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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의 세상읽기] 믿음교회와의 첫 만남..
오피니언

[조헌정의 세상읽기] 믿음교회와의 첫 만남

김영진 기자 입력 2017/06/26 22:46
▲ 조헌정 목사 믿음교회와의 첫 만남

6,7년 전 부산 예수살기 모임과 김영수목사님 책 출판기념식에서 몇 분을 뵙긴 하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오늘 예배를 통해 믿음교회 교우들과 처음 만납니다. 그간 여러분은 저를 향린교회에서 펼친 저의 하늘뜻펴기를 통해 저를 만나 왔고, 저 역시 간간히 들리는 소문으로 여러분을 만나왔습니다. 핸드폰과 SNS 시대에 우리가 직접 대화를 하려고 했다면 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마치 십대의 소녀소년들이 짝사랑을 하듯이 고백은 직접 하지 못한 채, 마음으로 애만 태운 채 몇 년을 살아오다 오늘 드디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앉았습니다.

전 김영수목사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나이는 저보다 두 해가 위입니다만, 제 기억에는 한국신학대학에는 2년 후배가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당시 저와 김영수목사님이 같이 한신대를 다니던 시기는 박정희유신독재가 가장 악랄하게 학원가를 침탈하던 시기였고, 동시에 한신대의 저항 역시 가장 치열했던 시기로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능했었습니다. 수업이 금지당하는 휴업령은 물론 폐교 직전의 휴교령까지 당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 학생수가 200명도 되지 않는 매우 작은 학교로서 교제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만, 또 이상하리만큼 김영수목사님과 저와의 개인적인 만남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기억나는 것은 몇 년 전 김목사님의 평전을 읽으면서 한신대를 다닐 때에 검은색으로 물들인 군복과 워카를 신고 다녔다는 얘기를 읽는 순간 제 기억 속에 아 그렇구나! 그런 학생이 한 명 캠퍼스를 힘차게 걸어 다니는 모습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넷상에 떠 있는 목사님에 대한 글을 읽어보니 제가 지금 걸어오고 있는 길을 이미 저보다 앞장서서 걸으셨고,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한 시대에서 제가 살아온 삶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예수의 길을 따라가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력으로만 본다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김영수목사님은 아무도 걷지 않았던 황무지에 길을 처음 내신 분이셨다면, 저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길, 곧 안병무선생님과 홍근수목사님 그리고 향린교인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그 길을 그저 따라간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굳이 김영수목사님과 저 자신을 비교한다면, 그건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난 그분의 신을 들고 그 뒤를 따라 걷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는 고백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러했기에 김목사님을 기억하고 있는 여러분은 어느 다른 교회와 달리 목사님이 이미 15년 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흩어지지 않고 소수의 신앙 공동체를 계속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수고에 대해 깊이 치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어떻게 해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 당시에는 모두 도망을 갔던 제자들이 다시금 돌아와 스승 예수를 기억하는 기도 모임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였기 때문이고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하느님 나라 건설에 대한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직접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 여러분의 신앙 경험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여러분 또한 김영수목사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러나 그분의 부활의 영과 함께 그분의 못 다한 일을 계속 이어 오고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의 생일: 성령강림절

오늘은 공교롭게도 교회의 생일인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믿음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1년 중 어느 날에 시작하였는지 잘 모르지만, 보통 교회가 첫 예배를 부활주일 혹은 성령강림주일에 드립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40일을 머물다 가십니다. 이 40일을 문자적으로 읽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믿음교회 교우들은 다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부활 예수께서 승천하십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모두 쳐다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공중으로 올라갈 수가 있나? 우리같은 세대에겐 이건 불가능한 일로 생각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거 별로 어려운 일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드론을 타고 한 사람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제 2,30년 후가 되면 자동차를 타고 다니듯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일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뉴스에 차량 충돌로 인해 몇 사람이 죽고 다쳤다는 얘기가 나오듯이 하늘을 날아다니던 사람들이 기기 고장으로 부딪히기도 하고 추락하였다는 뉴스도 나올 것입니다.

하여간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천사가 말합니다. ‘뭘 그리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느냐? 예수께서는 곧 다시 하늘의 새로운 명령을 받아 다시 이 땅에 내려올 것이다.’ 그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숫자가 대략 120명이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숫자 또한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다락방이란 그저 두서너 명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지. 120명이 한꺼번에 들어갈만한 다락방은 상상하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이는 유대민족을 대표하는 열둘이라는 숫자에 완전 혹은 꽉 차있음을 의미하는 10이 곱해진 숫자인 것입니다. 곧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숫자가 상징하는 것은 유대민족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하늘 신앙공동체의 상징적 숫자인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 열흘간을 기도하자 그때 성령이 각 사람 속에 강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날은 당시 오순절 혹은 칠칠절이라고 불리는 유대 명절이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모세의 영도 아래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 혹은 과월절로부터 50일째가 되는 날로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보리의 첫 수확을 야훼 하느님께 드렸던 감사의 절기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감사의 날인 오순절 절기가 우리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들에게는 예수 부활의 영이 임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성령강림절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흔히 성령강림 혹은 성령충만하면 우리는 방언을 떠올리고 방언 그러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언어로 말합니다. 물론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늘의 신비한 언어라고 말합니다. 바울선생은 자기도 하늘의 신비한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기보다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은 방언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말씀 전하는 전도자로 어떤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병을 낫게 하는 치유자로 어떤 사람은 봉사하는 사람으로.... ” 한마디로 성령 충만한 역사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언 또한 지금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로 얘기되지만, 처음 마가의 다락방에 내린 방언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이 모두 자기들의 언어로 이해하는 외국어였던 것입니다. 곧 마가의 다락방에 내린 방언의 역사란 소통 부족으로 다투고 미워하고 있었던 사람들과 민족들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고 그래서 화해하고 그래서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였던 인간 권력의 오만함으로 말미암은 바벨탑 심판으로 인해 흩어졌던 인간의 언어가 하나 되는 화해의 역사가 바로 첫 번 성령강림절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존립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그건 첫째, 소통하지 못하던 사람들을 서로 소통하게 함으로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화해의 역할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자로 오셨듯이 우리 또한 화해의 역할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사회의 약자 소수자들은 자기 얘기를 하지 못합니다. 저들을 대신해서 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교회의 첫 번째 역할입니다. 두 번째 마가의 다락방에 내린 성령의 역사는 단지 서로의 하고 싶은 말을 통역해주는 단순 통역자가 아니라, 예수의 삶이 압축되어 있는 복음으로 하나된 사건입니다. 복음 이는 문자적으로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고 예수의 삶을 말하는 단어이지만, 복음이라는 단어는 예수님 이전부터 존재했던 본래 는 신앙언어가 아닌 정치언어였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바로 희랍어로 유앙겔리온이라는 기쁜 소식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조금 있으면 전리품 곧 보화들이 나누어지고,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더 편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복음은 당시의 지배자 로마 시민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고, 다수의 노예들과 민중들에게는 오히려 정반대의 압박과 수치의 슬픈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

이에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이라는 단어를 로마황제의 정치군사적 패권 언어로부터 예수의 삶의 얘기로 만듦으로 복음을 회복해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가난하고 병든 다수의 민중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로마의 전쟁 승리의 복음에 대항하여 당시 로마의 군사적 지배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을 당해야 했던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살다 로마의 십자가 처형을 받아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유앙겔리온 곧 복음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로마황제가 말하는 복음은 지배자 소수에게만 해당이 되는 기쁨의 소식이었지만, 복음서 저자들이 말하는 복음은 당시의 피지배자인 대다수의 사람들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복음이 갖는 본래적 의미 곧 반패권주의, 반군사주의를 내포하는 사회정치 전복적인 언어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수교회 사람들은 복음주의운동, 혹은 순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반정치 혹은 탈정치적인 의미에서 복음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방언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변질시켰듯이 본래 복음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었던 민중의 정치저항성을 빼버린 변질이자 타락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주의운동이 아닌 반복음주의 운동이요, 순복음이 아닌 헛복음인 것입니다.

이천년 전 성령에 충만했던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난 공통적인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집안에 앉아 찬송을 부르며 철야하며 기도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길거리로 나갔습니다. 이는 지금의 노상전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냥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앙행동이었습니다. 우선 청중이 달랐습니다.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찾아온 외국의 순례자들도 있었지만, 저들 가운데는 예수를 처형하라고 외쳤던 군중들도 있었고, 신성모독과 군중소요죄로 예수를 고발했던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아니 그들 가운데는 예수를 못 박았던 로마 군병들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바로 스승 예수를 죽였던 그들 앞에 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죽였던 예수는 부활하셨고 그분이야 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는 목숨을 건 정치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갈릴리의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너무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고백은 결코 쉽지 않은 고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로마 황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의 예수, 나사렛의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로마 황제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종의 반역 행위와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면서 이러한 정치적 저항성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곧 니체와 칼막스가 비판했듯이 힘을 가진 자들의 부조리한 현실을 계속 유지하도록 하는 노예의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본래 초대교회가 갖고 있었던 정치적 저항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회복하고자 마틴 루터 신부가 5백년 전 당시의 최고의 정치권력기관이었던 로마교황청에 저항하는 정치혁명운동을 일으켰지만, 지금의 개신교는 또 다시 이 정치사회적인 저항성을 상실하고 숫자와 건물로서의 교회 성장 그리고 개인의 물질 축복과 천국이라는 타계적 구원신앙에 머물고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던 본래의 이름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개신교인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말할 때는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프로테스탄트가 아닌 노예 곧 슬레이브라는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는 성전을 허물어라 그리고 내가 사흘 만에 세우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라고 외치셨지만, 눌린 자들과 함께 거하는 부활 예수의 몸으로서의 현장 교회는 없어지고,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금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를 욕보이는 행위입니다. 예수는 당시 36년이 걸려 세운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조금 있으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심판의 예언은 얼마가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의 운명 또한 예수 당시의 상황처럼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전쟁광 미국의 군사적 세계 패권주의는 지난 70년동안 북을 적으로 몰아왔고, 우리가 예배드리는 지금 이 시간에 세 척의 미 핵항공모함이 북을 위협하기 위해 한반도 주위에 떠 있습니다. 물론 북이 가진 핵군사력으로 인해 전쟁은 억제되고 있지만, 오늘의 교회는 이런 전쟁의 현실에 대해 그저 손들고 기도하고 찬양하면 하느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라는 안일함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거짓이요 기만입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시대에 종교지도자들이 전쟁의 위협 속에서 평안을 외침으로 백성을 기만하였을 때, 예언자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곧, 이 땅에 정의를 먼저 실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곧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입으로는 회개를 외쳤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소수자들을 계속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에 일조를 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고 거기서 역사를 배우는 것은 오늘 이 시대 내가 서 있는 현장에 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남한교회는 본래 복음이 서 있어야 할 역사의 민중 현장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의 신앙 행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천년 전 예수께서 채찍을 들어 성전 숙청을 감행하신 이유는 단지 성전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것이 아니라, 바로 성전 안에 머물러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고 있는 잘못된 신앙을 숙청하신 것입니다. 민중의 아픔에 외면하는 교회는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고 김영수목사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민중 현장성을 회복하기 위해 믿음교회를 여러분과 함께 세웠던 것이고, 여러분은 그런 뜻을 이어가기 위해 미약하지만, 그러나 흔들림 없이 오늘까지 하나의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모습으로 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펼쳐나갈 미래의 청사진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오늘 2017년 성령강림절에 여러분 앞에 선 이유는 여러분에게 진 믿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서이지만, 진정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이천년 전 제자들에게 임한 하느님 나라 건설에 대한 비전과 꿈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열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보고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유다 동포와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시각이 아침 아홉 시인데 어떻게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는 나의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계시의 영상을 보며 꿈을 꾸며 예언을 하게 하는 성령의 은총이 이어지는 성찬의 예식 가운데 함께 하기를 바라며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자유-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다
피와 땀과 눈물을 함께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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