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심종대 기자]배우 이순재는 1953년 10월 12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후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중국 연길로 건너가 역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생계를 꾸렸고, 당시 조부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이순재는 매우 보수적이고 완고한 한학자인 조부모 슬하에서 주로 성장했다. 할머니는 생부를 낳은 분이 아니지만 친조모보다 더 극진한 사랑으로 손자를 아들처럼 돌봐주었다고 한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서울중학교 시절의 은사들과 학교분위기였다. 당시 일본인 학교는 4년제였던 서울중학교와 용산중학교 뿐이었다. 해방 후 김원규 교장 시절의 서울중학교는 최우수학교의 수준을 위해 스파르타식 교육풍토로 운영할 정도로, 김 교장 자신이 바른 교육의 실천자였다.
서울중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서울고등학교에 진학해 좋은 선생님을 많이 만난다. 당시 시인인 조병화 선생은 수학을 가르쳤는데 45분 수업 중 15분은 시낭송 시간으로 그 수업시간이 즐거웠다고 기억한다. 또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안병욱 선생은 영어를 가르쳤고, 그 밖에 소설가 황순원, 김광조 같은 분들이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은 전쟁 통이라 공부하기 무척 힘든 시기여서인지 그의 장래 희망은 정치가였다. 서울대 문리대 정치외교학과에 도전했으나 낙방했다. 다음해인 1953년 문리대 철학과에 합격, 1954년부터 서울대를 다녔다. 대학생활을 하기 전까지 배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때부터 연극 공연을 시작해,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첫 무대를 경험 한 후, 1961년 KBS 개국 첫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로 데뷔했다. 이후 200여 편의 영화에서 다수의 주연을 맡아 젊은 시절 지성적인 외모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지금까지 300편이 넘는 작품에서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늦은 나이인 1966년 결혼했다. 그의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은 연극 무대로, 1964년 한 친구의 부탁으로 명성여고 연극부의 연출을 맡는다. 당시 연극반 학생 중 한 명이 아내(최희정 씨)의 여동생으로, 여동생의 연극 지도를 잘 부탁한다면서 매일 학교에 찾아와 만남이 잦아졌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사랑도 싹트게 됐다. 이후 2년의 교제 끝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에 골인한 이순재는 소란스럽지 않지만 두터운 애정을 과시하는 잉꼬부부로 살고 있다.
그동안 출연한 작품 중 스스로 꼽는 최고의 작품은 1978년 <세일즈맨의 죽음>, 1967년 <막차로 온 손님들>, 1977년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집념>, 1966년 드라마 <내 멋에 산다>, 1991년 <사랑이 뭐길래>, 1999년 드라마 <허준>, 2006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 있다. 특히 <사랑이 뭐길래>는 가족애를 중심으로 하는 명작 중의 명작으로, 대발이 아버지는 가족애와 가족 간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아버지, 자식들을 단속하고 생활에 대한 절제에 대한 지혜를 말하고, 모든 인물의 개성이 각각 살아 있어서 역할을 창조하는데 좋은 작품으로, 시청률 64.9%라는 기록을 세운 바 있다.
배우 생활을 하던 그가 국회의원을 하게 된 것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위치 혹은 이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예술인으로서 문화예술 분야에 공헌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그는 정치를 하는 8년 동안 한 번도 행복을 느낀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건 그의 본업이 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치에 나선 동기도 타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리가 더 쉬웠단다. 이러한 8년간의 외도는 배우 이순재의 연기예술활동에서 더욱 확고한 예술의지를 구축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드라마와 연극무대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에 출연해 배우 개인의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늘 열심히 책을 보고 역사와 문화에 대해 해박한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능수능란하게 설명도 해주어 ‘궁금’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여행지를 누비는 모습에 ‘직진순재’라 불리기도 하고, 잠깐씩 만나는 길고양이 이나 강아지, 새. 호수나 강에 있는 오리들에게도 빵을 나눠주기도 해서 그가 있는 곳에 늘 동물들이 함께 해 ‘숲속의 친구’라는 별명도 얻었다. 각각의 여행지에서 독일어, 영어, 일어까지 구사하면서 상황 상황마다 직접 대화해 나가는 모습에 ‘역시 이순재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2007년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 극 중에서 야동을 밝히는 장면이 방송돼 ‘야동순재’라는 별명을 얻는 등 평소의 위엄 있는 스타일과 달리 파격적인 모습으로 청소년 등 많은 시청자들에게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야동순재’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그해 ‘2007 MBC 연예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확한 발음과 뛰어난 캐릭터 분석력 등은 그의 연기 특징으로, 현역 최고령 배우이자 연기 인생 60년의 현역 최고참 배우로, 후배들이 닮고 싶은 배우이기도 하다. 또한 배우로는 최초로 ‘KBS 명예의전당’에 헌액됐고, 앞서 ‘MBC 명예의전당’에도 헌액됐다.
가장 빛나는 순간은 ‘지금 이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그는 언제나 청춘이다. 한 번도 정상에 서 본 일이 없다고 말하는 그는 아직도 신인의 마음으로 연기하고 있다. 화려하게 시작한 사람도 아니고, 연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순간도 있었지만 돈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이것도 예술이다’라는 생각으로 예술창조를 위한 욕구를 가지고 활동해 왔기 때문에 외부의 어떠한 평가에도 굴하지 않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열혈 청춘 이순재.
바쁘게 활동하는 가운데도 놓치지 않고 늘 해오는 일이 있다. 바로 후학 양성을 위한 일이다. 그는 대학에서 석좌교수를 활동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방송 3사 어디를 봐도 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때에도 대학에서 학생들의 워크숍 공연까지 지도하면서 매일같이 학교를 드나들었다. 매년 학생들과 공연을 할 때 직접 대본을 번역하기도 하는 열정과 연기를 위한 집념과 끈기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이순재의 인생철학과 예술철학은 일명 ‘순재병법’이라고 일컫는 이순재만의 철학이 있다. (1) 手不釋卷(수불석권:손에서 책을 놓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연기는 무엇을 하더라도 공부는 계속해야 한다. 공부는 때가 있다) (2) 自强不息(자강불식:스스로 힘쓰고 쉬지 말라-우리나라에서는 연기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진정한 배우라면 연기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배우인 동시에 평생 배우가 되어야 한다.) (3) 老當益壯(노당익장:나이가 들어도 오히려 젊고 강해져라!-연기는 정년이 없다. 자신만의 분야를 가져야 한다. 긍정적 마음가짐을 갖자.)
이렇게 ‘순재병법’과 같이 이순재는 어느 분야에서건 성실한 배우, 믿을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 평가받아왔다. 그와 함께 일했거나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이순재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약속시간보다 1분이라도 빨리 나오는 배우, 항상 대본을 읽는 배우, 누구보다도 성실한 배우 등등. 실제로 그의 일상도 그 같은 평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렇게 늘 열심히 임하는 그가 말하는 연기에 대한 생각은 “대사만 외운다고 연기가 아니다. 연기는 단면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깊이 있게 발전하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말’이 제일 우선이고 역할 창조를 위한 다각도로 노력해야 한다. 학업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스타라고 해도 배우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그는 언제나 기본기를 갈고 닦아야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은 지금도 늘 양복 포켓에 국어사전을 품고 다니면서 대본을 볼 때 수시로 들추어 본다. 그만큼 기본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만의 확고한 철학이다. 그의 삶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와 실천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실천에 옮겨왔다. 배우 이순재는 대한민국에서 현재 최고령 활동배우 중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배우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자료제공=배우 연기인생 60주년 기념사업회
심종대 기자, simjd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