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없고, 잇몸도 없고
뽑을 만한 후보가 없다.”
대통령 선거이건, 국회의원 선거이건, 지방자치 선거이건 선거철만 닥치면 언론을 필두로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공통된 푸념이다. 을지문덕 장군과 세종대왕이 차례로 환생해 대선에서 격돌한다고 하여도 이와 같은 해묵은 하소연은 변함없이 나왔으리라. 정치가 문제의 해법이 아닌 원인이 돼버린 현상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하루 이틀 일이 아닌 탓이다.
유권자들이 뽑아주고 싶은 출마자가 부재한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돼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선거제도에 기초한 대의민주주의를 지난 70여 년 동안 결과적으로 그럭저럭 유지ㆍ운영해왔다.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지 않은가?
비결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건자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주장한 맥락의 시민사회가 정치의 무능과 부패가 초래한 공백과 허점을 비교적 성공적이고 효율적으로 메워왔다는 데 있다. 유권자들이 뽑아줄 만한 후보자는 없었어도 믿을 만한 언론인이 있었고, 믿을 만한 종교인이 있었고, 믿을 만한 학자들이 있었고, 믿을 만한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있었다. 속담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틴다”고 했다. 불신당하는 여의도 정치를 대신해 신뢰받는 시민사회가 힘없고 가난한, 좌절하고 분노한 남한의 평범한 인민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관철시키고 대변해왔다.
그런데 이빨이 부실한 판국에 잇몸에마저 이상이 생겨나면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른바 조국 사태를 겪으며 현재의 청년세대의 눈높이에서 평가할 때 한국사회에는 존경하고 믿을 만한 언론인과 종교인과 지식인과 문화예술인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사실상 씨가 마르게 되었다. 정치에 뒤이어 시민사회도 총체적 기능부전 상태에 빠진 셈이다.
조국 사태 이전에는 시민사회의 공간과 영역에서 민중의 혐오와 불신은 전적으로 보수세력의 몫이었다. 조국 사태 이후 국민들이 “믿고 거르는” 의심스러운 대상에서는 진보진영도 더는 예외가 아니게 되었다.
조선일보의 강점은 막강한 발행부수였다. 한겨레신문의 강점은 독자들의 두터운 신뢰였다. 지금은 한겨레신문에 몸담은 기자와 논설위원들도 조선일보에 소속된 기자와 논설위원들만큼 믿지 못할 부류가 되었다. 어디 한겨레신문뿐이랴? 참여연대는 전경련 못잖게 불신을 받는다. 보통의 서민들에게 민변은 김&장 뺨치는 불의하고 음습한 전관예우의 산실로 통한다. 영세자영업자들의 원망과 아우성을 산다는 측면에서 민주노총은 가맹점들을 상대로 수시로 갑질을 일삼는 유수의 프랜차이즈 브랜드 기업들과 난형난제 형국이다.
바보야, 문제는 사람이야
사회는 제도와 인간의 조합으로 탄생하고 운용되기 마련이다. 현대 한국은 왕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책과 제도를 정신없이 현란하게 시험해본 정치사회적 실험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보수우파 정권이 개발제한구역를 지정하고 고교평준화를 시행했다. 소련과 중국과의 대사급 외교관계도 수립했다. 반대로, 진보좌파가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시기에 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되고,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건설을 비롯한 대규모 토건공사가 국책으로 무분별하게 추진됐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은 이 무렵 체결되었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제도만 바꿨을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참사는 정치의 품질을 높이고 이념의 다양성을 증진할 것으로 기대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섣부르고 무리한 맹목적 실시에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해당 선거제도가 거대 양당의 독점체제를 도리어 강화시키고, 함량 미달의 부도덕한 전국구 국회의원들을 양산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국가와 시민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과감하고 대대적인 인적 쇄신과 교체 없이는 어느 당의 어느 대선주자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대한민국으로 불리는 국가공동체는 이명박 정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돼 박근혜 정권을 거쳐 문재인 정권에서도 착실(?)하게 이어지는 중인 쇠퇴와 몰락의 비극적 운명을 좀처럼 피해갈 수 없을 수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패와 퇴행의 책임은 그간 한국사회를 주도해온 무리에게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를 쥐락펴락해온 집단이 그들 가운데 몇몇은 벌써 환갑진갑을 지나 60대 나이에 접어든 586 세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국민들은 586들에게 충분한 기회와 권력을 차고도 넘치게 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기회와 권력을 누려본 특정 세대는 단군 이래 처음일 게 분명하다. 기록적인 장기집권 과정에서 586 세력은 단군 이래 가장 위선적이고 파렴치하며, 동시에 탐욕스럽고 부도덕한 세대로 타락했다. 586과 ‘내로남불’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근본적 까닭이다.
586 세대는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회고록을 쓴 엽기적으로 조로한 인간들이다. 그들의 역할과 효용은 끝나도 진즉에 끝났다. 586 세대는 젊었던 시절의 화려했지만 짧았던 민주화 투쟁 경력을 영악하게 발판 삼아 자기들이 만끽한 기득권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이제는 바야흐로 자식들에게 대대손손 부와 권력을 물려주려 시도한다. 2030 청년 세대에게 조국 사태의 본질이 ‘검찰 개혁’이 아닌 ‘세습 타파’로 받아들여진 저간의 배경이다.
586은 해먹어도 너무 오래, 너무 많이 해먹었다. 따라서 그 반작용으로 세대교체의 범위와 속도는 미증유로 폭넓고 신속해야만 한다. 실상 정치권의 586은 586 권력의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몸통은 학계, 노동계, 법조계, 언론계, 종교계, 문화예술계 등에 똬리를 틀고 앉아 철밥통 기득권을 악착같이 부여잡고 있는 시민사회 분야의 586들이다. 그들의 동반 퇴장 없는 일부 586 정치인들만의 2선 퇴진은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마땅히 변해야만 할 때 변화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맞이할 불청객은 파국과 종말이다. 미중패권 시대라는 세계질서의 대변혁과, 4차 산업혁명의 뉴노멀이 일시에 한반도로 밀려오고 있다. 산업화 세대가 이룩한 압축적 근대화의 아류일 ‘압축적 꼰대화’를 달성한 586 세대의 전면적 청산 없이는 그 어떤 것 하나 효과적으로 응전하기 불가능한 거칠고 강력한 도전들이다.
586 세대는 우리 시대의 자산이 아니다. 부채 중에서도 악성 부채이다. 청년세대의 미래를 잔인하게 망가뜨리고 있는 기득권 586 세대의 청산은 더 이상은 잠시도 미룰 수 없는 필연적 과제로 대두했다. 어정쩡한 청산은 아예 착수하지 아니함만 못하다. 구태 꼰대의 대명사로 전락해 역사 발전의 장애물 노릇만 하고 있는 586 세대의 청산은 국가와 시민사회 전부에서 고루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그릇만 대충 설거지하고 각종 세균과 곰팡이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싱크대는 닦지 않는다면 진정한 주방 대청소라고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글쓴이는 정치웹진 '서프라이즈' 초대편집장,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이준석이 나갑니다> 공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