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박근혜 대통령 탄핵 가결까지 쉼 없이 달려 온 탄핵 열차를 바라보는 외신이나 외국인들은 수백만 명이 결집한 대한민국의 촛불 민심에 놀라고 그들의 질서정연함에 다시 한 번 엄지 척을 치켜세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들은 왕조시대에서 공화정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어떻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체의 교체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이는 세계사에서 흔치 않는 역사이지만 사실은 우리 안의 수치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 한 번도 지배계급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단죄와 심판이 없었던 불행한 역사의 반복은 이제 그만!
또한 이것은 외세에 나라를 팔아먹으며 계급적 지위를 승계한 지배 세력들의 비굴한 역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일제 36년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고, 백성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온갖 치욕과 굴욕, 탄압과 고문, 그리고 죽임을 당했다. 해방 이후에는 새로운 외세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은 세력들과 부역 세력들은 또 다시 단죄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 매판 세력은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했던 수많은 백성들의 피와 죽음을 출세의 발판을 쌓는 데 이용했다.
간략하게 독일의 경우를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전범들뿐만 아니라 부역자들까지 세계 어디에 숨어 있든 찾아내서 단죄를 한다. 이유가 뭐겠는가? 다시는 전범국가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와 미래에는 과거를 교훈으로 다시는 그런 과오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독일 정부의 단호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독일은 망해가는 전범국가에서 새로 태어낫고, 세계적 선진국으로 우뚝 서 있다.
대한민국 역시 근·현대사에서 시민혁명에 준하는 거사 완수의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늘 민초들이 차린 밥상을 서로 먼저 먹겠다고 달려든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소중한 밥상이 엎어졌다. 대표적인 게 87년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의 성과라고 한다면 절차적 민주주의의 획득이었다. 그 후 우리는 최소한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맛보았을 뿐이었다. 이후 30년은 이 땅에서 실질적 민주주의가 도래하지 않는 반쪽 민주주의가 이어져 왔다.
그런데 지금 다시 광장에서 민심이 요동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촛불의 메시지는 이렇다. 첫째, 촛불의 열기와 성과를 다시 특정 정치 세력이 독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낡은 체제(앙시앵 레짐)의 변혁을 외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혁명에 준하는 변혁을 바라고 있다.
셋째, 역사의 죄인들에 대한 확실한 단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는 반복된 실패의 역사나 민주주의의 역행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실질적 민주주의가 정착되길 바라고 있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착될 때라야 완전한 민주주의가 달성되는 것이다. 바로 헬 조선으로부터의 탈출이다.
# 인적 교체가 아닌 ‘제도 개혁’이 먼저다
지금껏 기성의 정치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서둘러 선수 교체를 발표했다. 주로 선거를 앞두고 대대적인 물갈이론을 내세우는 식이었다. 실제로 우리 정치는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선수교체율이 거의 50%에 육박할 정도로 인적 교체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그런 교체가 주로 상대 계파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훌륭한 인재가 정치권에 진출한다고 해도 현재의 시스템을 교체하지 않는 한 그냥 1/N 의원으로 무기력해진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정당 계파의 눈치를 보고 여기에 줄을 선다는 것이다.
정당의 목적이 권력의 획득인 것은 언제나 옳다. 그래야 정당의 가치와 정책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에 속한 정치인들의 목적이 정치권력에 줄을 대는 것이어선 안 된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는 일이 늘 그렇게 진행되고 만다. 이번 촛불 광장의 민심만 봐도 그렇다. 광장의 민심은 늘 정치권보다 한발 앞섰고, 정치권은 계산기를 두드리다 뒤늦게 끌려 나오는 형국이다. 이것은 우리 정치권이 정국 현안과 민심을 발 빠르게 청취하고 먼저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정치 지형의 변동에 당황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사안에만 관심을 가지다 보니 생긴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인재나 영웅호걸이 정치권에 입성한들 현재의 정치적 환경에는 변함이 없게 된다. 그래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여야 정치권에서 단행하는 선수 교체는 국민들을 속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쇼일 뿐이다.
# 시장만능주의 헬 조선 벗어날 대안 만들어야
지금이 야당으로서는 최고의 정치적 호기일 것이다. 그동안 정부와 집권여당의 재벌 대기업과 부자 특권층을 위한 정책들을 주로 집행해왔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더구나 우리 사회 특권층의 갑질 문화와 특권의식은 그 정도가 너무나 심각했고,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마저 그들에게는 예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행위들을 비판하고 감시해야 할 권력기관과 언론기관까지 통제하며 독재정권 시절에나 가능했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국정을 농단해왔다.
사회안전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압도적 세계 1위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라는 오명만 남았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알바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지탱하는 청년들, 노후의 편안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야할 노인들은 전체 노인의 4분의1이 절대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보통사람들은 평생을 일해 봐야 집 한 채 장만하기 어려운 게 지금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이다. 소수의 부자들을 위해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이 불안하고 불행하게 살아가야 하는 세상, 이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이런 시장만능주의,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야당들도 국민적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국회의원 수가 부족하다고 해서 여소야대의 국회까지 만들어줬다. 그럼에도 그들은 산적한 대한민국의 병폐를 거의 해결하지 못했다. 이제 야당들은 박근혜 탄핵 이후 대한민국의 나아갈 방향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부터는 헬 조선을 탈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법률과 제도로 확립할 확고한 비전을 보여주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는 야당이 그동안 지탄받아온 바를 사죄하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 정치적 87년 체제와 경제적 97년 체제를 끝내자는 촛불 민심의 요구
박근혜 탄핵의 국회 가결 이후 여야 정당과 주요 정치인들은 차기 권력 창출을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골몰하고 있다. 그럼에도 고달프고 성난 촛불의 민심은 구체제의 청산과 보통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외치고 있다. 다시 말자자면, 정치적으로는 ‘87년 체제’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97년 체제’의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의 체제 변화가 시대적 당면과제로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승자독식-패자전몰의 ‘단순다수대표제’라는 선거제도와 정당체제를 개편해야 한다. 49대 51로 승부가 갈리는 현행 선거제도는 51%의 승자가 모든 권력을 독식하게 되어 있다. 반면 49%의 민의는 사장된다. 그러다 보니 권력을 획득한 쪽과 패배한 쪽이 집권기간 내내 반목하고 질시한다. 이런 정치의 역사가 87년 이후 3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가령, 세 후보가 34%, 32%, 31%의 득표를 했을 때 34%를 득표한 당선자는 이런 낮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모든 권력을 독점한다. 이로 인해 집권 기간 내내 나머지 약 70%의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거나 발목을 잡힌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사표를 방지하고 지지율만큼 권력을 획득하는 독일식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이다. 국민들은 지지 정당에 투표를 하고, 정당들이 지지율에 비례하여 의석수를 가져가는 것이다. 요즘처럼 다변화된 사회에서는 국민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거대 양당이 독점하거나 반공 이념에 사로잡힌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 가둘 수는 없다. 그러므로 현행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선거 때는 거대 양당이 사회의 제반 문제들을 다 해결할 것처럼 말하지만 선거가 끝난 후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도 바로 이런 기이한 선거제도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선거 이후에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응답이 전체 국민의 40% 가까이 되는 일이 늘 벌어진다. 그리고 국민들이 진보적 정당들에게 5~10%만 표를 주어도 15석~30석의 의석이 생기고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정당이나 청년이나 여성을 주로 대변하는 정당, 또는 장애인이나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당들도 생겨서 작은 지지율로도 국회 입성이 가능하게 된다. 일명, 다당제 합의제 민주주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정당이 너무 많아진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이미 유럽의 선진 복지국가에서는 보통 4-6개 정도의 원내 정당들이 활동하고 있다. 사실 정당 득표의 하한선인 3%의 지지를 얻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원내의 다양한 정당들이 자신의 취지에 맞는 역할들을 수행하게 되며, 결국 다양한 국민적 이해와 요구가 대의정치에 반영되게 된다. 우리는 현행 선거제도와 정당체제를 개편해야 한다. 그럴 때라야 거대 양당의 독점으로 인한 폐해도 줄일 수 있게 된다. 또 선거 때마다 거대 정당 외의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기권을 하거나 차악을 선택하는 것도 막을 수 있게 된다.
# 양극화와 불평등을 넘어설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1996년 말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면서 선진국이 다 된 것처럼 요란했다. 그러나 1년 후 IMF 외환위기라는 사상 초유의 재앙을 마주했다. 사실, OECD에 가입하려면 신자유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라야 하는 것임에도 당시 정치권은 조급하게 금융시장의 개방과 노동시장의 유연화, 근로자 파견제 등을 수용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 선진국에서는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그 폐해가 드러나고 있던 시기였음에도 대한민국에서는 그에 대한 진지한 검토나 공론화가 정치인들의 무능과 이익을 위해 무시돼 버렸다.
결국 97년 체제는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인해 양극화와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OECD 34개 국가 중 미국 다음으로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심한 나라로 전락했다. 국민 행복지수도 터키와 멕시코를 제외하면 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낮다. 국민이 불안하고 불행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인 것이다. 매년 물가는 오르는데 상위 10%를 제외한 나머지 90%의 임금상승률은 제자리에 머물고, 지불해야 할 각종 비용을 제때 지불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크게 늘고 있다. 가슴 아픈 형국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시장 질서라는 허울은 재벌 대기업과 부자들을 위해 대다수의 국민들을 희생시킨다. 이것이 헬 조선이다. 국민들은 ‘살아가는 게 힘들다’며 아우성을 쳐도 ‘97년 체제’인 신자유주의 노선은 진보 정권에서나 보수 정권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점점 더 강화되고 있을 뿐이다. 경제학자들 역시 시장의 우위만을 주창한다. 분배와 정의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기득권 세력의 탐욕은 30대 재벌 대기업 기준으로 현재 그들의 창고에 800조 원이 넘는 돈이 쌓여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1년 예산의 두 배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끊임없이 곳간 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괴물 앞에서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다.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고 보통사람들이 행복한 역동적 복지국가를 요구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97년 체제를 끝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적 87년 체제와 경제적 97년 체제를 끝내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영원히 헬 조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국민 대다수의 삶이 끝없이 추락함에도 불구하고 재벌 기득권과 낡은 정치 세력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만을 위해 낡은 체제를 유지하려고 혈안이 될 것이다.
촛불에서 보여준 수백만의 함성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 나갈 것이다. 우리는 누구라도 이 대열에서 역사를 거스르고 시대를 역행하는 낡은 행위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행 정치 시스템을 만든 낡은 선거제도와 정당체제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그리고 역사의 본질적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어느 정권이 들어선들 경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대한민국의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지난 87년 이후 30년 동안의 학습 효과이다. 이제 우리는 국민이 행복한 역동적 복지국가를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 제도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