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배우. 세종대 교수)
-지난호에 이어
4.배우 이순재의 삶의 철학 – 인간이 왜 사는가?
선생님은 늘 바쁘시다. 어느 날 선생님의 수첩을 들여다보면 빼곡히 적혀 있는 일정들을 보며 젊은 사람들도 소화하기 힘든 스케줄에 혀를 내두른다. 그 일정의 대부분은 대부분 연기를 하거나 가르치고 또는 공연, 영화를 관람하거나 제자나 후배의 애경사에 참가하는 스케줄이다. 모든 일정이 자신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창작하고 동료, 후학들과 함께 하고자하는 시간들이다.
배우가 직업이니 연습을 하거나 공연과 촬영을 하고 교육자를 겸하고 있으니 학생들과 수업을 하거나 학생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은 당여하다 하겠지만 동료, 후배들의 공연을 꼭 챙겨보고 그들의 애경사도 가능한 빠지지 않고 챙기는 선생님의 행보는 과히 경이롭다 할 수있다. 어쩌면 이 많은 일정 속에 선생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은 단 한가지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선생님은 그 많은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했고 이제 이것을 어떻게 남겨야 하는지....’ 선생님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한 열정의 소산이 아닐까?
필자는 가끔 후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인간이 왜 사는가?’ 흔한 명언처럼 청출어람의 논리만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막심 고리끼의 <밑바닥에서>를 보면 4막의 싸친 대사 중 이런 말이 나온다. 극중 주인공인 싸친은 자신이 관리하고 사랑하는 창녀 나스쨔와 한바탕 싸움을 벌인 남작에게 이런 조언을 한다. “인간이 왜 사는 줄 아니?.... 자신 보다 더 나은 인간을 만들기 위해 사는 거야. 인간? 아주 큰 거야. 이만한 거야.....” 이 말을 들은 남작은 자신의 행패에 집밖으로 도망나간 창녀 나스쨔를 다시 찾으러 나가는 것이 이 장면이 상황이다. 물론 필자 또한 예전에는 나 자신이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나보다 능력과 활동면에서 더 뛰어나면 인간이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이 되는 줄 이해했다.
2010SBS드라마대물/사진제공=배우 이순재 연기인생 6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
그래서 부모는 자식 교육을 잘해야 하는 것으로 표피적인 이해에 그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어느덧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필자는 막심 고리끼의 ‘인간이 왜 사는 줄 아니?’에 대한 답이 일차적인 혈족 보호본능에 그치는 않음을 깨닫는다. 필자 또한 연기교육과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다. 이때 오늘을 살아가는 현재의 나의 삶을 나의 아들이 딸이 알까? 내가 오늘 창작과 교육의 현장에서 어떠한 고민을 했고 어떠한 선택과 결정을 했는지 나의 친 2세들이 알까? 나의 큰 아이는 어느 덧 대학2학년이 되었고 둘째는 야구선수로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
초등학생인 딸은 아직 어림을 이유로 접어두고라도 나의 두 아들이 나의 전공분야의 삶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아들들은 필자를 그저 아버지의 관계로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전문분야의 선배와 동료의 삶에 대해 더 잘 알고 어느 경우 선의의 경쟁을 하기 위하여 연구하고 분석하고 바로미터로 삼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와 친2세의 관계와 서먹하거나 등한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아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지금 현재의 필자의 예술적 고민과 결정, 그리고 어떻게 예술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는 누가 알것인가? 바로 나의 동료와 후배, 그리고 나의 후학들인 것이다. 그들이 나의 지나온 예술적 삶을, 오늘 공연을 위한 나의 고민을 곁에서 지켜보며 잘 알고 있고 때에 따라 그것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평가 또한 하는 것이다. 이제 막심 고리끼의 질문에 대한 구체적 담론이 유추될 수 있다.
인간이, 곧 내가 사는 이유는 나보다 연극을 더 잘 할 수 있는 후학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나 개인이 그러한 후학 둘을 만든다면 100년 후에 한국연극은 종사자가 두 배가 될 것이며 나보다 더 나은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기에 한국연극은 지금보다 눈부시게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들이 미래에 현재의 내가 어떻게 연극현장과 교육에서 살아왔는지 기억해 줄것이고 평가를 통해 지금의 나의 행보를 기록하고 남겨 줄 것이다.
지금의 나의 삶은 그들의 미래를 위한 방향등 인 것이다. 인류의 현대 사회에 있어 이러한 원리는 연극계뿐만이 아닐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러한 원리이며 그래서 종사자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그 분야는 인류의 곁에서 소멸되고 또 어떠한 분야는 더욱 발전을 거듭해 나가는 것이다. 더욱 광역적인 측면에서 인류의 진보는 그러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국연극의 진보는 오늘의 나의 거시적 책무와 이를 실천하는 열정에 있는 것이다.
2010년영화 그대를사랑합니다/사진제공=배우 이순재 연기인생 6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
이순재 선생님은 이를 알고 계신듯하다. 아니 필자처럼 구구절절 논리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경륜과 직관으로 이미 자신의 예술적 삶의 끝이 어떻게 되어야하는지를 알고 계신 듯하다. 어느 경우, 선생님 스스로 준비하고 계시는 건 아닌가 하는 순간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흔한 가족여행 한번 안가시고 자신의 여가를 즐기는 시간도 없이 오롯이 창조와 교육작업 그리고 동료, 후학들의 공연관람과 애경사를 챙기는 것으로 자신의 모든 시간을 쓴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은 행보이다.
체력이야 선생님 스스로 관리하시고 타고난 것이라 하지만 그 열정과 애정은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생님은 자신의 끝을 준비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연극연습으로 바쁜 일정 속에 잠시 짬을 내어 후학의 공연장을 찾는 선생님의 발걸음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이 왜 사는가? 나보다 더 나은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이순재 선생님은 그래서 오늘도 경제적 댓가로는 턱없이 부족한 코질질의 초보 학생을 만나 밤을 세우고, 촬영과 연습으로 온몸이 피곤하지만 자신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 후배의 공연장을 기꺼이 찾는다.
애경사에도 참가하여 같이 아파해주고 같이 기뻐해준다. 역사적 사관을 일상의 철학으로 실천하는 배우 이순재. 시대의 흐름과 자신의 역할을 잘 인지하고 있는 배우 이순재. 그래서 지금 작은 사과나무를 심듯 아주 소소한 창조와 교육이라 할지라도 온 정성을 쏟아 있는 수행하는 배우 이순재. 후학의 미래를 자신의 예술적 행보로서 제시해주는 배우 이순재. 이것이 배우 이순재 선생님이 예술적 삶을 살아가는 실존적 철학이다. 필자를 비롯한 우리 현장의 많은 동료, 선배들이 바로 따라가야 할 가장 큰 덕목이 아닐까? 선생님이 지금처럼 계속 건강하셔서 연기 인생 80주년을 기념하는 글을 쓰는 순간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늘 건강하세요.(stanisla@sejong.ac.kr)/끝
김태훈/배우, 세종대교수/주요작품=에쿠우스, 고곤의선물, 비극의 일인자, 내면의악마, 갈매기, 나생문, 죄와벌 등/수상=2004년 제25회 서울연극제 연출상, 2009년 2인극 페스티벌 작품상, 2012년 33회 서울연극제 연기상, 2014년 러시아모스크바예술극장, 연기부분 공로상, 2014년 제15회 김동훈연극상, 2015 대한민국 신한국인상.문화예술부분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