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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의 세상읽기] ‘625전쟁’이라고 불러서는 안 ..
오피니언

[조헌정의 세상읽기] ‘625전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

김영진 기자 입력 2017/06/25 20:59
 ▲ 조헌정 목사‘625전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

오늘은 6월 25일 67년 전 그날과 같은 일요일입니다. 저희들이 초등학교에서 배울 때는 625전쟁이라고 배웠습니다만, ‘상기하자 625!’ 올해 서울에서 열리는 행사도 ‘리멤버 625 평화’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역사에서는 코리아(한국)전쟁이라 부르지 625전쟁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북조선이 삼팔선 전체에 걸쳐 남침을 시작한 것은 맞지만, 6월 24일 밤에는 아무런 총성이 울리지 않다가 25일 새벽이 되자 갑자기 총성이 울리기 시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코리아전쟁의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하기 위해 당시의 정치역사적 상황을 잠깐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사실 이것도 해방이라고 부르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하여간 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난 그날 이후 남과 북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점령군으로 진주하였고 3년간의 군정 지배 후인 1948년 8월과 9월 남과 북에 각각의 분단정부가 수립되기까지는 비교적 38선 남북왕래가 허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각각에 독립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38선은 그냥 분단선이 아니라 하나의 국경선이 되었으며 철조망이 쳐지게 되었습니다. 수백 년을 함께 살아오던 한 마을 사람들 곧 가족과 친척들이 자신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한쪽은 자본주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또 하나는 사회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으로 각각 나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뉠 뿐만 아니라 적이 되었습니다. 서로는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았지만, 각각의 다른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원수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초기에는 철조망은 큰 도로에만 설치가 되었지, 대부분 지역은 어디가 38선인지 곧 국경선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과 북의 군인들 사이에 땅을 점령하기 위한 작은 전투들이 38선 곳곳에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양측의 도발이 계속되었고 야음을 틈타 기습전을 감행했습니다. 1948년 9월 이후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 약 1년 8개월동안 38선을 따라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무려 1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하루에 평균 200명이 좁은 국경선을 따라 총에 맞아 죽었다면 양측은 선전포고만 하지 않았을 따름이지 실제는 이미 전쟁 중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민간진영에서는 김구선생을 비롯하여 하나의 통일정부를 만들어내기 위해 꾸준히 남북대화를 시도하고 있었지만, 권력을 쥔 남북 정부는 겉으로는 대화를 말했지만, 속으로는 무력을 통한 통일을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합의를 통해 북에서 소련군은 철수를 했지만, 미군은 여전히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던 상태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남북간에 전면전이 일어나면 여기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되면 3차 전쟁으로 번져가기에 남북간에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압력을 넣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직접 원인

전쟁준비를 하던 상황인 1950년 1월 8일 미국의 국무장관인 애치슨은 기자회견에서 뜬금없는 돌발선언을 합니다. 코리아반도는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에서 제외된다고, 당시 한국이나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와 다름이 없었는데, 미국은 누군가 일본을 침략하면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겠지만,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은 소련과 중국이 태평양으로 세력이 전개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군사방어전략으로 갖고 있는데, 좁은 38선을 포기하고 더 넓은 동해바다를 방어선으로 한다는 것은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얘기이지요. 그런데 북조선이 이를 오판한 것입니다. 북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 때문에 전쟁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거야 말로 기회가 온 것이지요. 그래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을 연달아 만나 남한을 침공하여 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입니다. 스탈린은 거부했지만, 모택동은 동의를 하였습니다. 모택동으로서 거부하기 힘들었던 것이 자기도 그렇게 해서 장개석 세력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면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애치슨선언과는 정반대로 UN의 깃발 아래 단 3일 만에 전쟁에 개입하여 이후 3년에 걸쳐 전쟁을 하게 됩니다. 애초부터 북조선은 통일 욕망에 눈이 어두워져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고 있는 군산복합체로서의 산업시스템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미국 산업의 3분지 1은 모두 군수무기 생산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포드나 크라이슬러 우리는 자동차 회사로만 알고 있지만, 실은 이 회사들은 자동차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장갑차나 탱크도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미국은 2차대전에 참여하면서 모든 민간산업이 군수산업으로 전환이 되었던 것이고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바로 공장 문을 닫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대규모 실업자가 생겨 경제파탄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장은 계속 돌아갔고 무기창고가 넘치게 되었고, 무기 또한 유효날짜가 있기에 그 안에 이를 처분하지 않으면 이를 고철로 처분하는 것이 도리어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게 되기에 무기소비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북이 말려든 것입니다. 사실 코리아전쟁은 초기에는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일사천리로 밀고 들어왔지만, 미군이 개입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후퇴를 하여 압록강까지 밀려갔지만, 중공군이 참여함으로 1년도 되지 않아 전선은 처음 전쟁이 시작했던 38선 근처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서로 개입을 한 이상 이게 승산이 없는 전쟁이고 서로가 망하는 길이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맥아더는 당시 트럼프대통령에게 중국에 핵폭탄을 사용하자는 제안을 하였지만,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하기에는 너무 무리였던 것입니다. 결국 휴전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실제 협정 서명을 하기까지는 2년이나 걸립니다. 별 것도 아닌 협정조문을 갖고 2년이나 걸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상에서의 전투는 미군 또한 피해가 너무 크니까 지상전은 그저 대포나 쏘아대고 주로 공중 폭격을 하였습니다. 남한은 1년이 지나 전쟁 복구를 시작하였지만, 북한은 매일같이 미국 폭격기 수백 대가 날아와서 무차별 폭격을 하였던 것입니다.

김낙중선생의 십자가 평화 행동

당시 평양은 건물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1평방미터 안에 평균 3발의 포탄이 떨어졌고, 한국전쟁 3년동안 미군이 북쪽에 퍼부은 폭탄의 양은 2차 세계대전에서 쌍방이 유럽 전체에 사용된 양보다 더 많았습니다. 한 다큐멘타리 필림에 보면 평양을 폭격하러간 미군 폭격기 조종사가 ‘There is no more target, roger’라는 보고를 지휘통제소에 알립니다. 87세로 향린교회 교우이자 남과 북 양쪽으로부터 간첩이 되어 다섯 번의 사형을 선고받았던 김낙중선생님이 1955년 25세의 나이에 자신이 스스로 만든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들고 아무 생각없이 혼자 에어메트레스에 몸을 실고 임진강을 건너 지뢰밭 휴전선을 건너가는데 그분이 지뢰를 밟지 않은 것은 하늘이 감동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생께서는 당시의 생각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 나는 일요일 아침엔 새문안 교회를 갔다가 2시에는 조계사에 가고, 4시에는 YMCA에서 하는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장자 강의를 들었다. 무엇이 참된 삶의 의미일까를 물었다. 그 와중에 6.25가 터진 것이다. 나는 인민군 치하에서 의용군에 나가서 국군을 죽이기를 요청받았고, 9.28 수복 후 국군 치하에서 나는 다시 국군에 나가서 인민군 죽이기를 요청받았다. 그러나 내가 왜 의용군에 나가서 국군에 나간 중학교 동창들을 죽여야 되는지? 또 나는 왜 내가 국군에 나가서 의용군으로 나간 고향 국민학교 동창 친구들을 죽여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우리가 왜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 거다. 그러면서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쟁이 일단락된 직후 1954년 모두가 북진 통일을 외칠 때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적을 둔 청년 김낙중은 혼자서 평화를 외칩니다. 마치 세상이 어둡다고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녔던 고대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마냥 "'탐루(探淚, 눈물을 찾는다)'라는 말이 쓰인 등불을 들고 광복동 거리를 돌아다니며 혼자 평화시위를 합니다. 삭발을 하고 소복을 입고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제 전쟁 그만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느냐. 도대체 눈물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없느냐. (통일을) 평화적으로 하자는 사람이 없느냐'고 외쳤습니다.“

“눈물의 의미를 아는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얼마나 아프길래, 얼마나 슬프길래?' 하고 그 눈물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얼'이다. 사람의 얼이 병들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너나 할 것 없이 얼이 병들어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부산경찰서에서 등불시위를 하던 청년 김낙중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평화적 통일을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뚜렷한 대안이 없었습니다. 그래 그 길로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뒤져가며 1년이 걸려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만듭니다. 그것의 핵심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젊은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면 그냥 따로 살면서 교류하고 평화적으로 살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거다. 일본과 미국이 과거에는 서로 싸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지금은 두 국가가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평화롭게 산다. 독일과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코리아는 한번 싸운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지금도 으르렁거리며 타도를 주장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이제껏 서로 죽이라고 강요를 당했는데 그럴 게 아니라 공존을 통해 같이 살 수 있고 통합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주장이었습니다.

1955년 봄에 정식으로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이승만대통령이 있는 경무대에 제출합니다. 헌법에 있는 청원의 권리로 청원서로 보냈던 것입니다. 일주일 만에 치안국에 붙들려가 취조를 당합니다. 타도해야 할 북이랑 같이 살자고 하는 것을 보니 "너 빨갱이가 아니냐?"라고 합니다. 선생께서는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한 적도 없고, 사적소유를 없애자고 주장한 적도 없다. 다만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면 따로 살면서, 자식들한테만은 서로 죽이라고 가르치지 말고 같이 살길을 만들어 가자고 이야기한 것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여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보냅니다.

그래 정신병원에서 나온 직후 이를 갖고 북으로 갔던 것인데 거기서 또 다시 간첩으로 붙잡혀서 1년을 삽니다. 감옥에서는 옆방에 박헌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휴전선에서 붙잡혀서 평양으로 가면서 보니까 철로 변 주위에 온통 커다란 웅덩이들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군폭격으로 인해 철로를 복구하기 위해 논의 흙을 옮겨왔기에 생긴 웅덩이들이었습니다.

적개심이 만들어 놓은 오늘의 상황들

그러니 사실 우리로서는 북조선이 전쟁 직후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알지를 못합니다. 남한 정부에서는 그런 사진들을 전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고 반면 북은 이런 사진들을 전시하여 반미를 교육합니다. 30년 전인 1997년 제가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봉수교회 근처의 한 아파트를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는데,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럴싸하게 보였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계단 바닥이 울퉁불퉁한 것입니다. 작업도구가 없어 손바닥으로 시멘트작업을 하였음이 분명했습니다. 요즘 가끔 시리아의 도시들이 완전히 폐허가 된 사진을 가끔 보게 되는데, 만약 여러분이 북의 주민이었다면 미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의 부모나 형제가 미국 폭격기에 의해 무차별 살해당했다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요?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슬람국가 사이에는 엄청난 불신과 적개심이 있다는 걸 잘 아실 것입니다. 지금 유럽 곳곳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아니 사람들이 얼마나 악마화가 되었으면 몰이나 런던의 다리나 파리 시내에서 무고한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두 민족은 태어날 때부터 상대를 미워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신이 명령하는 정의를 행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대로부터 주변 국가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에집트인 애굽제국늘의 시리아인 앗시리아제국 오늘의 이란인 바벨론제국, 오늘의 이라크인 페르샤제국. 오늘의 그리스인 알렉산더제국, 오늘의 이태리인 로마제국. 이들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성전이 파괴당하는 고통을 당합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조상들이 당한 고난을 잊지 말라고 교육을 받습니다. 남녀가 결혼식을 하면 식 마지막 순서에서 사기그릇을 신랑이 발로 밟는 예식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결혼이란 한번 깨어지면 회복하기가 힘들다는 의미도 있지만, 본래는 예루살렘 성전 함락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반면 이슬람 국가들은 어떠할까요? 제가 오래 전에 요르단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성을 갔는데, 거기 안내원이 천 년 전 십자군 전쟁 때 유럽인들이 와서 저지른 살육과 폭행을 마치 전날 밤에 일어난 것처럼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아랍인들 마음 속에 숨어 있는 기독교와 백인들을 향한 깊은 적개심을 보았습니다. 천년동안의 적개심 그 위에 이차세계대전 후 유럽 백인들은 중동을 자기들 편한대로 잣대로 그어 여러 나라로 쪼개었고, 그리곤 같은 이슬람 국가 간에 싸움을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미국은 석유 전쟁이라 불리는 이라크, 리비아침략은 물론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오늘날의 시리안 전쟁을 통해 자신에게 맞서는 세력들을 끊임없이 제거하여 왔습니다. 결국 그로 말미암아 천년이상 평화롭게 공존하던 시아파와 수니파가 이제 목숨을 걸고 서로 싸우게 되었고, 시리아는 물론 남예멘과 북예멘 거기에 지금은 카타르와 주변 사우디를 비롯한 여러 국가 간에 암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국제테러의 대명사로 변한 IS(이슬람국가) 본래는 미 CIA가 키워낸 반군세력입니다. 하여간 지금은 이런 일들로 인해 기독교 백인들을 향한 이슬람 사람들의 적개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열 명의 파수꾼이 한 명의 도둑을 막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유럽이나 미국은 이제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의 대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루에도 수십 대의 드론무인폭격기가 중동의 하늘을 떠다니며 사람을 죽이는데, 희생자들 반 이상이 무고한 시민들입니다. 이 드론폭격기를 조종하는 곳은 중동이 아니 미국의 네바다 공군기지입니다. 젊은 군인들이 tv 모니터를 보면서 마치 컴퓨터 게임하듯이 버튼을 눌러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명령에 의해 목표물이 발견되면 스위츠만 누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게 인간의 모습인가요?

이제 한반도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이때의 전쟁은 떼죽음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야만인답게 사드무기를 어수선한 박근혜정권 말기에 살그머니 도입을 하고 일본에서는 아홉 번이나 했던 환경영향조사와 주민설명회를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은 채 거의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고 있으며, 여기에 대해 무기 값까지 내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사기꾼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지금은 미국대학생 윔비어의 죽음으로 인해 북미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지만, 외신을 보면 이 윔비어가 단순 대학생이 아닙니다. 15개월 전 평양을 방문했던 그룹은 영국의 한 경제학과 대학생 그룹인데, 이들이 북조선을 간 이유가 단순 여행을 보이지 않습니다. 윔비어부모님은 경제력도 별로 없는 사람인데, 그는 무슨 돈으로 영국에 유학을 갔을 뿐더러 최소 이천 불 이상의 평양행 경비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북조선 여행은 아무나 가는 여행이 아닙니다. 그것도 미국 정부가 여행 금지를 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평양을 갔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그는 북을 다녀오고 나서 홍콩의 한 대학에 입학하기로 되어 있었다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경비는 다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요? 제가 읽은 외신에 의하면 그는 이스라엘과 영국 그리고 미정보부가 후원하는 여행으로 그는 북한경제를 조사하는 훈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저도 두 번이나 머문 경험이 있습니다만, 양각도 호텔에서 일반 숙박객은 접근 할 수 없는 직원전용의 복도에 걸려있는 당선전판을 떼어 가지려고 했다는데, 이게 단순히 호기심 많은 한 젊은이의 외도였을까요?

그런데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워싱톤포스트지에서도 이미 언급을 하였는데, 그는 평양을 들어가기 전날 북경에서 너무 머리가 아파 여행을 포기하려 했다는 사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고등학교 레슬링선수로 이미 머리에 심한 손상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동료 레슬링 팀 주장은 (머리 손상으로 인해) 자살을 했다는 사실 또한 하나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과 마찬가지로 윔비어 사건 또한 북의 고문으로 인한 단순 죽음의 사건이 아니라 국제정보 공작정치의 사건입니다. (참조: www.4thmedia.org/…/warmbier-case-linked-with-anti-russian-…/)

하여간 문재인정부 출발 이후 남북관계가 호전될 것이라는 관망이 많았지만, 이래저래 남북대화는 물론 북미간의 대화 또한 한동안은 악화된 상태로 갈 것 같습니다. 바라기는 이번 주 문재인대통령이 트럼프를 만나 촛불 민중에 힘입어 코리아의 평화 정착을 위한 획기적인 결과를 유출해 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따르미들의 과제

오늘 625를 맞아 한국전쟁의 배경과 오늘의 코리아반도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언급하였습니다만, 성서의 말씀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레미야는 일명 눈물의 예언자로 다가오는 조국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이를 피하기 위해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수많은 예언의 말씀을 쏟아놓는데, 저들은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몰아세우고 핍박을 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실천은 물론 이해조차도 쉽지 않는 말씀이 오늘 마태복음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자기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우리가 알아 듣기 쉽게 누가 이를 설명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신가요?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나라와 민족을 위한 대의(大義)와 자신의 삶과 가정을 위한 소의(小義)가 충돌하는 경우는 자주 일어납니다. 신앙에도 하느님 나라를 위한 큰 뜻이 있는가 하면 자기 교회 혹은 가정을 위한 욕망 사이에 충돌은 자주 일어납니다.

물론,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잘못일 수 있지만, 자신의 개인 영달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한 삶을 위해 큰 뜻을 펼치면서 살아가라는 뜻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오늘 한국전쟁 67돌을 맞아 지금 한반도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그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기에 우리가 애써 쌓아 놓은 모든 세상 성공들, 아파트와 차와 지위와 자식들 또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것만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할 일이 많지만,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록 예레미야와 같이 놀림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김낙중선생님과 같이 남과 북 양쪽 정부로부터 5번의 사형언도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평화를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 참석하신 예수 따르미들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가 열려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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