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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연재] 20대 大選 “조선을 살찌웠던 세종의 知行合一..
기획

[특집연재] 20대 大選 “조선을 살찌웠던 세종의 知行合一 리더십”(제3회) 

頂上一 칼럼니스트 기자 rram0607@naver.com 입력 2021/11/13 21:35 수정 2021.11.28 12:54
세종대왕 최고의 리더십 덕목은 애민정신  
훈민정음 최대업적 풀뿌리 민주주의 초석
‘醫書 ‧農書 ‧세법 ‧법전’등 정비 각고노력 
4군6진 구축 쓰시마정벌 자주국방의 토대 

● 國內外 정세를 꿰뚫었던 혜안의 왕

한국의 제20대 대통령이 선거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21세기 글로벌 대웅비를 위해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지도자를 대망해야 한다. 한국조선시대 초기 國內外 정세를 꿰뚫었던 혜안의 왕으로서 널리 칭송되고 새로이 조명되는 세종의 진면목을 조명하는 지면을 소개한다.

‘성군’ ‘대왕’이라는 극존칭의 대명사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은 조선의 역대 왕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지금껏 지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길이 남을 귀감과 모범의 왕으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세종의 위대한 창조적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 초석을 다진 시기였다. 세종의 시대는 집현전을 통해 수많은 인재를 길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겨레 문화 제고의 주춧돌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다방면에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는바, 상상을 초월하는 자산을 남긴 세종의 위대함은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 實事求是 知行合一의 표본 세종!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호학(好學)의 군주이다. 세종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머물지 않았다. 역사‧법학‧천문‧음악‧의학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구축했다. 경서(經書)는 100번씩 탐독했다. 역사서와 기타 다른 책들은 필히 30번씩 숙지하였다 한다.

세종은 단순히 다독(多讀)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을 정리하고 비교하는 능력까지 겸비했다. 그 내용과 이치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진전된 성찰을 학자들에게 촉구하였다. 

선현의 지혜를 신뢰했던 세종은 우선 유학의 경전과 사서를 규합하여 실용적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부 사항까지 규정해나갔다. 작은 법규 하나조차 그 제도의 역사를 면밀히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그 단점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및 현실적 상황까지 고려했다. 

세종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 문자로 평가되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1446년에 반포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들을 시켜서 읽기 쉽고 배우기 쉬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세종은 중국과 우리나라 말이 서로 다름으로 인해 백성들이 힘겨워하는 모습에 애통하면서 중국 글자인 한자를 대체하여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우리 문자 제정에 깊이 고민했다. 그리하여 집현전을 통해 길러 낸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최항, 이개 등 패기만만한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43년 훈민정음을 만들고, 1446년 세상에 널리 알렸다.

하나의 감동적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하여 본다. 세종 28년(48세)은 한글이 반포된 해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2년 전 세종 26년 2월 20일에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하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등은 언문제작의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만들어서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夷狄)과 같아지려 하는가? 등등 조목조목 사유를 들어 격렬히 반대하는 상소를 읽은 세종대왕은 진노하여 소리쳤다. “너희가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이 한마디는 이들을 침묵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 조선의 ‘獨自的 음악’을 태동 

세종은 25년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모든 음 체계의 바탕이 되는 기본율관(음관)을 제정하고, 앙상블에 필요한 미비된 악기들을 새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를 첫 창안하였다.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을 세종대왕이 친히 작곡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관습도감은 1393년(태조 2년)에 설치되어 1457년(세조 3년) 악학(樂學)과 병합될 때까지 60여 년간 봉상시(奉常寺), 전악서(典樂署), 아악서(雅樂署) 및 악학(樂學) 등 예조 산하의 다른 음악기관과 함께 주로 음악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의 대부분 음악과 악기는 중국 일색이었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악기와 음악의 정비에 착수했다. 폐물로 전락한 가야금, 거문고, 해금 등 모든 악기를 수리하여 재정비를 하였지만 석경(石磬)만은 복원할 수가 없었다. 악기의 일종인 ‘석경’은 큰 ‘기역자’처럼 생긴 하얀 돌을 크기순으로 열두 개를 매달아놓고 막대기로 치면 소리가 난다. 이를 다시 구할 수  없어 복원이 난망했다. 

세종은 음악가 박연(朴堧)을 호출하여 이렇게 명한다. “그대가 목숨을 버려서라도 찾으라.” 음률의 대가인 박연은 국악을 정비하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었다. 그는 몇 해에 걸쳐 전국의 산천을 누빈 끝에 마침내 이를 찾아냈다.

조선의 고유 악기가 모두 복원되었지만 이번에는 악보가 없었다. 악사들이 이 사실을 세종에게 고하자, 세종대왕은 친히 작곡한 악보를 하사한다. 지음(知音)을 터득한 군왕에 의해 조선의 음률이 완벽하게 복원되는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 과학기술의 ‘르네상스 시대’ 만개 

세종은 이천과 장영실에게 측우기를 제작하도록 하였으며 혼천의(渾天儀), 해시계, 물시계 등의 과학 기구도 발명하였다. 또한 활자 기술과 인쇄 기술을 발전시켰다.

혼천의는 고대 중국에서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장치로서 지평선을 나타내는 둥근 고리와 지평선에 직각으로 교차하는 자오선을 나타내는 둥근 고리 모양을 하고 있다. 하늘의 적도와 위도 따위를 나타내는 눈금이 달린 원형의 고리를 한데 짜 맞추어 만들었다.

세종은 당대의 과학자들인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 등을 불러 우리에게 적합한 일력(日曆:양력)과 월력(月曆:음력)을 정립시켰다.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의 완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 천문, 역법, 의상(儀象)등에 관한 지식을 체계화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이순지가 펴내도록 했다.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두철미 주도면밀하게 고증한 끝에 선보인 독창적 산물로서 당시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월등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 자주국방의 토대를 쌓다

세종의 외치(外治)에서 부각되는 것은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 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 관계에서는 처녀진헌(處女進獻, 여자를 바침)과 당나라에 보내던 금, 은의 조공물을 폐지하고 마, 포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과의 관계는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책을 교차하였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로 하여금 6진(六鎭)을 구축하면서 국토를 확장하였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 이천 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곳에 인구이주정책인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 잡힌 발전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세종 1년에는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소 사다모리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삼포(三浦)를 개항하였다. 

세종은 이민족의 정벌에만 힘쓴 것이 아니었다. 일명 무기의 현대화에 힘쓰면서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세종 당대에는 화포의 이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조선 특유의 형식으로 규격화하는 일이 진행되어 각종 총통을 대형총통에서부터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이라 부르고, 명나라 초의 소총통의 형식에 속하는 휴대용 화기를 승자총통이라 이름 지었다. 

특히 신기전(神機箭)은 고려 말 최무선이 제조한 주화(走火)를 세종 30년인 1448년에 개량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신기전기(神機箭機)는 지름 46 mm의 둥근 나무통 1백 개를 나무상자 속에 7층으로 쌓은 것으로 이 나무 구멍에 중·소신기전 1백 개를 꽂고 화차의 발사 각도를 조절한 후, 각 줄의 신기전 점화선을 모아 불을 붙이면 동시에 15발씩 차례로 1백발이 발사됐다 한다. 현대의 다연발 로켓포과 비견된다 할 수 있다. 

이로써 종래 중국식 화기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조선 특유의 형식과 규격을 갖춘 독자적 화기가 태동된다. 조선의 모든 화포는 ‘총통등록’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이것은 그 후 조선 후기에 간행된 ‘융원필비’(戎垣必備)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 ‘인재등용’ ‘풀뿌리 愛民사상’의 극치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는 현자가 가까이 있어야 한다. 세종대왕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등 어질고 능력 있는 신하를 무려 20여 년 이나 지근거리에 두었다. 

신기전(神機箭)은 고려 말 최무선이 제조한 주화(走火)를 세종 30년인 1448년에 개량한 것이다. 
신기전(神機箭)은 고려 말 최무선이 제조한 주화(走火)를 세종 30년인 1448년에 개량한 것이다. 

그런 세종대왕의 혜안이 변계량, 정인지, 김종서, 최항, 신숙주, 성삼문, 장영실 등 미래를 이끌어갈 능력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무한 잠재능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 못지않게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 은혜로운 왕이었다. 왕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극력 반대했지만, 세종은 위민(爲民) 정책을 무수히 펼쳤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恩典, 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특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들은 기한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하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하도록 했다. 

이전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으며 출산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세종은 백성들의 심성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였다. 문맹의 시절이었기에 한 쪽은 글자로 적었고, 다른 한 쪽은 그림을 그려 넣는 식으로 하였으니 이는 애민사상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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