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목적은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것이고, 교육제도는 그런 목적에 부합하도록 설계된다. 그 중에서도 대학입시제도는 특히 그 중요도가 높다. 그럼에도 어떤 제도도 대상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고 수많은 변천을 겪어야 했다. 제도의 개선을 통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답을 찾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제도 자체보다 앞서 제도의 목적이 잘못 설정된 데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더 나은’ 대학입시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인재양성의 ‘목적’을 올바르게 재설정해야 하지 않을까?
# 학생부종합전형: 개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고려하는 입시제도인가
대학입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정시모집과 수시모집이 그것이다. 정시모집은 수학능력평가 시험에 응시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다. 수시모집은 학창시절의 생활을 통해 학생들의 특기와 재능을 파악해서 선발하는 제도이다. 수시모집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학생부종합전형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은 학생들이 가진 잠재력을 기준으로 대학에 입학시키는 수시모집의 한 요소이다. 학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이나 분야의 공부를 열심히 하고, 관련 활동을 하는 것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대학은 학생들의 생활을 검토하고 자질을 평가한 다음에 선발한다. 학생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고, 대학교 측은 충분히 검증된 학생을 선발할 수 있으니 좋다. 윈-윈(win-win)인 셈이다.
그렇지만 학생의 잠재능력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수치를 적용하기 어렵다. 그렇다보니 정량평가보다는 정성평가가 되기 쉽다. 여기서 학생부종합전형의 문제점이 다수 드러난다.
# 학생들의 늘어나는 부담
흔히 과거 수능세대(참여정부 시절)는 입시의 삼대요소인 수능+내신+논술을 가리켜 ‘죽음의 트라이앵글(Triangl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학생부종합전형이 확대되고 입시에는 육대요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위의 삼대요소에 ‘비교과활동+자기소개서+면접’이 더해진 것이다. 이를 가리켜 한겨레신문에서는 ‘죽음의 헥사곤(Hexagon)’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학생부종합전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너무 복잡하다. 대학과 학과에서 적용하는 입시전형은 셀 수 없이 많다. 학생들은 자신에게 어떤 적성이 있는지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아니면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의 학과를 찾아서 그 학과에 가장 유리할 수 있는 노력을 계속 쌓아올려야 한다. 그렇지만 이는 해당 대학교의 특정 학과에만 유리한 준비이고,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학교로 가버리면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하나만 보고 준비를 하다가는 재수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러다 보니 학생들은 수시를 준비하면서 또 정시를 준비한다. 부담이 몇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둘째, 사교육 시장의 다양화와 활성화를 꼽을 수 있다. 학생들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찾기 위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을 짜야한다. 이런 수요의 충족을 위해 사교육 시장이 다른 형태로 발전했다. 추가된 삼대요소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컨설팅해주는 사교육이 등장했고, 전공 분야의 교수 면접을 통과하기 위해 면접 능력을 심화시켜주는 면접학원이 생겼다. 비교과활동도 마찬가지다. 학생의 관련 학문과의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 R&E(Research & Education)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이 연구보고서에 대한 사교육의 개입 정도도 매우 높다. 그래서 서울대학교는 R&E보고서 실적은 채택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기존의 사교육 시장이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활성화 되었다면, 학생부종합전형에서 내신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보니 내신 사교육이 때 아닌 호황을 맞이했다. 수시모집의 비중은 앞으로 더 높아질 예정이고, 수학능력평가시험이 ‘패자부활전’ 같은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장차 내신을 위한 사교육 시장은 더 확대될 것이다.
셋째, 생활기록부 기재의 차별이다. 생활기록부의 작성은 교사의 업무이지만, 이에 대한 교사의 물리적 부담이 너무 크다. 이렇다보니 편법으로 생활기록부 초안을 학생들에게 작성하게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초안에서 성적 우수자(명문대에 갈 확률이 높은)들의 초안은 많은 수정과 첨삭이 가해지고, 대다수의 학생들의 생활기록부에는 학생들이 작성한 것이 그대로 올라간다. 부모의 경제적 여력이 있다면 자기소개서 컨설팅을 받아 초안을 제출한다. 학생들 스스로 작성한 생활기록부와 교사가 첨삭해준 생활기록부, 그리고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아 작성된 생활기록부는 차이가 난다. 당연히 자기소개서가 잘 작성된 쪽이 입시에서 유리하다.
넷째,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서열화와 학생 서열화를 인정해야 한다. 학생부종합전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신의 경우, 학교별로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가 없다.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 그리고 시골 고등학교의 내신 1등급을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별로 서열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비슷한 수준의 아이가 온다면 당연히 학교 수준이 높은 곳을 선발할 수밖에 없다. 보완장치로 내신의 평균값과 표준편차 등을 고려해서 더 면밀하게 계산한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 간의 서열이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개별 고등학교의 입장에서는 학생들을 명문대학에 많이 보내는 것이 경쟁력이기 때문에 당연히 성적이 높은 학생들에게 자원을 몰아주게 된다. 연수나 강연 기회가 발생하면 성적 우수자들이 우선적으로 기회를 얻는다. 해당 강연에 흥미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성적 우수자들에게 비교과활동이 집중되는 셈이다. 교내 대회에서도 상은 한정되어 있으니 당연히 기회가 성적 우수자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학교가 학생들의 잠재력을 평가하기 보다는 많은 학생들을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 학생부종합전형의 목적: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
지금까지 학생부종합전형의 문제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다. 학생부종합전형을 실시함으로 인해서 일반 고등학교에서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게다가 학교 내신이 중요시되다 보니 공교육의 정상화에도 기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대로 학생부종합전형은 부모의 가용 자원이 많을수록 유리한 입시제도이다. 이는 주요 대학별로 ‘금수저’들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는 것으로 입증되고 된다. 일부러 입시 명문고에서 중간 성적을 차지하는 아이들을 일반고로 보내서 내신 1등급을 얻고, 각종 스펙을 쌓아 명문대학에 보내는 것이다.
공교육의 정상화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이는 수능에만 투자하던 학생들의 노력을 내신에도 쏟게 한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교육기본법에서 주장하는 전인적 교육이 아니라 대학입시에 유리하기 위해 학교 공부에 ‘집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부종합전형은 공정하고 평등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 우리 사회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얻어낸 결실이다. 하지만 일부의 장점보다는 혁파해야할 단점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대학입시제도가 좋은지 아닌지를 떠나서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어떤 제도가 좋은지 아닌지를 고민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 아닐까?
# 지금이야말로 교육 목적의 재정립을 시도해야 할 때다
프랑스의 입시제도 역시 우리나라에 지지 않을 만큼 높은 경쟁이 일어난다. 그런데 ‘바깔로레아’라는 입학시험은 학생들로 하여금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게 만든다. 이 시험은 학문적 지식과 함께 철학적 사고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를 평가한다. 상위권 대학인 그랑제꼴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SKY에 입학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프랑스 교육이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교육의 목적이 우리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다. 프랑스 학교 교육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민주적 소양을 갖춘 시민의 육성에 있다.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가 교육에 깊숙이 침투해서 공부하는 학생들 모두의 꿈을 ‘훌륭한 노동력’이 되게끔 만들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사회조사’를 보면,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으로 ‘좋은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부모들도 그렇다. 즉, 사회 전체가 학생들을 노동력으로 취급하고 ‘먹고 사는’ 문제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교육의 목적 자체가 노동력의 공급이다 보니, 모두가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설령, 우리나라의 입시제도가 프랑스의 바깔로레아와 같은 종류의 시험이 되더라도 교육의 목적이 그대로라면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여전히 사교육은 횡행할 것이고, 금수저들은 철학 과외를 받으면서 좋은 대학과 좋은 일자리를 독차지하고 살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많은 고민과 철학 공부를 통해 그들의 사고 체계가 좀 더 긍정적으로 변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을 강요하며 오로지 자신의 존재를 노동력으로만 규정짓는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이 될 것이다.
지금 시급한 것은 4차 산업혁명이니 창의적 인재니 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개념들은 모두 ‘산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어떤’ 인재를 길러내야 모든 분야에 적합할 수 있을까. 노동력의 양성을 위함이 아닌 전인적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교육기본법 제2조의 내용처럼, 우리는 실제로 이런 인재를 길러낼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