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과 감독의 말을 묶어봤습니다.
“저 학벌도 좋고 글도 꽤 쓰거든요. 그런데요. 노무현 후보에겐 인간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어요. 그거 엄청난 거거든요. 그거 때문에 저 여기서 자원봉사 하고 있는 거라고 후보님께 말씀드렸어요.” - 유시민
“방을 하나만 잡아서 사내 셋이 같이 자면 안 되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그날 밤 펑펑 우셔요. 돈 때문에요. 돈 없이 정치하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하시면서 우셨어요.” - 서갑원
“부산에서 국회의원 떨어진 날 밤 술을 취할 정도로 드셨어요. '이제 정치 그만 할란다' 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다음 날부터 온라인에 올라오는 글들이 심상치 않은 거예요. '바보 노무현을 지지한다'는 글들이었죠. 노사모가 만들어지고 다시 해보자는 분위기가 생겼어요.” - 이광재
“'국민과의 대화'에서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저에 관한 질문이 들어왔어요. 그럴 경우엔 보통 제3자 화법을 써서 '주위 사람이 불법을 저질렀다면 엄단하겠다' 라고 말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대통령은 그렇게 안하셨어요. '그 사람은 제 동업자이자 동지입니다' 라고 하셨어요. 제가 검찰조사 받고 있는 상황이라 공격받을 게 뻔한데도요.” - 안희정
“제가 이 분을 잘 아는데 글을 절대로 짧게 쓰시는 분이 아니에요. 생각나는대로 길게 쓴 다음에 줄여나가시죠. 이 글(유서)이 단문인 것은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썼기 때문입니다.” - 문재인
“가방끈 컴플렉스 있지 않냐고 물어봤어요. 대통령이 부인을 못해요. 대통령은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 말하는 사람은 신뢰했어요. 그런데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견디지를 못했어요.” - 유시민
“외국 정상과 만찬에서 포도주로 건배를 하는데 본인 잔에는 술 대신 포도쥬스를 채우셨어요. 재임 중에 절대 술 취해서 잠을 자지 않으셨죠. 대통령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 조기숙
“제 결혼식날 변호사님이 직접 운전대를 잡으셨어요. 권양숙 여사와 앞자리에 나란히 앉으시더니 저와 제 신부를 뒤에 태우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구혼이고 자네는 신혼이니까 경주까지 제가 모실게요.'” - 노무현의 운전기사 노수현
“김광일, 이흥록, 문재인, 노무현 변호사는 요주의 감시 대상이었어요. 그중 노무현은 막무가내 악질로 소문이 자자했죠. 긴장하고 그를 만났는데 황석영 작가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광주 실상을 담은 책을 주더라고요. 뭐하는 거냐고 했더니 나중에 나를 잡아가더라도 일단 이 책 한 번 읽어보라는 거예요. 밤새 읽고 충격받아 잠을 못 잤습니다.” - 안기부 직원 이화춘
“촬영을 위해 봉하마을 노무현의 사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찍을 게 없었어요. 절반은 경비동이었고, 당신이 기거하시던 사적 공간은 고작 서너 평뿐이었어요. 그가 유서를 남긴 노트북이 있던 툇마루 같은 공간이 전부였습니다.” - 영화감독 이창재
“노무현은 혈연, 학연, 지연 등 우리 사회 연고주의로부터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 연고주의를 대체할 질서는 민주주의 시스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기능하고 또 그렇게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저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 안희정
“언젠가 노무현의 시대가 올 거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과연 그럴까, 내 생전에는 안 올 것 같아' 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뭐 늦게 오면 어때요?' 그랬더니 웃으시면서 그러시더라고요. '그래, 그런 시대가 온다면 내가 없어도 상관없지.'” - 유시민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남자가 주먹을 불끈 쥐자 커다란 박수가 쏟아진다. 이인제 대세론이라고 불렸던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선에 불이 붙는다. 지지율 2%의 군소후보였던 노무현은 제주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양강구도를 형성한다. 한국정치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던 노무현 열풍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았다. 영화감독이라면 한 번쯤 그를 주인공으로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그는 동서화합, 기득권 타파, 권위주의 파괴 등 한국사회 고질병에 온몸을 던져 저항한 정치인이었다. 평생 언더독이면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때에도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다가 끝내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인생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범주화한 신화 원형 속 영웅들의 삶의 궤적을 닮았는데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각성하고 필살기를 연마해 계속해서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해 가는 모습이 큰 울림을 준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는 절정기의 노무현을 그린다. 연거푸 선거에서 낙선한 뒤 새천년민주당 경선을 통해 마침내 전국구 스타로 우뚝 서는 과정은 노무현 인생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영화는 노무현이 당시 대세 후보인 이인제를 꺾고 승승장구하는 과정을 경쾌한 음악과 함께 박진감 넘치게 재현한다. 또 노무현의 곁에 있던 사람들 39명의 육성 인터뷰를 교차 편집해 서거 이후 그가 남긴 유산을 차분하게 돌아본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노제 사회를 맡았던 김제동은 최근 한 토크콘서트에서 그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로 “풍부한 이야기”를 꼽았다. 노무현의 인생엔 이야깃거리가 넘쳐나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은 노무현과의 일화를 술술 털어놓는데 하나같이 극적이다. 누군가는 애처롭게 웃고, 누군가는 환희에 차 울고, 또 누군가는 입술을 깨문다.
유시민은 자신이 자원봉사에 나선 것은 그의 인간미에 이끌렸기 때문이라고 털어놓고, 안희정은 검찰에서 수사받던 자신에게 동업자라는 호칭을 써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고백하며, 서갑원은 돈 때문에 정치하기 힘들다고 울먹이던 그를 회상한다. 노무현의 운전기사 노수현은 자신에게 깍듯이 인사하던 그에게 존경을 표하고, 연설문 비서관 강원국은 그에게 혼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홍보 비서관 조기숙은 퇴임 후 그가 좋아하던 술을 더 선물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변호사 시절 그를 감시하던 안기부 직원 이화춘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탄복했던 일화를 술회한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관심의 대상일 문재인은, 자신이 늘 품고 다닌다는 노무현의 유서를 카메라 앞에서 또박또박 낭독한다.
신화 속 영웅담의 공통점은 그들은 비록 평범하게 태어났지만 시대의 아픔을 누구보다 먼저 체감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대변자로서 불의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끌기 위해 나서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부름을 받고, 또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에 이끌 수 있다.
노무현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노무현이 나섰기 때문에 그가 돋보였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시절 한국인들은 노무현을 필요로 했던 것 아닐까. 연고주의, 색깔론 등 기득권이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벽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고 있었기에 마침 그 자리에서 묵묵히 도전해오던 노무현을 발견하고 선택한 것 아닐까. 민주당 경선 참여 당시 그의 존재감은 언론에서 기사 한 줄 제대로 써주지도 않을 만큼 미미했지만 그에게는 굴곡진 삶에서 우러나온 진정성과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변화를 갈망하던 이들은 그의 도전에 자신을 투영하며 노무현만큼이나 온몸을 바쳐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가 쓰러진지 벌써 8년이 지났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노무현이 있다.
그가 서거했을 때 그를 지지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그 사건을 계기로 각자의 노무현을 마음 속에 담게 됐을 것이다. 2009년 5월 23일 오전 비보를 접하던 순간을 다들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까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벽은 높았고 그의 꿈은 미완으로 남았다. 지난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의 부재를 절감했고, 그의 꿈을 재발견했으며, 그의 꿈이 곧 우리의 미래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당시 노무현의 이상을 현실화할 리더를 선택했다.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이 뿌린 씨앗이 자라 숲을 이룬 것이다. 각자의 마음에 품고 있던 노무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결과다. 영화 속에서 그와 영광과 좌절을 함께 한 유명인들 뿐만 아니라 당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자원봉사자, 팬클럽 노사모 회원들의 목소리를 비중 있게 다룬 것은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이창재 감독은 “노무현과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동안 그를 잘 몰랐었다고 털어놓을 때 영화를 만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감독 자신이 노무현이 서거하기 전엔 그를 좋아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소위 '노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이 말은 진심일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은 사라졌지만 그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를 더 잘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