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게릴라극장에서 연희단거리패의 카를 발렌틴(Karl Valentin, 1882~1948) 작 정민영 역 오동식 연출의 주막극(酒幕劇:Kabarett drama) <변두리극장>을 관람했다.
카를 발렌틴(Karl Valentin)은 찰리 채플린 (Charles Spencer Chaplin,1889~1977)과 동시대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두 사람은 전쟁 상대국인 독일과 영국에서 공연활동을 펼쳤다. 카를 발렌틴은 독일에서, 찰리 채플린은 영미지역이 활동무대였다. 카를 발렌틴은 대부분의 극장이 공습으로 파괴된 폐허가 된 도시의 선술집이나 주막 같은 장소에서 공연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채플린 역시 전쟁의 참화로 인간성마저 소멸되어가는 현장에서 대중에게 웃음을 제공했기에 후에 불세출의 예술가로 불리게 된 것이다.
정민영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독문학 박사)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현대 독일 문학을 공부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교수다. 2002년부터 여러 연극인들과 희곡 낭독 공연회를 결성해 번역과 낭독 공연을 통해 여러 나라의 동시대 희곡을 소개하고 있다.
저서로 ≪카바레. 자유와 웃음의 공연예술≫, ≪하이너 뮐러 극작론≫, ≪하이너 뮐러의 연극 세계≫(공저), ≪하이너 뮐러 연구≫(공저) 등이 있고, 번역한 책으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욕망≫, ≪하이너 뮐러 문학 선집≫, ≪하이너 뮐러 평전≫, ≪욘 포세 희곡집. 가을날의 꿈≫, 욘 포세의 ≪이름/기타맨≫, 우르스 비드머의 ≪정상의 개들≫, 볼프강 바우어의 ≪찬란한 오후≫, ≪브레히트 희곡선≫, 독일어 번역인 정진규 시선집 ≪Tanz der Worte (말씀의 춤)≫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 <독일어권 카바레 연구 1, 2>, <전략적 표현 기법으로서의 추>, <하이너 뮐러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그리고 한국 무대의 “주워온 아이”>, <하이너 뮐러의 산문>, <한국 무대의 하이너 뮐러>, <Zur Rezeption der DDR-Literatur in Sudkorea> 등 많은 논문을 썼다. 주요 드라마투르기 작품으로 손정우 연출의 <그림 쓰기>, 백은아 연출의 <찬란한 오후> 등이 있다.
오동식은 청주대 연극학과와 동국대 연극학과 대학원 출신의 배우이자 연출가다. 연극 '백석우화 – 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으로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과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연희단거리패의 단원이다.
출연작으로는 <백석우화> <길 떠나는 가족> <벚꽃동산> <리어왕> <궁리> <못생긴 남자> <템페스트> <햄릿> <세자매>외 다수작에 출연해 호연을 보였다.
연출작으로는 <채권자> <변두리극장> <트랜스 십이야> <길바닥에 나앉다> <코뿔소> <스트립티즈> 등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장래가 발전적으로 기대되는 연출가다.
연극 <변두리극장>은 몇 개의 단편을 모아서 구성한 연극이다. 카바레(酒幕, Cabaret)에 공연무대를 가설하고, 건반악기, 관현악기, 금관악기, 타악기 등을 연주하는 인물들과 가수, 그리고 지휘자가 등장해, 전쟁의 각박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연주활동을 펼치며 이야기를 꾸며간다.
지휘자 부재중 연주자들의 지휘자 단점 캐기와 이를 듣게 된 지휘자의 분노, 고장 난 휘장과 휘장 속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가수의 오페라 내용과는 무관한 하반신의 동작, 아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과 아내, 무작정 편지를 기다리는 인물, 한 제본공이 책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사람과 반복해서 하는 통화와 그 밖에 내용 등이 익살맞게 연주 중간 중간에 펼쳐져 관객의 폭소를 자아낸다.
전쟁 중 독일이 클래식 음악을 고집하고 연주할 때, 프랑스에서는 샹송(Chanson) 을, 미국에서는 재즈(Jazz)가 대중선호음악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클래식음악은 일부계층에서만 선호하게 되었고, 샹송이나 재즈는 대중음악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극중 노래 지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 이태리)의 오페라 투란도트(Trandot)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와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1875)의 오페라 카르멘 (Carmen)의 “하바네라(Habanera)”는 동시대의 대표적인 음악으로 이 연극에서 당대의 독일인의 음악취향과 적절히 부합되는 곡이다.
미국영화 베니 굿만 스토리(The Benny Goodman Story, 1956)에서 연주자가 2차 대전 중 적기의 공습으로 폭탄이 바로 연주장 인근에 투하되는 현장에서, 중단하지 않고 트럼펫 연주를 계속하던 모습이 명장면으로 기억되고, 윌리엄 사로이언(William Saroyan,1908~1981,미국)의 희곡 혈거부족(穴居部族, The cave dwellers)에서 예술가들이 이차대전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텅 빈 극장에 모여들어, 그 곳에 기거하며, 낮에는 걸인행각을 펴고, 밤에는 무대에 올라 과거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 역시 필자에게는 잊을 수 없는 명작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 연극의 대단원에서 붕괴(崩壞)되는 카바레(酒幕, Cabaret)에서 연주하다 건물의 잔해(殘骸)에 깔리는 연주자들의 모습은, 남북과 동서가 날이 갈수록 대치되고 적대시되는 상황에서,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졌다면 필자만의 과장된 생각일까?
이승헌, 윤정섭, 김아라나, 신명은, 박현승, 최동혁, 이승복 등 연기자들의 열연과 탁월한 성격창출은 객석의 폭소와 갈채를 불러일으켰고, 무대제작 김경수, 조인곤의 조명디자인, 김한솔의 무대감독 등 스텝 진이 이룩한 무대 역시 분위기상승과 극적효과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카를 발렌틴(Karl Valentin) 작 정민영 역 오동식 각색/연출의 <변두리극장>은, 연희단거리패가 이 불안정한 시국과 난세에 모든 관객에게 제공한 친 대중적이고, 근심걱정을 잊도록 만드는 한편의 메가톤급 웃음 폭탄의 투척처럼 느껴지는 걸작 공연물이다./박정기 문화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