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뉴스프리존] 강창원 기자=산 높고 물 맑은 고장 함양은 아름다운 대자연과 어우러진 누정樓亭에서 지혜와 풍류를 음미했던 선인들의 향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함양군 백전면 평정리 135-3번지에 위치한 벽송정碧松亭은 진주강씨 송정松亭 강문필姜文弼이 심신수양 하면서 시음詩吟를 즐기던 곳으로 함곡관 구릉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1879년 후손들이 선조를 추모하여 건립한 벽송정의 북쪽 바위에는 ‘송정松亭 강선생姜先生 장구소杖屨所’라 새겨두었고 위천渭川의 높다란 절벽위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소담한 팔작집을 남겼다.
정자의 대들보에는 벽송정 편액과 1879년 당시 햠양군수였던 오성묵吳成默의 기문記文을 비롯해 하재구河在九, 송병선宋秉璿이 남긴 기문記文도 남아 있다. 또한 송병선宋秉璿의 시운詩韻과 후손 강달조姜達祚, 후학 문진상文鎭尙이 남긴 시문詩文도 편액으로 걸려 있다.
아래에는 햠양군수 오성묵吳成默의 기문과 후손 강달조姜達祚, 후학 문진상文鎭尙의 편액에 담긴 원문과 해석문을 옮겼다.
碧松亭記
文章之顯晦蓋緣氣數而然也 有顯於當時 而晦於後世者 有晦於當時而顯於後世者 寧晦於當時必顯於後世者 乃佳已秦漢諸人言語工矣 文字麗矣 幷與鳥獸 草木同歸 於澌盡腐壞 歐文忠之所 以發歎者也 惟本郡故處士松亭姜公則不 然嘗師事玉溪盧先生 又遊於林葛川之門遭遇 宣廟晟際 宜其飛騰之不暇 而功名焉 鮎魚之竹竿命途焉 磨蝎之身 宮位不獲一命才 未展千
里 其對殿前詩 有曰九入蓮池蓮未實 三登桂殿 桂無花蹉跎未 遂平生志 白首功名 統五家雖 蒙聖朝之歎賞 終未見用於時 是以懷其實弢 其光身退嵁巖到老 無怨尤棲 止山厓水 澨占一區 逍遙之地 手植諸松 自號松亭公之固 窮安命有如是矣 其後歷三百有餘年 公之雲仍三四章甫 日巡舊址 不禁愴慕 而泣曰 藐不肖疲於負薪 吾先祖杖屨之所 日就灌莽何 以稱人遂殫力 而構小亭 翼然如偃蓋之松 遠近觀者 謂諸賢貧 而好禮 南鄕多士 咸知松亭之 爲松亭斯非 晦當時 而顯後者乎 姜生遠祚 袖先蹟詣 余請記 余莅玆三載 朝暮與士民 接輒詢 溪山名蹟 僉曰姜松亭 舊遊處 在治西一舍地所 謂函谷關者是矣 第欲往觀之今 於姜生之來懇也 嘉其能世 其家記以 贈之 若夫煙雲泉石之勝 山水登臨之樂 公退之暇 與邑中諸名碩 把酒而賦之尙 未晩也
聖上三十四年丁酉季春上澣
知郡 吳成默 謹識
벽송정기
문장이 나타나고 숨겨지는 것은 대개 화복의 운수로 인해서인 것 같나니라.
그 당시에 나타나고 뒤에 숨겨지는 이도 있고 그 당시는 숨겨져 있어도 뒤에 나타나는 사람도 있으니 차라리 그 당시에는 숨겨져 있어도 반드시 뒤에 나타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일이니라. 이미 진한秦漢의 모든 사람들은 언어가 공교하고 문자가 고우니라. 아울러 새와 짐승과 더불어 초목草木으로 돌아가서 이에 다 흙덩이로 썩으니 구문충공歐文忠公의 탄식을 발하는 바이라. 오직 본국의 옛 처사 송정강공松亭姜公은 곧 그러하지 아니하고 일찍 옥계玉溪 노盧선생을 스승으로 섬기고 또 임갈천林葛川 선생의 문하에 놀았으며 선조宣祖의 성을 다스릴 적에 마땅히 그 비등飛騰 하는 틈이 없이 공명하였고 메기는 낚싯대에 생명을 걸었느니라. 갈고 닦은 몸 선조 임금의 한 명령을 얻지 못하며 겨우 천리길을 펴지 못하고 그 전하 앞에 대한 시가 있어 이르기를 『아홉 여덟 연못의 연실은 보배가 아니오. 세 번이나 과거에 올랐으나 과거는 빛이 없으니 때를 놓치고 발버둥치며 평생의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흰 머리의 공명으로 우리집을 통솔할 것』이라고 하였다. 비록 성조의 어려운 상을 입었으나 세상에 쓰임을 보지 못하고 이로써 그 보배는 품었으나 그 빛을 잃었으니 몸은 평탄하지 못하고 늙음에 이르러 죽지 않고 물가 수너리대순이 즐비한 한 구역에 거닐 수 있는 곳을 점거하여 깃들면서 손수 여러 소나무를 심고 스스로 호를 송정松亭이라 하였다. 진실로 품부된 명을 편안하게 다함이 이 같음이니라. 그여년 뒤에 공의 후손 서너명이 옛터를 날마다 찾아서 슬프고 사모함을 금할길이 없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께서 의지하신 곳으로 어찌 사람들이 일컬어서 힘을 다하여 작은 정자를 지으니 날개를 편 듯 구부리듯 소나무가 덮었으니 원근에서 보는 이들이 이르기를 어진분들은 탐하여도 예를 좋아하였음은 남쪽 고을의 명사들은 모두 다 송정옹이 송정을 짖게 됨을 알았던 것이고 당시에는 숨겨졌으되 후세에 밝혀졌음이 아님이니라. 강생원조姜生遠祚는 선인의 유적을 싸들고 나에게 찾아와 기문을 청하므로 내가 부임한지 이제 3년이다. 아침 저녁 고을 백성들과 더불어 계산의 아름다운 자취를 살피고 물어보니 모두 말하기를 강송정姜松亭께서 옛날 노닐던 곳은 고을 서쪽 하루 걷는 거리의 지점이니 이른바 함곡관函谷關이 옳다하니라. 가보고 싶다면 이제 강선생께서 오신 정성의 그 견딤이 아름답고 그 집을 대 이음했기에 기문으로써 주게 되니 만약 연운煙雲과 천석泉石이 뛰어나고 산수와 오르게 되는 즐거움을 공이 물러간 여가에 고을 안의 여러 이름있는 분들과 술마시고 글 지음이 오히려 늦지 아니하니라.
성상 삼십사년 정유 늦은 봄 상순에 군수 오성묵 삼가 짓다.
桂三蓮九豈爲恨 세 번 벼슬 연실蓮實 아홉에 어찌 한恨이 되리요
雪裡孤松勝實花 눈 속에 외로운 솔 열매 꽃보다 훌륭하네.
溪月淸風亭上到 시냇가 달 밝은 바람 정자亭子위에 이르니
願將貞節永承家 원컨대 곧은 절개 길이 가문家門을 이으리라.
성상 삼십사년 정유 봄에 불초구세손 달조達祚 삼가 지음.
追慕先生卓異行 선생의 남보다 뛰어난 행위를 추모追慕하오니
亭松猶勝桂蓮花 정자의 소나무는 오히려 계수와 연꽃보다 훌륭하도다.
賢仍繼述傳來業 어진 자손子孫 전해오는 업業을 이어서
鄒魯吾鄕自統家 추로鄒魯의 우리 고을 스스로 가문을 통솔統率하도다.
강성후학江城後學 문진상文鎭尙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