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기팔 작가
故 김기팔(金起八) 선배가 KBS연속극 100만환 현상모집에서 「해바라기 가족」으로 당선된 것은 1960년 4월 1일의 일이었다.
이승만정권이 3.15 부정선거를 저질러 세상이 온통 들끓고 있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혼란 속에서도 KBS는 용케 흔들림 없이 방송문예의 진흥과 신인발굴에 열을 쏟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2년 전 58년에 장편소설을 50만환을 걸고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당선시킨 KBS가 이듬해부터 소설 아닌 20회분 연속극을 100만 환을 걸고 모집해 59년에는 염수경작의 <생활전선>을 재 모집에서 가작으로 뽑았고 백전교작 <발동기>와 이희복작 <푸른 상처가 가실 무렵>을 장려상으로 입상시켰다. 이어 60년에 김기팔작 <해바라기 가족>, 62년에 鄭鎭建작 <각하>를 당선, 宋肅英 작 <몸부림 치는 도시> 현민 작 <날개를 다오>를 입선시켰다. 64년에는 당선 金光燮작 <바보와 천치>, 가작 李熙福작 <유산없는 자손들> 장려상, 李基明작 <나갈 수 없는 수평> 입선 全泓작 <스탠 바이>, 65년에는 沈英植작 <길>,65년에는 崔豊작 <아오지의 포로>, 67년에는 南芝燕작 <이브의 후예들>,68년 봄에는 金恒明작 <기도하는 도미니카>, 68년 가을에는 李基明작 <평화스런 날의 작별>을 당선시키고 있다.
김기팔의 당선에 대해 전 KBS 이사장 노정팔 선생은 다음과 같은 뒷이야기를 전해주었다.
“59년에 당선작을 못 낸 당국은 60년도의 응모 작품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예선을 통과한 작품 중에 당선작으로 뽑을 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선을 통과한 작품의 작가 중에 기대했던 이름이 없는데 의아심을 품게 되었다. 전년에 학생극 경연에서 우수상을 탄 서울대 팀에서 응모했을 것으로 알았는데 이름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예선에서 탈락한 원고를 다시 찾아보았다. 거기 낯이 익은 이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金起八, 공들여 읽어 보니 당선 감이었다. 하도 惡筆이어서 예선에서 재대로 읽지도 않고 제쳐놓았던 것이다. 지금처럼 워드프로세서가 있는 시대도 아니어서 전적으로 육필로 써야하는 시대에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김기팔씨의 악필은 후에 소문날 정도였으니 하마터면 악필로 당시로서는 거액이었던 100만 환이 날아갈 뻔했던 것이다.
김기팔의‘ 해바라기 가족‘
산뜻한 작품이다. 반골기질의 이야기에 굵직한 기둥을 세우고 뚝 부러지게 군더더기 없이 써내려 가는 것이 그의 作風이었다.
노정팔 저 <한국방송과 50>에서 인용한다.
"김기팔 씨는 1960년 KBS 신춘연속극 현상모집에 <해바라기 가족>으로 당선된 작가이다. 그 후 동아 방송에서 문제의식이 있는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많이 집필했다. <사건 세계사> <한국찬가> <동아반세기> <정계야화>를 장시간에 걸쳐 방송했다.
68년 10월에 시작한 <한국찬가>는 우리 근세사를 인물위주로 진단 평가한 작품이고 <동아반세기>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통치의 전환으로 탄생한 민족지 동아일보의 파란 많은 50년사를 엮은 다큐멘타리 드라마이다. 70년 10월에 시작한 <정계야화>는 이전에 대담프로그램으로 진행했던 것을 다시 20분 짜리 드라마로 부활시킨 실록구성물이다. 이승만역의 구민, 조병옥역의 유기현씨 들이 탁월한 역기를 보여 더욱 청취자의 호응도가 높았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당국의 규제조치로 중단되고 말았다.
김기팔 씨는 텔레비전에도 많은 드라마 다큐멘타리를 집필했으며 MBC의 <땅>을 끝으로 그만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다"
동아방송에서 김기팔 씨와 오랜 콤비였던 안평선(安平善) 전 PD는 「한국작가협회 50년」<작고 작가 회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중복되는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김기팔은 원래 소설가 지망으로 중학교 때 한 서점의 책을 가리지 않고 모두 독파하고, 고교시절에 단편 「적색영감」을 발표했다. 대학에서 주위의 권유로 KBS 대학방송극경연대회에 참가「산울림 이야기」로 주목을 받았고, 1960년 KBS 연속극 공모에 「해바라기 가족」으로 당선하여 방송문단에 들어선다. 감각의 참신성 박진감 넘치는 추진력으로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방송계에 새로운 바람을 예고했다.
1963년 4월 동아 방송 개국 초에 자선 극 「이 사람을!」이란 프로그램에서 작가와 프로듀서로 만나 녹음기를 메고 전국을 누비고, 구상을 하고 편집을 하느라 며칠 낮 밤을 함께 지냈다. 기획단계의 우려를 깨고 첫 방송부터 청취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고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결국 「이 사람은!」이란 프로그램은 김기팔을 방송작가로 결정짓게 하였다.
1960년대는 라디오 연속극의 황금기였다. 매일 15~ 16편의 연속극이 방송되었는데 특히 멜로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었다. 대중의 인기도 높고 영화화되면 원작료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김기팔은 멜로드라마를 거의 쓰지 않고 시대성 있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1960년대 초부터 김기팔은 동아 방송에서 전속작가처럼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풍부한 자료와 문헌섭렵을 통해 사실성과 정확성을 완벽하게 추구함으로써 연출자는 자신 있게 제작에 열중할 수 있었다.
멕시코 이민의 애환을 추적하는 <유카탄 아리랑>, 물산 장려운동과 외국인이 남긴 조선여행기를 재구성한 <한국찬가>는 품격 높은 교양 드라마였고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이신다이(挺身隊)>는 한 친일적인 윤리위원의 시비로 도중하차를 당했다.
작가 김기팔이 열성을 다한 역작은 정치 다큐 드라마 <정계야화>이다. 제1공화국 당시 자유당과 민주당이 대결하고 타협하는 정치사를 사건별, 쟁점별로 추적하여 신랄하게 비교 분석함으로써 군사정권의 폭압에 억눌린 시민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고 민주이식을 고취시켰다.
권력기관의 경고와 탄압을 받으며 두 번이나 중단되었던 「정계야화」는 결국 방송통폐합으로 동아 방송과 함께 운명을 다하게 되었다.
군부의 시퍼렇던 때에 "....권력이란 무엇인가. 한번 쥐면 그토록 놓기 싫은 것인가 . ...그 때 (제1공화국)는 그래도 민주주의가 있었다"고 절규하던 해설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김기팔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한국화 작업을 소망했다. 진실성 없는 허구는 결코 드라마가 될 수 없고 말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국적불명의 드라마는 정리돼야 하고, 일제 시민잔재와 퇴폐적인 양키이즘의 찌꺼기를 우리 드라마에서 제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컬러텔레비전 시대를 맞으면서 의욕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억새 풀> <야망의 25시>, <욕망의 문> 등 그의 작품들은 힘센 쪽, 가진 쪽, 옳지 못한 쪽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고발하는 자세로 일관했고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으로 옮긴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은 컬러 영상의 강점과 배우들의 연기변신을 통해 <정계야화>가 조기 종영된 아쉬움을 채워 주면서 인기절정을 누렸다.
최종적으로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려던 방송드라마 <땅>이 방송환경의 벽을 넘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게 된 것은 우리에게 자책과 자괴감을 안겨 주었다.
마침내 군사정권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렇게 끈질기게 저항하며 그 날을 고대하던 그는 안타깝게도 그 끝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긴 세월 참아 왔던 울분을 속 시원히 풀지도 못한 채 잠들었다. 이제 <땅>은 누가 완성시킬 것인가?
김기팔은 1980년 겨울 방송통합을 누구보다도 슬퍼하고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도대체 정권이 뭔데 '민중의 소리', 민족의 방송을 말살해도 되는 건지. 무지막지한 정치꾼들은 역사의 심판이 두렵지도 않은지,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하고 통탄하면서 밤새워 술을 퍼 마셨다.
방송작가는 인기와 함께 잊혀 진다. 암울한 난세를 함께 마시고 같이 울고 웃던 친구와 동료, 후배들이 뜻을 모아 그가 항상 그리워하던 고향 평양으로 가는 통일로 변 장곡공원에 그를 기리는 돌을 세웠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다가 신새벽에 돌아가셨다.
밤새 사악한 무리를 질타하고 한 품은 이들을 달래시던 님은
민주와 통일의 먼동이 틀 무렵 기어이 돌아가셨다.
그리시던 북녘 고향 저만큼 보이는 곳에서 님이여,
아직도 걷히지 않은 어둠을 지켜 다가올 찬란한 대낮으로 증거하시라. "
김기팔 통일염원 방송비.(글 김지하(金芝河), 조형 심정수(沈貞秀) )
한때 그의 작품 중에 <민나 도로보데스 (모두 도둑놈입니다)> 라는 대사가 시중에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그가 지금에 살아 있다면 이 시대를 어떻게 증언을 할 것인지...
다음 글은, 시인 김지하 씨가 그의 회고록에 남긴 김기팔 선생에 대한 추억이다.
김기팔(金起八)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되어 가족 외에 처음 만난 것은 아마 김기팔 형일 것이다.
술자리였는데 최불암 형도 함께했는지 모르겠다. 아주 가까운, 그리고 오래 된 술친구들이니까. 명색은 나를 위로한다는 술자리, 그러나 김기팔 형 표현대로 ‘러시안 제스처’였다.
러시안 제스처란 친구들끼리의 술자리에서 한 사람이 어떤 궁한 친구 하나를 동정하는 얘기를 꺼내면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그를 돕는 방법과 거기에 대한 자기 몫에 대해 한없이 부풀리며 착한 척 방정을 떤다. 그러나 그것은 술안주일 뿐이고 이튿날은 까맣게 망각, 이제 또 다른 사람 걱정을 시작하는 러시아인들의 술버릇을 말한다.
왜냐하면 김기팔 형은 술자리 내내
“야! 빨갱이! 술 먹어! 이 빨갱이야!”
그러나 나는 화를 내는 대신 픽픽 웃기만 한다. 왜냐하면 그의 본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공연히 그래 보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날은 전주(前酒)에 잔뜩 취한 최불암 형이 나더러 정색을 하고 꼭 연기하듯 심각하게 “영웅! 영웅!”하고 치켜세웠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이다. 하긴 영웅은 무슨 얼어 죽을 영웅인가! 술 고픈 한낱 거지일 뿐!
첫 회에 이미 잔뜩 취하고 두 번째를 가고 또 세 번째를 가는데 김기팔 형 말대로라면 이것이 모두 감옥에서 고생한 김 아무개를 위로하기 위한 술자리란다.
그러나 속내는 술 마시고 취하자는 목적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갱이! 빨갱이!’하는 냉전적(冷戰的) 호칭(呼稱) 속에 김 형 나름의 숨은 아픔과 우정이 배어 있음을 모를 만큼 멍청한 나도 아니요, 또 그리 짧은 인연도 아니었으니 술자리는 통금이 넘어 아예 정릉에 있는 김 형의 방으로까지 연장되었다.
놀라운 일이 그 방에서 벌어졌다.
김기팔 형이 눈물바람을 한 것이다.
“야! 이 빨갱이! 이젠 다시 감옥에 가지마! 엉! 이 빨갱이야!”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이 모두가 그저 주책일 뿐일까.
김형이 별세하기 직전, 해남으로 낙향한 나를 보러, 생활 때문에 난초 장사 나선 연출가 박정기(朴精機) 형과 함께 해남 남동집에 와 밤새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며칠간 대흥사(大興寺)며 초의(草衣) 스님의 일지암(一枝菴)이며 강진(康津) 다산초당(茶山草堂)과 땅
끝을 구경하고 나서 돌아가고자 작별을 고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더러
“죽지마, 임마! 죽지마! 꼭 살아야 돼! 오래오래 살아서 옛말 하자. 응! 지금 죽으면 너무 억울하다, 너무 억울해! 죽지마! 죽지마!”
꼭 어린애 같았다. 그러나 그 직후 내가 큰 병에 걸린 걸 보면 그이가 이미 무슨 예감을 한 것 아닐까.
그런데 죽을 것 같던 나는 살고, 죽지 말라던 그이가 그 직후 의료사고로 별세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너무나 억울하고, 너무나 허망하다.
그의 이런 인간성은 그의 드라마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가슴을 울컥 하게 하는 인간적 아름다움이 작품 밑에 도도히 흐르는 것이다. 왜 가는가. 왜 정든 사람들은 일찍 가서 남은 자들을 서럽게 만드는가. 참으로 인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나 대학 시대 내내 함께 연극을 하고 함께 마시고 함께 뒹굴던 그이가 보고 싶을 때가 많다.
요즈음도 외로울 때면 ‘기팔 형’하고 입속으로 불러본다.
그러면 어디선가 허공에서 덧니를 드러내고 킬킬 웃으며 평안도 사투리로 “왜 그래? 이 빨갱이야!”
할 것 같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말한 사람 역시 중앙학교 출신이었다.
참으로 오늘 이 글을 쓰며 그리운 형을 그리워한다. 이미 끊은 지 10년이 넘은 술이지만 오늘은 어느 허름한 목로에 혼자 앉아 기팔 형을 추억하며 조금만 마시고 싶다. 형수는 어찌 사는지, 아이들은 이제 다 시집을 갔는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은지…. 한 번도 못 찾는 내가 죽일 놈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 2010년 한국언론학회의 미디어발전 공헌상을 수상한 방송작가 고 김기팔 선생
김기팔 작가
10월 16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멀티미디어 강의동에서 거행된 한국언론학회 제 50차 정기총회에서 방송작가 고 김기팔(金起八) 선생에게 한국 미디어 발전 공헌상을 수여했다.
고 김기팔(본명 김용남) 선생은 1937년 7월 13일 평양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대 재학시절 KBS 대학생극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산울림 이야기>로 1등을 차지하고, 1960년 KBS 라디오 연속극 현상공모에 <해바라기 가족>으로 당선되어 방송계에 등단했다.
1963년에 개국한 동아방송에서 1968년 <한국찬가> 1970년 <정계야화> 같은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집필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였고, TBC-TV에서는 연속극 <춘하추동>으로 많은 시청률을 올렸으며, 1969년 MBC-TV의 개국 드라마 <사랑과 슬픔의 강>을 집필하고 1980년대에 이르러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을 비롯하여 <야망의 25시> <아버지와 아들> <억새풀>등의 연속극과 1990년대에 집필한 <땅>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절 방송극에 민주와 정의를 방송극의 주제와 내용으로 한 드라마를 씀으로써 민주화의 한줄기 불빛이 되어 이 땅을 밝히고, 철학과 의식이 분명한 방송작가로서의 활동을 벌이다 1991년 12월 24일 55세의 나이로 요절한 불세출의 방송작가다.
특히 <춘하추동>과 <사랑과 슬픔의 강>은 필자가 탤런트로 활동을 하던 시절 주인공으로 출연한 작품이기에 감회가 깊다.
2010년 10월 16일 한국언론학회 미디어발전 공헌상 시상 식장에 최현철 한국언론학회 회장, 오연천 서울대학교 총장, 극단신협대표이며 연출가 전세권, 극작가 조성현이 필자와 함께 자리해 수상을 축하했다.
1992년 김기팔 선생의 추모비를 시인 김지하의 비문과 조각가 심정수의 제작으로 고양시 장곡동 통일공원에 건립했는데, 김기팔 선생을 대신해서 수상한 필자가 답사에서 낭송한 비문의 추모시를 소개한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다가 신 새벽에 돌아가셨다
밤새 사악한 무리를 질타하고 한 품은 이들을 달래시던 님은
민주와 통일의 먼동이 틀 무렵 기어이 돌아가셨다
그리던 북녘고향 저만큼 보이는 곳에서 님이여
아직도 걷히지 않는 어둠을 지켜 다가올 대낮으로 증거 하시라.
故 김기팔 선생의 <한국언론학회 미디어발전 공헌상> 수상을 축하하며 후배 박정기(朴精機) 씀
김기팔 선생의 연세는 올해 만 80세다. 저 세상으로 가신지 벌써 25년이 되었다. 이 아침에 문득 선생의 모습이 떠올라 이 글을 썼다./박정기 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