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 얼마나 권력인가 하면 때때로 그것은 계급의 위계마저 전복시킨다. 성권력이 계급권력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고도 섬뜩하게 보여준 김기덕 감독의 2001년도 영화 ‘나쁜 남자’를 나는 잊지 못한다. 화사하게 아름다웠던 중산층의 여대생이 사창가 깡패 두목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환하게 웃어주었더라면, 그녀는 끌려가 창녀가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까. 상층계급 여성으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멸시당한 하층계급 남자의 좌절이 슬프면서도, 성을 권력으로 뚜렷이 인지하고 있는 남성의 무의식을 마주하는 일은 공포스러웠다.
계급과 성의 권력 갈등은 유구하다. 스웨덴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의 희곡 ‘줄리 아가씨’가 하인과 결혼한 자유분방한 귀족 아가씨를 통해 성이라는 메커니즘이 어떻게 여성을 남성에게 복속시키는지를 보여준 게 1888년이다. 아가씨의 간택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하인은 성이라는 제도를 통해 아내를 지배하고 억압하고 급기야 자살로 몰아넣는다. 이런 일은 허구에서나 일어나는 것일까? 사병이 여군 대위가 자고 있는 텐트를 찢고 들어가 성추행하자 놀라고 분개한 여군 대위가 사병을 가혹하게 구타한 사건이 2003년도에 있었다. ‘일베’로 대표되는 최신의 여성혐오를 보라. 계층이동의 가능성이 사실상 박탈된 사회에서 성과 계급이 어떻게 갈등하는지, 극단적 에피소드들이 생생하게 시전된다.
이달 초 시작된 헌법재판소의 위헌소송 공개변론으로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다양한 층위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사안에 대해 결론을 낼 주제도 능력도 못 되지만, 성 차별 타파라는 역사적 진보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성은 제기하고 싶다. 성은 오랜 역사를 통해 힘의 역학에 따라 작동하는 속성을 지니게 된 바, 성이라는 상품은 앞으로도 주로 여성에게서 출시되고 판매될 것이다. 성을 구매하고, 조달하고, 유통할 수 있는 힘이 대체로 남성에게만 있는 이 지독히 차별적인 제도에 성매매 여성은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가담할 수 있을까. 서기 2015년에도 ‘보도방’이라는 가공할 용어가 언론 보도의 헤드라인에 사용되는 나라에서 성매매 여성은 차별 받거나 학대 받지 않고 안전하게 성이라는 상품을 팔 수 있을까.
어린 아이와 병든 아버지의 부양책임이 있는, 사춘기부터 성매매를 해와 그것 말고는 생계를 도모할 길이 막막한 25세 여성이 경찰의 함정단속을 피하려다 투신자살한 사건이 지난해 있었다. 눈앞의 손님이 위장한 경찰임을 알게 된 여성은 옷 좀 갈아입고 나가겠다고 요청한 후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이 이야기를 하면 자꾸 울먹이게 된다. 배운 것 없고 쇠약한 여성은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는 옳은가. 국가는 왜 복지라는 형태로 이 여성의 환란에 개입하지 않는가. 생계는 언제나 준엄하다. 그런데 이 준엄한 생계의 대책으로 성은 왜 여성에게만 이토록 유력한가.
여성 차별을 막아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성매매 여성을 그 범주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양가집 규수의 정조는 홍등가 여자가 지켜준다’는 역겨운 속담이 버젓이 인용되기도 한다. 성은 개인 간의 합의에 따라 자유롭게 거래되는 상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불평등한 성 시장의 구조 안에서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만큼이나 허황한, 신기루 같은 믿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