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이규진기자] 서울대는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이자 ‘전태일 평전’ 저자인 고(故) 조영래 변호사 등 5명을 올해의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했다고 7일 밝혔다. 조 변호사는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차별받고 불이익을 당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한 점을 인정받았다.“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에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 <근로기준법>을 화형에 처하며 전태일은 외쳤다. 그것은 결코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전태일은 1964년 봄, 16살 때부터 ‘시다’로서 평화시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어 ‘미싱보조’가 되고 ‘미싱사’가 되었다. 자기 자신이 어려운 가정환경, 작업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보다 약한 노동자들을 돌봤다. 버스비를 털어서 점심을 굶고 일하는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걸어서 집에 갔다. 1967년 2월 24일 재단사가 되었다. 그는 재단사가 되면 어린 여공들을 도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렇지만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낮에는 재단사 친구들을 모아 ‘바보회’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밤에는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다. 1969년 여름 전태일은 평화시장 업주들에게 ‘위험분자’로 찍혀서 해고당했다. 그는 굴하지 않고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조사하여 각계에 진정을 내기도 했다. 평화시장에서 쫓겨나 삼각산에서 막노동을 하던 1970년 8월 9일 전태일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나는 돌아가야 한다./꼭 돌아가야 한다./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여기서 그가 “돌아가겠다”고 한 것은 ‘목숨을 걸고 돌아감’을 뜻했다. 그것은 타협 없는 투쟁, 한 인간의 모든 것을 거는 단호한 투쟁을 의미했다.
동양인 최초로 미국철학회 회장을 지낸 김재권(83) 브라운대 철학과 명예교수와 세계적인 임학자이자 육종학자로 1950년대 한국 임학계의 초석을 마련한 고 현신규 명예교수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이 됐다. 아울러 세계보건기구(WTO) 서태평양 30개국의 직접선거로 당선된 신영수(74) WTO 서태평양지역본부 사무처장과 현대음악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 상’을 수상한 진은숙(56) 작곡가도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조영래 변호사
서울대는 지난 1991년부터 인격과 덕망을 겸비하고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동문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하고 있다. 전태일평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이었다.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시작된 1991년 개정판에서야 비로소 저자와 주인공의 이름을 밝힐 수 있었다. 생전에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을 거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마저 존경을 담아 애도를 표했다. 특별히 보수 논객 조갑제는 조영래 변호사를 '법을 아는 전태일'이라는 유명한 말로 압축해서 평했다. "우리의 조영래는 억울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되었다. 그가 바로 '법을 아는 전태일'이었다." -124쪽
조영래 변호사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사법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굵직한 사건들을 맡았던 인권변호사다. 힘없고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었던 그는 지금도 법대생이나 법조인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항상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이 책은 조영래가 변호했던 굵직한 네 건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망원동 수재 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상봉동 진폐증 사건으로 알려진 법정 공방들이다. 이 사건들은 온갖 차별과 악습이 만연했던 우리 사회가 변화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 판결 결과 오늘날 우리 국민 모두는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빚진 자의 마음으로 그 사건들을 짧게 살펴보면 이렇다. 그런데 정작 저자인 조영래 변호사는 개정판이 나오기 전인 1990년에 죽었다. 그는 1974년도 민청학련 사건 이후 수배상태에서 수삼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 책을 썼다. 고 조영래는 “전태일의 죽음은 바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삶의 의지의 폭발”이라고 정리했다. 전태일의 거룩한 죽음이 있었어도,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이 없었다면 전태일의 행동과 사상이 그토록 또렷하게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조영래로 말미암아 전태일은 지금 여기서 여전히 청춘이다. 이와 관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12일 페이스북에 “오늘 12월 12일은 전두환 노태우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날이기도 하지만 인권변호사 조영래의 26주기이기도 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문 대통령은 “불의한 세력이 국민을 잠깐 이길 수는 있지만 역사는 국민과 함께 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독재정권에겐 무서운 적이었지만 약자와 노동자에겐 듬직한 친구였던 조영래 선배, 국민이 승리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보고 계시죠? 그립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고 조영래 변호사는 19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설립해 인권 변호사로서 큰 활약을 한 인물이다. 1990년 12월 12일 44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