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일식당(술도가)
어느새 창을 열고 가슴으로 받아도 좋을 만큼 시원해졌다. 자연의 시간은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조용히 다가왔다. 아직은 이른 서투른 늦가을이지만 코끝의 바람 향과 맑게 비추어지는 바다의 일렁거림은 이내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그토록 무뎌진 몸속에 꼭꼭 숨겨두기만 했던 것들은 이제 하나씩 꺼풀을 벗는다. 계절은 시간에 맞추어 흐르고 자연은 그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느긋하게 만든다. 자연이 만들어 주는 시간과 계절의 오묘한 시간의 조합은 작은 땅 벌교에도 찾아왔다.
전라남도, 그곳에서도 남해바다를 따르다가 제석산의 끄트머리가 순천과 보성을 나누며 늘어지게 서 있는 곳, 그 앞이 벌교다. 그리 크지도 않은 이 땅에 거대한 소설 하나가 묻혀 있다.
조정래 장편소설 ‘태백산맥’, 4년여의 자료조사와 6년간의 집필기간에 16,500매에 이르는 집필원고의 소설은 1983년 9월호 월간지 ‘현대문학’에 처음으로 연재가 된다. 작가는 소설 속에 파 묻혀 살며 1986년 제1부, 전3권을 출간하였고, 이듬해 제2부, 전2권, 그 다음해에 제3부, 전3권을 그리고 1989년 제4부, 전3권을 출간함으로서 총4부작 전10권의 대하소설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趙廷來, 1943~ )’가 태어난 곳은 전남 승주군, 지금의 순천군 선암사(仙岩寺)다. 어린 시절을 벌교에서 보내고 광주 서중, 서울 보성고를 거쳐 동국대학교를 다니면서 지금의 부인 ‘김초혜(金初蕙, 1943~)’시인과 만나 평생가약을 맺었다.
작가는 어린 시절 벌교에서 자라며 듣고, 보고, 느낀 것을 소설로 써 내려갔다. 사실상 소설 태백산맥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넌픽션(Nonficton)이다. 작가 자신의 경험담과 함께 이전세대의 아픔을 들었고, 후유증을 보았으며, 그러함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 소설의 줄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소설의 내용은 다분히 이념 대립의 모습을 보인다.
김범우의 집
그러한 이유로 1994년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양자 이인수씨와 자유총연맹등의 반공단체들은 ‘이적성을 내포한 소설’로 규정하며 ‘국가 보안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 되었고, 사건은 지지부진 하다가 11년만인 2005년 ‘무혐의‘로 처분 된다.
공교롭게도 1994년은 소설이 임권택 감독에 의하여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하던 때다. 안성기, 김명곤, 김갑수, 오정혜등의 걸출한 배우들이 출연했던 영화 ‘태백산맥’이 개봉되던 때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시대적인 압력에 의해 소설과는 달리 많은 부분이 잘려 나간다.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는 영화의 큰 틀마저 건들게 된다. 흔치 않았던 러닝 타임 2시간 45분여의 장편영화이지만 메시지 전달에만 주력 하였을 뿐, ‘태백산맥’속에 흐르고 있는 자체의 큰 틀은 제시조차 하지 못한 그저 그런 드라마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가장 추천하고 싶은 도서’, ‘20세기 한국의 베스트셀러’, ‘21세기에 남을 10대 작품’등 80~90년대 어지간한 분야에서 모두 1위를 휩쓸어버리는 기염을 토해낸다. 이 후 소설 ‘태백산맥’은 승승장구하며 200쇄를 넘어서고 700만부 이상을 팔아치웠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실제 여행자는 소설을 읽지 않았다. 영화가 개봉할 당시 영화로 먼저 만났다. 구태여 소설을 읽어 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내용이 다분히 빨치산 위주로 돌아가는 형식의 반감이라고 할까? 당시 반공방첩의 교육을 받고 자란 여행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도 파격적인 주제의 영화였다. 3시간이 되지 않는 영화가 이럴진대, 그렇다면 전10권의 방대한 책 내용은 오죽할까 싶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다시 만나 보았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모르겠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염상진)
“사람을 수단으로 삼고 사람간의 증오에 토대를 하고 있는 한, 그 어떠한 사상도 사람들을 구할 수 없다.” (김범우)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대사다.
남도여관
소설 ‘태백산맥’은 1948년 1월에 일어난 여순사건을 앞 둔 시점으로 너무도 일상적인 고요속의 풍전등화와도 같은 풍경의 ‘벌교’에서 시작하여, 1953년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가는 늦가을, 5년간 악몽의 태풍이 할퀴고 풍경의 ‘벌교’에서 끝난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만주, 서울, 부산까지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나, 영화 속에서는 시종일관 벌교에서 시작하여 벌교에서 끝이 난다.
# 270명에 이르는 방대한 등장인물들의 삶이 엉킨 공간, 벌교.
그동안 벌교는 변했다. 많이도 아닌 작은 변화, 예전의 건물과 새로운 건물이 뒤엉켜 읍내를 형성하고, 가장 빠르고 새로움을 더하는 벌교역이 깔끔 떨며 자리에 서있다. 소설 속, 영화 속에서 이미 사라진 풍경이 있으며, 존재만이 남아 있는 풍경이 있으며, 아예 소설 속의 무대로 들어가 더 가까운 채비를 마친 자리도 있다.
일제가 식민지화의 기틀을 만들고자 시작한 토지조사는 그 틀 속에서 농민들의 땅을 약탈하여 대부분의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또한 그 소작농들의 대부분이 가난으로 굶주리게 된다. 그런 와중에 친일파들은 일본에게 협조하면서 자신들만의 부를 쌓아가게 된다. 그리고 해방, 북쪽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을 두었으나, 남쪽에서는 (친일파)지주들의 반발로 농지개혁 자체가 진행이 되지 않는다. 친일청산에 의도적으로 실패한 정부로 인하여 지주와 소작농들의 갈등이 이어지고, 그 갈등의 사이를 좌익이 파고들게 된다.
이로서 사상이나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농민들은 좌익에 동조를 하게 만든다. 논 대신 산을 택하였고, 쟁기 대신 총을 들게 된다. 그리하여 먹고 살고자 하는 단순한 농민들은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순수하고 소탈한 사람들의 삶이 일순간 전쟁터로 바뀌는 순간인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를 간직한 남도 땅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알토란과도 같은 ‘벌교‘가 ’태백산맥‘의 주 무대인 이유다.
이렇게 영화 ‘태백산맥’을 만난 지 20년, 여행자는 벌교를 찾았다. 소설의 주 무대이자, 영화의 주 무대이다. 벌교를 여행하며 소설속의 길을 걷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념의 갈등 속에서 죽어 간 땅, 낮에는 국군의 땅, 밤에는 빨치산의 땅, 하루해가 지나면 나도 모르게 빨갱이가 되었고, 다음날이면 주검이 되었다. 좌파와 우파, 흑과 백의 논리만이 서슬 퍼렇던 시간, 지금은 한 없이 평화롭고 조용하기만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차분함이 넘치는 벌교다.
벌교 꼬막집
이제는 천천히 걸으며 소설속의 무대를 찾아가 본다.
태백산백문학관 > 현부자집 > 소화네집 > 부용교(소화다리) > 김범우의 집 >
홍교(획갯다리) > 용연사(M1고지) > 농민상담소(옛 금융조합) > 남도여관 > 국일식당(옛 술도가) > 대창기계 > 벌교역 > 중도방죽 > 벌교 꼬막집
>>‘태백산맥문학관’
2008년 11월에 개관한 문학관으로 일명 '태백산맥 문학기행 길'의 시작이 되는 곳이다. 작가 조정래부터 태백산맥이 완성 되까지의 과정 등을 상세하게 안내하고, 당시의 벌교, 인근의 상황등도 함께 기획, 전시하고 있다.
>>‘현부자집’
「그 자리는 더 이를 데 없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 (태백산맥 1권 14쪽)」
소설에서는 현부자네 집으로 묘사되었다.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집과 뒤로 제각이 자리한다.
>>‘소화의 집’
「조그만 하고 예쁜 기와집. 방 셋에 부엌 하나인 집의 구조로 부엌과 붙은 방은 안방이고, 그 옆방은 신을 모시는 신당이다. 부엌에서 꺾여 붙인 것은 헛간 방이다. (태백산맥 1권 17쪽)」
소설에 나오는 무당 소화네 집으로, 당시의 무당집은 실제로 제각으로 들어서는 울안의 앞터에 있었다. 집 둘레로는 낮춤한 토담이 둘러져 있고, 뒤로는 풍성한 대나무 숲이 집을 보듬고 있다.
벌교 전경
>>‘소화다리(부용교芙蓉橋)’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사람쥑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태백산맥 1권 66쪽)」
1931년 6월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써 원래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였던 그때가 소화 6년이기도 해서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소화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지금은 소화다리라고 부른다. 이 다리는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시작해서 625의 대 격랑이 요동치면서 남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양쪽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총살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소설에서는 포구의 갈대밭에 마구 버려진 시체들을 찾아가는 장면의 묘사 등으로 그때의 처참상을 상상하면 다리가 달리 보일 것이다.
>>‘김범우의 집’
「과분한 땅이라고? 이 사람아, 요 정도가 내가 지닌 땅 중에서 젤로 나쁜 것이네. 눈 붉은 우리 선대의 유산이 어련 허겄는가. 맘 쓰지 말고 밭 일구도록 허게. 허허허허...... (태백산맥 1권 141쪽)」
원래 대지주였던 김 씨 집안 소유의 집이다. 안채의 대문 옆에 딸린 아래채 에서 초등학생이었던 작가가 친구인 이 집 막내아들과 자주 놀았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품격 있고 양심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그려지고 있다. 현재는 관리의 부재인지 훼손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안쪽으로는 지금도 실제 거주하는 분이 계신다.
벌교금융조합
>>‘횡갯다리(홍교)’
「김범우는 홍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니까 낙안 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징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 끝가지에 붙어있는 하나씩의 잎사귀인 셈이었다. (태백산맥 1권 257쪽)」
홍교는 벌교 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교량으로 세 칸의 무지개형 돌다리이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서기 1728(영조4년)에 선암사의 초안선사의 보시로 홍교를 건립했다.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벌교(筏橋 : 뗏목으로 잇달아 놓은 다리)라는 지명은 다름 아닌 ‘뗏목다리’로서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보통명사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어 지명이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뗏목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 홍교는 벌교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도 이 근원을 여러 각도로 비추어내고,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그 구체성을 은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용연사(M1고지)’
소설 속에서는 책방 주인이자 첩자인 문기수가 야산대장 염상진의 ‘최후의 명령’을 접수하기 위해 불공드리는 신도로 위장하고 용연사로 향하는 대목이 그려지고 있다. 저 멀리 고읍들 끝의 금전산에서부터 이어지는 야산줄기는 부용산에서 끝나는데, 그 긴 산줄기와 야산대들이 암약하기 좋은 루트가 되었다.
벌교역
용연사는 1910년 무렵에 개창되었다. 그 이전에 부용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누이동생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만들어진 슬프고 서러운 노래 「부용산」을 탄생시킨 부용산은 벌교 시가지와 가장 가까운 산으로 그 끝자락이 시가지에 닿아 있다. 그 산의 칠부 능선쯤에 자리잡은 용연사에서 바라보는 동쪽 먼 포구의 풍광은 일품이다.
>>‘금융조합’
「금융조합이라는 것이 결국은 돈 장사이고 보면 그의 이재(理財)솜씨는 멋 부리는 것 보다 한 수가 더 앞질러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태백산맥 1권 284쪽)」
소설 속 송기묵은 돈을 다루는 사람답게 치부에도 능해 은밀하게 고리대금업까지 해가며 탄탄한 재력을 확보해 딸을 서울의 이화여대에까지 유학시키지만 결국 좌익들에게 죽고 만다.
벌교금융조합은 붉은 벽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돌을 깎아 박아 건물의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이 관공서형 건물로 즐겨 지었던 그 모습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지난 역사를 반추하게 해주고 있다. 그 위치 또한 번화가의 첫머리인 삼거리에 자리 잡아 고객들의 편리를 최대로 도모한 세심함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는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해온 이력을 지닌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가 척결되지 못한 이 땅의 비극이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그런 식으로 기득권을 행사했음을 작가는 여러 주인공들을 통해 일깨우고 있다.
소화다리(부용교)
>>‘남도여관’
「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 (태백산맥 3권 85쪽)」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에도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때의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었다. 소설에서는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한동안 숙소로 사용 한다
역사는 문자의 기록만이 아니다. 유물을 보았을 때 설명이 필요 없이 지난 시대를 한순간에 실감하게 된다. 수난과 고통의 역사일수록 그 시대의 유물은 남겨지고 보호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검은 판자벽에 함석지붕,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지어진 이 2층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 중심거리로 소위 본정통이라고 불렸던 이 길에 이 건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재는 벌교를 찾는 사람들에게 숙박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용연사(M1고지)
>>‘국일식당(술도가)’
소설에서 정현동의 술도가로 묘사된 곳이다. 실제로 이곳에는 삼성주조장이라는 술도가가 있었으나 소설 속의 묘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촌부자, 술도가 하고 정미소 빼면 없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50~60년대의 사회현실이기도 했다.
작가는 그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정현동이라는 현실주의적인 인간상을 창조하는 한편 그와 대비시켜 그의 아들 정하섭을 배치함으로써 이념의 차이가 부자간에 어떻게 작용하며, 그것이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섬세하게 그려내 인간의 삶의 다층성과 애증의 복잡성을 실감 있게 느끼게 해준다.
정현동이 술도가를 손에 넣게 되는 과정에서부터 그가 논에 바닷물을 채우다가 죽게 되기까지 가지가지 삶의 행태에서는 필연적인 역사성과 사회성의 고리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내용이 이 소설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방법일수도 있다.
>>‘벌교역’
소설에서 벌교역은 여러 가지 행사와 사건들이 벌어진다. 국회의원 최익달을 전송하는 유지들의 도열, 후임 계엄사령관 백남식의 떠들썩하고 허풍스런 부임, 손승호가 이끄는 데모대의 항의 시위, 양효석의 금의환향,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 이란 큼직한 글씨와 함께 그의 목을 역의 앞마당에 사흘간이나 내걸었던 일, 그리고 염상구가 삐딱하게 틀어 돌린 어깨를 흔들며 건들대는 모습 등이 소속에 비친 벌교역의 모습이다.
일본식의 소규모 역들이 으레 그렇듯 벌교역도 스무평 남짓한 대합실과 그만한 넓이의 사무실이 갖추어진 아담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건물의 노후로 1987년에 지금의 새 역사가 건립되었다. 벌교역은 유난히 시가지와 가깝고 시외버스 차부까지 인접해 있는데다 널찍한 마당까지 갖추고 있어서 그 주변은 상가들이 번창한 생활의 중심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중도방죽
>>중도방죽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 돼지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 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허겄소...... 하여튼지 간에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 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恨)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눔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들 속이 워쨌겄소. (태백산맥 4권 306쪽)」
중도방죽은 일본인 중도(中島, 나카시마)의 이름을 따 붙여진 간척지 방죽의 이름이다. 중도라는 사람은 일제강점기 실존인물로, 철다리 옆에 있는 마을에 살았었다. 작가는 소설에서 간척지의 방죽을 쌓던 때, 그 어렵고 뼈 빠지게 힘들었던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들판을 한스럽게 바라보면서 방 노인이 자신에게 했던 얘기를 되새겨가며 이지숙은 일부러 방죽을 걸어 선수머리까지 갔다가 되짚어 돌아오는 모습을 생각하며 방죽을 거닐어 본다. 모든 것을 감추어 버리듯 사각거리는 억새만이 가득하다. 그 소리는 어쩌면 처절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이제는 더 이상 말 못하는 민초들의 한 맺힌 아우성이었다.
>>벌교 꼬막집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누그러지는 시간까지 벌교의 꼬막 집 들은 일손이 바쁘다. 제철 맞은 꼬막들이 살이 올라 제 맛을 자랑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행자가 찾은 꼬막 집은 방송과 신문에 이름을 알려 유명한 꼬막집이 아니다. 그마저도 옛 자리는 ‘벌교홍보관’에 밀려 한동안 시비를 가리느라 쉬다가 몇 해 전 다시 문을 연 집 ‘웰빙식당(옛 대운식당)’이다. 삶은 꼬막부터 꼬막을 이용한 꼬막 전에 이어 꼬막 조림, 그리고 이내 이 식당의 맛, 꼬막 회 무침이다. 칼칼한 회 무침에 밥 한 공기 넣어 슥슥 비벼 한술 크게 떠 입에 넣으면 소설 속 길을 따르느라 고생한 몸뚱이는 어느새 행복으로 변한다.
현부자집
소설의 자체적인 요소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설의 유명세가 주는 대한민국의 불신, 부정적인 생각의 부채질에는 걱정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객관적인 판단이기보다는 사실이 주는 효과에 의하여 소설은 소설이 아닌 사실로 받아 들여 진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무엇이든 부정적인 눈길로 시작하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라면 더욱 걱정이 되는 이유다.
소설속의 그 내용처럼 빨치산은 자신들의 투쟁에 대한 정당성을 내세우면서 그에 따르는 살인 등의 사실을 인민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사실처럼 꾸민 반면에 대한민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이들에 대해서는 친일파 내지는 돈을 벌기 위한 비인간적인 군상으로 꾸며 놓는다.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만약 사실이라면 현실과 교차되면서 내 나라 내 땅이 꼴 보기 싫어지기만 할 뿐이다.
현실조차 답답한 대한민국, 무엇을 상상하든 상식 그 이하를 보여주는 작금의 현실, 무능한 대통령과 비선실세와 각종 비리에 얽힌 추악한 돈 잔치, 민초들은 평생 꿈도 못 꿀 엄청난 금액의 비자금과 권력, 이에 대항한 국민들의 거대한 촛불, 민심. 그러기에 여행자는 지금도 소설 ‘태백산맥’을 읽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의 정치판에 대한 실망은 지금으로도 충분히 남고도 남아돌 지경이다.
그러나 여행자로서 찾은 ‘벌교’는 여행지로서 손색이 없다. 옛길, 옛산, 옛집과 시간이 멈춘 읍내의 풍경이 오버랩 되는 공간이다. 느릿한 걸음이 어울리는 벌교여행, 답답함을 풀어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떠나도 좋은 곳이다./글-사진제공=박성환 여행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