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뉴스프리존=심종대 기자]아시아 셰익스피어의 무대미술은 최근까지 서양 무대미술의 경향을 그대로 답습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서양의 현대 무대미술이 일반적으로 그러히듯이 건축적, 장식적, 사실주의적 시각을 지양하고 단순화, 입체화, 양식화 상징화를 추구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의 우수한 평가를 받는 무대미술은 이러한 경향을 띠고 있다. 아시아 셰익스피어의 무대미술은 서양 무대미술의 경향에 따라 장식적 화려함이 강조되는 무대미술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에서 최초의 완전한 공연으로 평가받고 있는 문예협회의 <베니스의 상인>(1906)과 <햄릿>(1910)의 공연사진을 보면 사실성과 함께 헨리 어빙의 공연에서 보는 화려한 장식성이 엿보이고, 이치가와 사단지의 <베니스의 상인>(1908)의 공연사진을 보면 앞의 공연보다 더 치밀하게 역사적 양식과 장식성이 강한 무대미술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셰익스피어의 무대미술이 장식적이고 사실적인 것에서 양식적, 상징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은 1930년대에 스키지 소극장의 <줄리어스 시저>(1925)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공연의 디자인은 당시 가부키 무대미술의 개혁을 통해 일본 현대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토 기사쿠가 담당했다. 몇 개의 기둥으로 구성된 무대 디자인은 극도의 단순성을 보여준다. 1900년대 후반의 일본 무대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가네모리 가오루와 아사쿠라 세츠의 무대미술에서는 강렬한 현대적 조형성과 장식성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셰익스피어의 무대미술의 1960년대에 와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협과 극협의 <햄릿>(1951), <오셀로>(1952)의 무대미술은 사실적 기초 위에 무대장치를 단순화한 것으로 이러한 경향은 그대로 드라마센터 개관공연의 <햄릿>(1962)까지 이어진다.
그 후에도 불비한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셰익스피어의 무대미술은 불가피하게 단순화와 양식화를 추구했다. 이 시기에 장종선은 당시 셰익스피어 공연이 많지 않아서 인지 오페라 <오셀로>의 무대 스케치를 한 장만 남기고 있다. 이 역시 단순화가 기조를 이루고 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최연호, 송관우, 이병복, 신선희, 윤정섭, 박동우 등이 셰익스피어 공연의 무대미술을 담당했다. 이병복의 천과 종이를 활용한 토속적 분위기의 무대미술을 제외하고 모두 서양의 무대미술의 단순화, 양식화, 상징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셰익스피어 무대미술도 한국의 경우와 다소 차이는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연극을 국가에서 관장하기 이전에는 초라한 정도에 불과했다. 1930년대의 국립희극전과학교의 <베니스의 상인> 공연사진을 보면 기본적으로 단순화와 양식화를 추구하고 있지만 초라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화대혁명 이전 20년에 가까운 기간에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지만 셰익스피어 공연이 소수의 희극단체와 대학에서만 행해졌기 때문에 우수한 무대미술이 나타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국 셰익스피어 무대미술들은 그 이후 개방화와 자유화 시기를 맞아 부흥의 발판을 확실하게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 사정에 따라 무대미술에 대한 투자가 확실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정치적 속박에서 벗어나서 서양의 현대미술적 경험을 제한 없이 그대로 받아 들여 자기화와 민족화를 추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 셰익스피어 무대미술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다음호에 계속
심종대 기자, simjd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