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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처럼 쏟아지는 사랑의 눈빛..
기획

폭포처럼 쏟아지는 사랑의 눈빛

장석규 수필가 기자 입력 2019/10/16 14:50 수정 2019.10.18 08:52
눈은 사랑의 나들목

“준마는 낙인으로 알고, 사랑에 빠진 젊은이는 눈빛으로 알지.”[*]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연진희 역, 민음사 권 1, 2016, 88쪽)

민음사 발행 '안나 카레니나' 표지
민음사 발행 '안나 카레니나' 표지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가 절친 레빈에게 “오, 자넨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오블론스키는 레빈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 말을 했습니다. 마침 레빈은 청혼하려고 시골에서 상경했으니, 레빈의 눈에는 친구가 보기에도 사랑에 들뜬 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던 모양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물론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의 절절한 사랑이 주류를 이룹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또 하나의 축을 형성하고 있는 레빈과 키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레빈은 자신과 브론스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키티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는 쓰라림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시 만나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 완성합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머리글자로 대화를 나눕니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도 외계어 같은 말로 대화를 하는 경향이 있지만, 레빈과 키티는 벌써 이런 방법으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그 예를 한번 볼까요.

당, 그, 없, 내, 대, 그, 영, 그, 거, 뜻, 아, 그, 그, 뜻”(당신이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을 때, 그것은 영원히 그럴 거라는 뜻)

그, 난, 그, 대, 수, 없.”(그때 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럼 지금은요?”하고 레빈이 묻자 키티는 대답한다.

당, 지, 일, 잊, 용.”(당신이 지난날의 일을 잊고 용서해 주기를)

레빈이 그 말 뜻을 알아차리고 백묵으로 길게 문장을 쓴다.

“내게는 잊고 용서할 것이 없습니다. 난 줄곧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키티는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그를 쳐다보았다. “알겠어요.”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긴 문장을 썼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녀는 그에게 자기의 생각이 맞느냐고 묻지도 않고 백묵을 집어 들더니 곧바로 대답을 썼다.

그는 한참 동안 그녀가 쓴 것을 이해할 수 없어 몇 번이고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는 행복으로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는 그녀가 생각한 말을 도저히 알아맞힐 수 없었다. 그러나 행복으로 빛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 속에서, 그는 자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그는 세 글자를 썼다. 하지만 그의 손을 따라 글자를 읽어 나가던 그녀는 그가 글자를 미처 다 쓰기도 전에 그 뜻을 다 알아차리고는 ‘네’라는 대답을 썼다. (중략)

그들은 이 대화 속에서 모든 것을 말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 그녀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하겠다는 것, 내일 아침 그가 방문하겠다는 것.(민음사 권 2, 342~344쪽)

어떠신가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과, 그 긴장감 속에서 흐르는 사랑의 충만감이 느껴지나요? 레빈과 키티는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서로의 마음에 사랑이 꽉 차 설레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레빈이 키티의 집에 들어서는 극적인 장면 역시 그 못지않게 눈에서 쏟아지는 폭포 같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행복, 그의 생명, 그 자신, 아니 그 자신보다 더 좋은 것,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고 갈망해 왔던 것이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걷는다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는 오직 그녀의 맑고 진실한 눈동자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과 똑같은 사랑의 기쁨으로 두려운 빛을 띠었다. 그 눈동자는 사랑의 빛으로 그의 눈을 멀게 하며 점점 더 가까이에서 빛났다. 그녀는 그에게 바짝 붙어 섰다. 그녀는 두 손을 올려 그의 어깨 위에 얹었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녀는 두려움과 기쁨에 떨며 그에게 달려와 온몸을 맡겼다. 그는 그녀를 안고 그의 키스를 갈망하는 그녀의 입술을 댔다."(민음사 권 2, 355쪽)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는 답답함과 목마름이 사라지지 않는 데 비해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레빈과 키티의 사랑 이야기에서는 시원함을 느끼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두 사람 사이에도 만남과 헤어짐 같은 갈등이 있고, 그래서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갈등에서 빚어지는 위기를 잘 극복하며 사랑을 완성해 가는 데서 느끼는 정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눈은 사랑이 들어오고 나가는, 사랑의 나들목입니다. 레빈과 키티의 눈동자에서 발하는 사랑의 빛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사랑을 급 진전시킵니다.

진정한 사랑의 눈빛은 마르지 않습니다. 직진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회하거나 굴절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눈빛이 돌아가거나 굴절한다면 마음이 떠나는 것을 뜻합니다. 상대를 똑바로 보지 않으면 진실한 사랑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이 처음 들어올 때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사랑의 빛으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빛이 워낙 강렬하여 아예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하면 눈먼 장님이 된다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를 할 때 눈을 감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눈을 감는 것은 자기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감긴 눈으로 사랑의 감미를 즐깁니다. 눈으로 사랑이 들어오면 그 순간부터 상대를 한쪽 눈으로만 보는, 애꾸눈이 되고 맙니다. 서로 사랑을 지속하려면 눈을 뜨지 않아야 합니다. 일부러 눈을 감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눈이 떠지면, 의도적으로 눈을 뜨면 그때부터 상대의 단점이나 못난 점, 나쁜 점이 보이게 마련이니까요.

끝없는 사랑, 변함없는 사랑에 빠지고 싶으세요? 사랑의 위태 위태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지는 않으신 가요? 그렇다면 일부러 라도 눈을 감아보세요. 다시 사랑하는 마음이 들 겁니다. 장편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로 유명한 호메로스는 장님이었는데, “내 눈을 빼 보세요, 나는 당신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고 노래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상대의 겉모습은 가려지고 그 내면의 진정한 모습이 다가옵니다. 눈을 감으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답니다. 사랑이 식으면 눈에서 열기가 빠져나가면서 눈을 뜨게 만듭니다. 사랑을 하다가 눈을 뜬다는 건 사랑의 온도가 내려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상대의 눈을 보세요. 몇 도나 되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내 눈은 지금 몇 도나 되지요? 뜨거운 가요? 아니 앞으로도 변함없이 뜨거울 거지요? 눈을 꼭 감아보세요. 온도 유지가 기막히게 잘 될 겁니다. 

*오블론스키가 알렉산드로 푸슈킨의 <아나크레온으로부터>(1835)라는 시를 인용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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