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뉴스프리존=심종대 기자]셰익스피어는 1564년 잉글랜드 중부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출생했다. 정확한 출생일은 알려지지 않고 있고, 4월 26일은 그가 유아세례를 받은 날로, 최초의 기록이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 영국의 전형적인 소읍으로,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읍장까지 지낸 유지로,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는 훌륭한 초.중급학교가 있어서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기본적 고전교육을 받았고, 뒤에 그에게 필요했던 고전 소양도 이때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1577년경부터 가운(家運)이 기울어져 학업을 중단했고 집안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런던으로 나온 시기는 확실치가 않지만, 다만 1580년대 후반일 것으로 생각된다. 상경의 동기가 극단과 어떤 관계였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1592년에는 이미 그가 유수한 극작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선배 극작가인 R.그린의 질투어린 비판을 통해 알 수 있다.
1590년을 전후한 시대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에서 국운이 융성한 때로 문화면에서도 고도의 창조적 잠재력이 요구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배경을 얻어 그의 천분은 더욱 빛날 수 있었다.당시의 연극은 중세 이래의 민중적.토착적 전통이 고도로 세련됐다. 특히 그리스.로마의 고전(古典)을 소생시킨 르네상스 문화의 유입(流入)을 맞아 새로운 민족적 형식과 내용의 드라마를 창출해 내려는 때이기도 했다.
그러나 1592∼1594년 2년간에 걸친 페스트 창궐로 인해 극장 등이 폐쇄됐고, 때를 같이해 런던 극단도 전면적으로 개편됐다. 이때부터 신진극작가인 셰익스피어는 당시의 극계를 양분(兩分)하는 세력의 하나였던 궁내부장관(宮內府長官) 극단(당시는 유력자를 명목상의 후원자로 하여 그 명칭을 극단에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의 간부 단원이 되었고, 그 극단을 위해 작품을 쓰는 전속 극작가가 됐다. 그는 이 극단에서 조연급(助演級) 배우로서도 활동했으나 극작에 더 주력했다. 이 기간을 전후해서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과시해 《비너스와 아도니스 Venus and Adonis》(1593)와 《루크리스 Lucrece》(1594) 등 두 편의 장시(長詩)를 발표하기도 했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의 활동기는 1590∼1613년까지로, 이 기간에 그는 모두 37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초기에는 습작적 경향이 보였고, 영국사기(英國史記)를 중심으로 한 역사극에 집중하던 시기, 그것과 중복되지만 낭만희극을 쓰던 시기, 그리고 일부의 대표작들이 발표된 비극의 시기, 만년에 가서는 화해(和解)의 경지를 보여주는 이른바 로맨스극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599년 템스강(江) 남쪽에 글로브극장(The Globe)을 신축하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의 허락을 받아 극단명을 ‘임금님 극단(King’s Men)‘으로 개칭했다. 하지만 런 명칭은 당시의 관례였을 뿐 상업적인 성격을 띤 일반 극단과 차이가 없었다. 1613년 그의 마지막 작품인 《헨리 8세》를 상연하는 도중 글로브극장이 화재로 소실됐다. 1616년 4월 23일 52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사망했다. 이번에는 아시아의 셰익스피어의 수용사에서 번안과정을 살펴보자.
아시아의 셰익스피어 수용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수용초기에 번안과정을 거친 점이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원전 번역을 구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원전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셰익스피어 작품이 내포한 언어, 풍습, 사상, 윤리가 아시아인에게 이질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터키에서는 처음 셰익스피어 희곡의 간단한 줄거리를 바탕을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공연하던 19세기 중반부터 종교적, 윤리적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간주되는 작품을 배제하거나 특별한 장면과 행위를 삭제했다. 실례로 ‘베니스의 상인’은 유태인 등 서아시아인을 차별과 조롱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공연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인도에서의 번안은 내용상 종교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에 행해졌고, 양식적으로는 대사만으로 된 셰익스피어 공연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을 위해 산스크리트 연극이나 자트라, 카타칼리, 약사가나 등 지방극 형태로 개편돼 노래와 춤이 대량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태국에서는 왕과 왕족이 선도적 입장에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셰익스피어 희곡들을 번안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이것을 번안하는 과정을 통해 전통적 무용극과 서사적 공연을 개혁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에 바지라부드 왕이 번안한 ‘오셀로’는 원전을 바탕으로 처음에 무용극 형태로 번안한 것이 이후에 다시 서사극 형태로 번안하는 과정을 거쳤다. 특히 데스데모나가 오셀로에 의해 살해되는 장면은 궁중의 규범에 어긋난다고 해서 삭제됐다.
일본에서는 스보우치 소요의 문예협회에 의해 원전 공연이 행해지기 이전에 가부키와 신파극에서 번안을 거쳐 셰익스피어를 공연했다. 일본 최초의 셰익스피어 공연이라고 하는 ‘하앵피앵전세중’은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에서 취재한 ‘베니스의 상인’을 번안한 것으로 시대와 배경을 막부 말기의 부유한 농민집안으로 개편하고 있다. 번안자는 “취향은 셰익스피어이지만 문장은 일본식”이라고 밝히고 있다.
중국에서도 1930년 상해희극협사에 의해 원전 공연이 행해지기 이전까지 문명희 극단이 임서(林)와 위이(魏易)가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문어체로 개편해 번역한 것을 사용하여 신파극 형태로 공연했다.
문명회는 막표(幕表)라는 간단한 내용의 줄거리를 바탕으로 즉흥적으로 연기하면서 제목은 물론, 내용과 상황도 임의적으로 변경했다. 제목 중에는 원작이 아닌 내용에서 가져온 것이 많다. 이를 테면 ‘육권(肉券, 베니스의 상인)’, ‘주정(鑄情, 로미와 줄리엣)’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때로는 1916년 ‘찬위탈수(簒位奪嫂, 맥베스)’ 공연처럼 원세계의 부귀영달을 고발하기 위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번안한 경우도 있다./다음호에 계속
심종대 기자, simjd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