7경 ‘중선암(中仙岩)’이다. 조선 효종대의 문신, 곡운 김수증선생이 이름 지은곳으로 삼선구곡의 중심이 된다. 특히, 순백의 빛을 가진 두 개의 바위가 있으니, ‘옥염대’와 명경대‘다. 중선암의 옥염대 암벽에는 ‘사군강산 삼선수석(四郡江山 三仙水石)’이라는 대문짝만하게 각자 되어 있는데, ‘중부내륙의 4곳의 지방 중에서 삼선계곡이 으뜸이며, 그 중 중선암의 바위가 으뜸이다’라는 뜻이다. 조선 숙종때 관찰사 융현주의 작품으로 알려 있다. 주위로는 이 글씨를 시작으로 300명이 넘는 이들이 바위마다 제 이름을 새겨 놓은 곳이다. 수많은 바위들의 어느 틈부터 거센 물줄기 휘도는 큰 바위까지 정신 사납게 새겨진 이름들... 딱! 그만큼만, 아름답다는 뜻 일게다.
제8경 상선암
끝으로 그러한 모습에 지쳐 갈 즈음이면 나타나는 제8경, ‘상선암(上仙岩)’이다. 조선 숙종대의 문신 수암 권상하가 이름 짓고 ‘신선과 놀던 학은 간곳이 없고, 학과 같은 맑은 영혼이 와 닿는곳’이라며 초가를 짓고 무욕의 삶을 즐겼다고 한다. 아치형 다리와 서로 기대어 선 듯 한 육중한 바위들이 모습이 한가한 계곡이다. 그만큼 깊은 소와 맑음을 자랑한다. 지금까지의 풍경이 정신 사나운 돌들의 향연이었다면, 상선암은 가장 폭 좁은 골을 유지하며 정갈한 바위 빛을 자랑하는 곳이다. 팔경 중 가장 한가한 곳으로 가장 좁으면서도 가장 깊은 소를 자랑한다. 바닥이 훤히 보일정도이나 옥빛에 가려진 물의 깊이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 맑은 물은 흘러 중후한 소리를 내며 바람 소리 조차도 잠시 쉬어 가는 듯, 상선암에서는 그 소리마저 잠잠하다. 특히, 비가 내린 후에는 급류로 변하기에 너무 가까이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할 정도로 너럭바위와 큰 바위들의 조화가 멋진 곳이다.
아름다움과 멋에 취한 선인들의 마음이 담긴 단양팔경,
중부 내륙지방의 감추어진 멋스러운 바위들과 물의 향연, 이제는 고전여행이 되어 버린 지 오래지만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는 풍경여행의 백미다. 시각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오묘한 표정들을 감춘 단양팔경, 그 속에 담겨진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들과 함께 한다면 더 없이 재미있는 여행길이 된다.
계절의 시간을 무시하고 언제든 단양의 길목에 들어서며 단양팔경으로의 여행이 스스로의 마음을 닦아내어 시원스럽게 만들어 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한 팔경의 또 다른 모습들은 그 어느 때고, 언제든지 찾아도 흐뭇한 일이다./글-사진제공=박성환 여행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