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제주대 교수)
나는 최근 언론에 회자되는 기본소득 논의가 불편하다. 이것은 내가 기본소득을 반대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나는 보수든 진보든 모든 담론과 정책의 열린 논쟁을 언제나 환영한다. 기본소득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수년 전 우리나라에 기본소득 제도가 처음 소개됐을 때부터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았다.
복지국가 건설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자칫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저 나와 다른 견해가 등장했고, 그것도 자칭 진보 쪽 사람들의 주장이니 존중하는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기본소득 제도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비판도 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의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기본소득의 핵심 내용들을 숨기고 애매하게 포장해서 유포하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장차 복지국가의 걸림돌이 될 게 자명하다. 그래서 나는 복지국가 운동가로서 당연히 문제를 제기해야만 한다. 그런데 최근 기본소득 비판 칼럼들을 쓰기 전에 나는 이런 글을 ‘써야 할 지 말아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대선 예비 주자의 한 명인 이재명 시장이 기본소득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들고 나왔고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장은 우리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개발한 한국형 사회서비스 정책인 ‘공공산후조리원’ 사업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이 글은 특정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나 반대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단지 한국의 기본소득 옹호론을 비판하고 보편적 복지국가의 비전을 밝히기 위한 것임을 밝혀둔다.
# 초보적 복지국가에서 성숙한 복지국가로 발길을 재촉해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빈곤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복지국가 건설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까지 복지국가 체제는 선진 복지국가들에서 경제 성장과 복지 분배를 인류 역사의 어느 시기보다 높은 수준으로 달성했다.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후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에서도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지속적 개혁과 조정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성숙한 복지국가로 발전했다. 그래서 OECD 국가들 중에서도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성숙한 복지국가들은 국민의 행복 수준이 매우 높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행복지수가 OECD 국가들 중에서 거의 꼴찌 수준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 지출’의 비중이 선진 복지국가들의 1/3에 불과하고 OECD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복지 후진국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미성숙한 또는 초보적 복지국가로 간주된다. 그래서 OECD 평균에 비해 자살률은 3배, 노인빈곤율은 4배나 되고,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이것은 국민이 행복하지 못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지표들이라 하겠다.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경제와 복지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21세기의 세계에서 복지 후진국이 경제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제는 장기적으로 저성장 추세를 이어가고, 복지는 실질적 보편주의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경제와 복지가 모두 곤경에 처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별적 복지의 부담이 큰 상태에서 경제사회의 양극화와 소득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는 빠른 속도로 복지국가 건설에 나서야 한다. 그래서 지금의 초보적 복지국가에서 북유럽의 경험을 배워 한국형 보편주의 복지국가(역동적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 기본소득 제도의 핵심 내용을 숨겨서는 안 된다
탄핵과 대선 국면을 맞아 기본소득 제도가 세간의 이슈로 등장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거의 전부가 가짜다. 우리나라의 기본소득 옹호자들이 의도했던 것이겠지만, 다수의 언론들도 기본소득 제도의 본질과 핵심 내용에서 크게 벗어난 외국의 사례들을 마치 기본소득인양 잘못 보도하는 많은 오류를 저질렀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대선을 앞두고 의도적으로 기본소득의 핵심과 본질에서 벗어난 가짜 기본소득으로 정치사회적 시민권을 얻으려 한다는 의심을 충분히 받을 만하다. 지난 20년 동안 실질적 보편주의 원칙의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쟁취하기 위해 사회운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보편주의 복지국가 운동을 해온 복지국가 운동가로서 나는 최근의 기본소득 논의가 장차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아 걱정스럽고 불편하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무엇인지 핵심 내용을 통해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모든 국민의 기본소득을 보장해주자는 게 진보적이고 좋지 않으냐’는 세간의 말에서 보는 것처럼 ‘기본소득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주자는 것이니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애매하고도 편의적인 이해의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진보적 또는 좌파적 관점을 가진 기본소득 옹호자들이 정의한 기본소득 제도의 핵심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산조사 없이 다른 소득이 있더라도 개인 단위로 매달 현금을 균등하게 지급한다. 둘째, 노동 여부와 의사를 묻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되 생계 보장과 사회 참여가 가능할 정도로 충분한 소득을 지급한다. 이 원칙들을 충족해야 ‘진짜 기본소득’이고, 그렇지 않으면 ‘가짜’다.
다시 설명하자면, 자산조사 없이 소득이 있든 없든 간에 모든 국민들에게 현금을 지급해야 한다. 소득이 있거나 재산이 일정 수준 이상인 사람들을 제외하는 현금 지급은 기본소득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기본소득은 가족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동일한 금액을 지급해야 한다. 1인 가구든 4인 가구의 구성원이든 각 개인이 매달 받는 기본소득은 같아야 한다. 여기에 차등을 두는 것도 기본소득의 개념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노동의 여부와 의사를 묻지 않는 무조건성은 기본소득 제도의 핵심 내용인데, 이에 따르면 실업자만을 대상으로 삼는 기본소득은 가짜다.
실업자든 취업자든 따지지 않는 무조건적 현금 지금이라야 진짜 기본소득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계 보장과 사회 참여가 가능할 정도의 현금이라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2015년 1인당 최저생계비가 62만 원인 점을 감안하면 이 수준을 넘는 금액이라야 한다.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진짜 기본소득’의 사례는 2016년 6월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스위스의 기본소득 방안이 유일하다. 기본소득의 핵심적 개념에 비춰볼 때 미국의 알래스카 사례나 저개발 국가들의 실험적 소득분배 정책들은 ‘진짜 기본소득 제도’와 무관하다. 그래서 ‘가짜’다.
# 좌파든 우파든 기본소득은 복지국가를 대체하려는 기획이다
기본소득은 좌파 버전만 있는 게 아니다. 사실, 기본소득은 우파의 주장을 담기에 매우 좋은 그릇이다. 그래서 본래 기본소득 제도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우파가 주목한 정책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의 거장인 밀턴 프리드먼은 보편적 복지를 구현하기 위해 세금을 많이 징수하거나 최저임금제를 도입하는 것 등 국가 개입주의 정책을 반대하는 복지국가 반대의 선봉장이었지만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찬성했다.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좌파나 우파 모두 기존 복지국가 체제의 복지 제도들을 폐지하고, 이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면 복지국가의 공공부조, 사회보험, 사회수당 등 여러 복지 정책들에 들어가는 행정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시장주의의 효율성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에 더해,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기업의 입장에서는 시장임금을 최대한 낮출 수 있게 된다. 이것도 기본소득이 우파 시장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중요한 지점이다.
실제로 2012년에는 일본의 극우파 정치인 하시모토 전 오사카 시장이 이런 기본소득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기도 했었다. 2017년 1월부터 국가 단위로는 핀란드가 처음으로 기본소득 실험에 들어갔는데, 이것도 우파의 기본소득이다. 핀란드 정부는 실업자 2천 명을 무작위로 선정해서 2년 동안 매달 약 70만원을 지급한다. 그런데 이것은 진보적 또는 좌파적 기본소득의 핵심 개념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은 노동의 여부와 의사를 묻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것인데, 핀란드는 노동을 하고 있는 취업자들은 제외하고 실업자들에게만 현금을 지급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한편, 핀란드는 기본소득을 추가로 지급하는 게 아니라 실업자들에게 지급하던 기존의 실업급여와 공공부조 같은 복지국가의 제도적 복지 급여들을 중단하고 이것을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실제로 핀란드 중도우파 정권의 유하 시필레 총리는 ‘기본소득은 사회보장 체계의 간소화’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것은 기존의 복지국가 체제를 효율화해서 공공복지의 크기를 줄이겠다는 뜻이다. 또 실업자들에게 실업급여 대신 기본소득을 지급해서 이들이 저임금 일자리에 취업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노동시장을 보다 유연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진보적 또는 좌파적 기본소득 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2016년 6월 스위스에서 모든 성인에게 매달 300만 원씩 지급하자는 기본소득 국민투표의 내용은 노동의 여부와 의사를 묻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생계 보장과 사회 참여를 가능케 할 정도로 충분한 현금을 보편적으로 지급한다는 의미에서 기본소득의 본질에 해당하는 핵심적 내용들을 잘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도 복지국가 체제의 효율화와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우파 기본소득 제도와 같은 우려를 낳게 한다.
결국 기본소득 제도는 기존의 복지국가 체제를 대체하려는 기획이다. 그렇다면 복지국가 체제는 무엇인가? 복지국가 체제는 국민 모두에게 생애주기에 걸쳐 보편적으로 소득과 사회서비스를 보장한다. 먼저, 복지국가들은 소득의 보장을 위해 보편주의 원칙의 사회보험과 사회수당 제도를 운용한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기초생계비가 부족할 경우에는 공공부조 제도가 작동한다. 다음으로, 사회서비스의 보장을 위해 보육·교육·의료·요양 서비스를 모든 국민에게 사실상 무상으로 제공한다. 복지국가 체제에서는 근로능력이 있는 성인들은 누구라도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도록 하고, 국가는 국민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보편적 사회보험 제도가 작동해서 어떤 위험 상황에서도 소득의 단절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근로소득이 없는 특정 인구에 대해서는 조세 기반의 아동수당, 노인수당, 장애인수당 같은 보편적 사회수당 제도가 작동한다.
#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복지국가가 해법이다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복지국가의 이런 소득보장 제도들을 폐지하고 무조건적 기본소득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한다. 심지어 우파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효율성의 논리를 앞세워 보육이나 사회복지 서비스와 같은 사회서비스도 상당부분 기본소득으로 대체하자는 입장이다. 이들은 장차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일자리 수가 감소하고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진단하는데, 복지국가 체제로는 이런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이므로 기본소득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선진국들은 이런 주장을 거부했고, 현실의 세계에서 진짜 기본소득을 도입한 나라는 없다. 이는 기본소득 제도의 전제가 틀렸거나 너무 먼 훗날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인공지능과 로봇 때문에 기존의 일자리는 줄어들겠지만 과거 세 차례의 산업혁명에서 그랬듯이 새로운 일자리도 많이 생겨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어떻게 맞을 것인가? 복지국가의 소득보장 제도들을 폐지하고 전 국민에게 무조건적 기본소득을 주면서 일자리 문제를 주로 시장에 맡겨놓자는 기본소득 옹호자들의 주장대로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볼 때, 아마도 기존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새로운 일자리는 저임금의 불안정 일자리로 전락해서 노동시장의 양극화는 더 심화될 것이다. 이는 다분히 신좌파의 무정부주의적 입장이며, 우파의 시장주의 기본소득은 더 노골적으로 복지국가 체제를 효율화하려는 ‘작은 정부’의 시장만능주의 노선일 뿐이다.
결국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기본소득 제도는 올바른 해법이 아니다. 노동시장과 일자리 정책의 성공적 집행을 위해서도 그동안 성과가 입증된 보편적 복지국가의 책임 있는 역할이 더 크게 요구된다. 왜냐하면 민간과 협력하고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일자리들 간의 임금과 복지 격차를 최소화해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총체적인 개입주의 전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좌파의 방식이든 우파의 방식이든 장차 기본소득 제도가 복지국가의 역할을 대체하게 되면, 국가는 정부 재정의 상당 부분(경우에 따라 거의 대부분)을 국민 개개인의 통장에 입금하는 소극적 역할만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정부는 규제와 재정을 통한 시장 개입 능력을 크게 상실해서 ‘작은 정부’ 또는 ‘무정부주의’ 시대가 열릴 가능성이 커진다. 이건 우리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다.
# 가짜 기본소득 논의 대신 보편주의 복지국가 건설에 주력해야
최근 우리나라에서 제기된 기본소득은 노동의 여부와 의사를 묻지 않고 생계 보장이 가능할 만큼의 현금을 보편적으로 지급한다는 기본소득의 핵심 개념과 무관하다. 이재명 시장의 대선 공약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국민 5천만 명 모두에게 매달 2만5천 원씩(연간 30만 원) 주는 것은 우리나라의 2015년 1인당 기초생계비인 62만 원에 크게 못 미치는 푼돈일 뿐이다. 그래서 ‘가짜 기본소득’이다. 그리고 기본소득 옹호자들이 아동, 노인, 장애인에게 주겠다는 기본소득은 성숙한 복지국가들에 이미 다 있는 보편적 사회수당인 아동수당, 노인수당, 장애인수당이다. 이들은 복지국가의 사회수당 제도에 기본소득 이름을 붙였다. 심지어 이들은 보편적 사회수당 제도를 선별적 복지라고 호도하기도 한다. 학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옳은 처사가 아니다. 복지국가의 사회수당 제도에 기대어 기본소득 용어를 연착륙시키려는 꼼수로 보인다. 심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국민을 속이는 행위이다.
논쟁을 제대로 하려면 모든 성인에게 노동의 여부와 의사를 묻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1인당 최저생계비에 해당하는 약 70만 원 이상의 현금을 매달 지급해서 복지국가의 소득보장 제도를 대체하겠다는 기본소득 제도의 핵심 내용을 정책으로 들고 나오는 게 옳다. 이렇게 한다면, 나는 반대는 하겠지만 더 이상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것은 독일 좌파당의 일부 세력 등 유럽의 기본소득 제도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진짜 기본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대선을 앞두고 온갖 종류의 ‘가짜 기본소득’ 정책들에 노출돼 있다. 일부 미취업 청년에게 현금을 주고는 여기에 청년 기본소득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일은 그만둬야 한다. 이것은 기본소득이 아니며, 성숙한 복지국가 체제에 이미 존재하는 일자리와 소득 보장의 제도적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복지국가의 아동수당 제도에 아동 기본소득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 대신에 “모든 아동들에게 월 15만 원씩 아동수당을 지급”해서 복지국가의 소득보장 제도를 확립하겠다고 말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정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재명 시장은 대선 공약으로 모든 아동들에게 연간 130만 원을 지역 상품권으로 지급하겠다고 했다. 월 10만8천 원씩이다. 우리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16세 미만의 아동 770만 명에게 보편적으로 월 15만 원씩 지급하는 연간 14조 원짜리 보편적 아동수당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이재명 시장이 모호한 개념의 아동 배당이나 아동 기본소득이란 이름 대신에 복지국가의 보편적 사회수당 제도인 아동수당을 도입하겠다고 공약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지금 우리나라는 초보적 복지국가에 머물고 있다. 갈 길이 바쁘다. 지금은 무익한 가짜 기본소득 논의 대신에 한국형 보편주의 복지국가 건설에 주력해야 한다. 당장 실질적 보편주의 원칙에 맞게 사회보험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급여(소득대체율) 수준을 높여야 한다. 아동수당의 도입과 함께 고용과 연계한 청년수당을 도입해서 실질적으로 청년의 고용과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 기초연금은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소득인 A값의 15%(32만원)로 올려야한다. 현재의 약 20만 원보다 12만 원 정도를 더 지급하자는 것이다. 장애인 수당도 마찬가지이다. 이재명 시장의 경우에는 노인과 장애인에게 월 10만8천 원씩을 더 지급하겠다고 했으니 노인과 장애인 기본소득이라는 말 대신에 기존의 노인수당(기초연금)과 장애인수당을 A값의 15%로 인상하겠다고 공약하면 될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서비스에 대한 재정 투입을 늘리는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보육, 교육, 의료, 요양 등 4대 사회서비스의 외형적 보편주의는 달성했으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질적 수준과 공공성 수준이 여전히 낮다. 갈 길이 멀고 급하다. 왜냐하면 사회서비스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구성원 누구라도 누려야할 사회권적 권리이자 ‘사람에 대한 보편적 투자’를 의미하는 경제학적 가치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사회서비스는 일자리의 보고이다. 유럽 선진 복지국가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그동안 사회서비스에 대한 재정 투자를 지나치게 소홀히 했다. 그 결과, 보육과 요양 분야 등의 취업자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을 받으며 CCTV 감시를 당하기도 한다. 공교육은 부실하고 교육비 부담은 여전히 높다. 의료와 요양은 본인부담의 비중이 여전히 높고, 이들 사회서비스 분야의 일자리들은 최저임금도 못 받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우리는 지금 사회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사람에 대한 보편적 투자’에 재정 투입의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그런데 5천만 명 모두에게 월 2만5천 원씩을 나눠주자는 주장이 대선을 앞두고 하나의 정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나는 소득재분배 효과라는 이 정책의 긍정적 취지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둬들이고 여기에 소요될 연간 15조 원을 보육 등 4대 사회서비스 분야에 투입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이를 통해 사회서비스의 공공성과 질적 수준을 높이고, 이 분야의 일자리를 공공성 높은 안정된 일자리로 바꿔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유럽 선진 복지국가들이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이룬 “공공복지 향상 - 일자리 창출 - 여성 고용 확대 - 조세 부담”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실질적 보편주의 원칙의 한국형 복지국가 건설의 길을 재촉해야 한다. 독일 좌파당의 일부 세력이 주장하는 내용이나 스위스 국민투표에 포함된 것과 같은 ‘진짜 기본소득 제도’의 도입 여부는 먼 훗날 다시 정식으로 논의를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이 글은 특정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나 반대와는 완전히 무관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지금 우리는 국민 행복권의 실질적 보장을 위해 보편주의 원칙의 ‘역동적 복지국가’로 가야 한다.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