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비용 증대해도 수급안정화 주력 지역화 각광
‘안보 통상정책’ 동일체, 범부처 체제정비 서둘러야
● 세계는 ‘글로벌 공급망’ 후폭풍
2021년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지난 2월 행정명령으로 반도체·전기차 배터리·의약품·희토류 4개 핵심 전략산업의 ‘공급망 위험’에 대한 대책 마련을 지시한 후, 세계 경제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는 공급망 재편이었다.
이에 따라 6월 8일 백악관은 상무부, 국방부, 에너지부 등 관계 부처의 보고를 받아 미국 ‘공급망 100일 검토 보고서’를 종합 발표했다. 해당 보고서는 4대 핵심산업의 미국 공급망의 취약점을 밝히는 한편, 부처별 정책 권고를 포괄적으로 제시했다.
미국은 국제적 연대와 협력의 후속조치로 EU와는 2021년 9월 10개 분야 작업반을 망라한 ‘무역·기술협의회’를 공식 출범했고, 일본과도 정상회담을 계기로 기술통상협의체를 마련했다.
2021년 11월 17일,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하기우다 고이치’ 일본 경제산업상은 도쿄에서 열린 회담에서 ‘미일 통상 협력 틀’(US-Japan Partnership on Trade) 설치를 전격 합의했다.
이런 일련의 광범위한 대응조치의 직접적 배경은 2020년 코로나19 유행 초기 마스크와 같은 개인보호장비(PPE) 공급 부족과 최근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미국 사회 및 경제가 받은 타격이다. 본질적 측면에서는 바이든 행정부는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정책을 무역적자보다 기술 경쟁력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 안보를 통상정책의 핵심 사안으로 우선순위로 뒤바꾸어 놓았다.
● 코로나19 ‘글로벌 공급망’ 직격탄
생산기술 혁신과 설비 확대로 과잉 공급을 우려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현재 세계 각국은 ‘포스트 코로나’ 혹은 ‘위드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며 경제회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년여에 걸쳐 억눌려온 다양한 소비욕구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글로벌 수급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폭발적 수요에 따른 반도체 공급 부족의 자동차·전자산업의 생산차질에 이어, 에너지·전력 부족에 따른 중국 생산시스템 마비는 이내 전 세계 중간재 공급망을 교란시키는 후폭풍을 불러왔다. 코로나19의 다양한 변종 바이러스 확산과 함께 ‘록다운’(Lockdown) 즉, 봉쇄가 반복되면서 공급망 회복이 지체되고 있고, 세계 물류체계에서 심각한 인력난이 공급망 악화를 연쇄 파생시키고 있다.
최근 언론에서 ‘글로벌 사슬’(GVC)과 ‘글로벌 공급망’(GSC)이 동시에 회자된다. 먼저, 미국의 경제학자 마이클 포터가 만든 용어로 ‘가치사슬’을 지칭하는 ‘밸류 체인’(Value Chain)은 2개국 이상이 참여해 소재에서 최종 완성품까지 제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기업 이윤 창출의 주 활동,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회계, 정보기술(IT), 인적자원(HR) 등의 활동을 모두 총괄한 것이다. 과거 기업의 경영혁신 목표는 기업 내부 자원 및 업무 프로세스의 통합을 통한 밸류체인(value chain)의 혁신활동에 초점이 맞춰졌다.
GVC는 철저히 생산비용적 측면과 시장 수요를 목표로 공급망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지난 20~30년간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효율성을 추구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예기치 않은 코로나19로 세계시장이 GVC의 문제점에 직면했고, 효율성에 입각한 것이 최상의 시스템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다.
한편, 공급망을 의미하는 ‘공급사슬’(Supply Chain)은 물적인 흐름에 중점을 둔 용어다. 코로나19 이전 다수 기업들은 고정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중복 소싱’(redundancy in sourcing)을 최소화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전략은 기업들의 효율성을 높인 반면 공급망 변화 탄력성을 감소시켰으며, 2020년 감염병 확산에 따른 공급망 위기상황에서 신속히 대응할 수 없어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가치사슬’(value chain)이 제품 생산에 있어서 공정별로 누가 얼마만큼의 부가가치를 가져가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공급사슬’(supply chain)은 제품이 차질 없이 생산되어 소비자에게까지 제때 원하는 만큼 공급이 되는지 제품 생산의 전체적 흐름에 초점이 맞춰진다.
글로벌 불확실성과 비즈니스 복잡성이 높아지면서 ‘글로벌 공급망’ 경영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가속화된 글로벌 경쟁 환경으로 인하여 미래 기업에 있어 ‘가치사슬 경쟁’보다 ‘공급사슬 간 경쟁’이 전략적 우위를 선점하게 된다.
단적인 사례로 코로나19로 자동차 업계가 공급 측면에 충격을 받았다. 과거 완성차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신흥시장에 진출해 부품 조달을 해왔고,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기존에 겪어보지 못한 ‘록다운’을 경험하면서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극심한 엇박자를 내고 있다.
● 미중관계 악화 ‘구조적 요인’
미·중 패권경쟁을 포함한 다양한 지정학적 갈등구조가 악화되기 이전 세계 경제는 ‘글로벌 공급망’(GSC) 보다는 ‘글로벌 가치사슬’(GVC)에 주목했었다. 특히 미국은 그간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미국은 끊임없이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해 왔으며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 설계 및 개발에 특화하고 부가가치가 낮은 제조를 등한시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 시절부터 본격화된 미·중 무역갈등 및 패권경쟁이 지역안보 불안으로까지 확산되고, 미국과 중국이 다자간 자유무역체제를 마비시킨 결과, 코로나 사태 전부터 공급망의 붕괴 위험은 증대되고 있었다.
‘가치사슬’에서는 고단계로 상승할수록 경제적으로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지만, 공급망은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이 아닌 안정화가 목적이기에, 이는 경제적 비효율성을 동반한다. 이젠, 미국은 지정학적 위험부담이 커져 국제거래 비용이 높아진다 해도 합리적인 기업전략은 생산 및 공급망의 ‘세계화’가 아니라 ‘지역화’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이제 미국은 다국적기업들에게 본국으로 복귀하는 ‘리쇼어링’(reshoring) 전략을 강제하고 있는 국면에 이르렀다.
우리 대한민국이 미·중 패권 전쟁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공급망 재편을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기 위해선 선제적 대응이 중요하다. 밸류체인의 상위 영역에 있는 분야에서 기술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핵심이다. 소재와 부품, 장비 등 취약 산업을 키울 전략을 촘촘히 짜야 한다.
또한 글로벌 물류 의존도를 줄이는 근거리 아웃소싱 ‘니어쇼어링’(nearshoring)과 주요 부품의 직접 생산도 고려해야 한다. 이는 해외에 나가 있는 자국기업들을 본국으로 이전하는 ‘리쇼어링’(reshoring)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인접 국가로부터 아웃소싱하는 개념이다. 최근 글로벌 기업의 탈중국 추세가 늘면서, 우리 한국도 ‘리쇼어링’ 대신 동남아 등지로 ‘니어쇼어링’ 하는 사례가 증가 추세다.
● ‘한국의 대응전략’ 우선 순위
최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주도하는 미국은 반도체 분야의 높은 중국 의존도를 심각한 국가안보 위협으로 규정해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2021년 10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로마에서 열린 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한국·일본·영국 등 15개 동맹국과 따로 만나 글로벌 공급망 문제를 논의했다.
2021년 6월 4일, 미국 백악관은 반도체 등 4대 품목의 공급망 점검 보고서를 발표하고 미국 내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최우선 순위로 삼았다. R&D와 국내 생산설비 구축을 지원책을 제시했고, 미 의회 역시 52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제조 인센티브 법안’과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법’을 추진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미국 반도체 업계를 대표하는 ‘반도체산업협회’(SIA)는 반도체 제조·설계 및 연구 분야를 망라한 미국 반도체 기업 98%가 속한 단체로, ‘불확실한 시대에 맞선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강화’ 등의 보고서를 통해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꾀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이 각국 반도체 기업을 상대로 주요 정보를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반도체 생산시설이 중국과 가까운 한국 대만에 쏠려 있는 데 따른 위기감의 표현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 등 신흥국 경제의 내수 비중 확대,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으로 전반적인 ‘글로벌 가치사슬’(GVC)의 약화와 함께 다양한 구조적 변화가 관찰되었다. 중장기적으로 위기 대응력 제고를 위해 공급망 다각화 및 본국 회귀를 통한 리스크 분산, 기업 간 협력 위기관리능력 강화 측면에서 GVC의 변화가 확연해지고 있다.
최근 미국의 컨설팅 기업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공급망 탄력성을 보유한 기업이 외부 요인에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1995년부터 2020년까지 약 1,800개 미국 기업의 성과를 연구한 결과 공급망 탄력성은 기업들의 ‘주주총수익률’(TSR)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TSR은 주주에 대한 가치 창출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로, 일정 기간 동안 한 기업의 주가 변동과 배당 수익률을 측정한 수치다. 안정적인 시장 상황에서 상위 75%와 하위 25% 탄력성을 보유한 기업 간의 TSR 차이는 16%였던 반면, 위기상황에서 이들의 차이는 30%까지 높아졌다. 이는 위기상황에서 기업들의 탄력성이 수익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전체 공급사슬 간 경쟁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차별화된 공급사슬 관리의 분석을 위한 ‘환경(environment), 역량(capability), 성과(performance)’ 등의 요소가 엄격하게 리모델링되어야 한다. 이런 토대 하에, 글로벌 공급망 탄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급‧제조‧유통’ 네트워크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업체에 대한 정보를 다각도로 확보하고 특히 물류 공급업체 및 유통채널 등과의 포괄적인 협력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기업들은 무역정책 변화, 금융시장과 같은 외부 위험지표를 모니터링하여 공급망 위험성을 앞서 파악해야 한다.
우리나라 수출산업 공급망의 특정 국가 의존도가 높은 점을 감안할 때, ‘글로벌 공급망’(GSC) 다변화를 통한 위험 분산과 함께 핵심 소재·부품의 국산화를 위한 R&D 지원 등을 통해 국내적으로 수직계열화하는 공급망 관리전략을 유연하게 서둘러야 한다.
기술과 예산등 가용자산을 총동원할 수 있는 EU·일본·대만·한국은 모두 자체적인 공급망 강화 전략을 천명하고 대규모 투자 확대에 돌입했다. 산업정책과 과학기술정책, 안보정책과 통상정책이 전방위적으로 융합되는 시점에서 우리의 산·관 협력 체계와 통상전략 개편이 시급한 시점이 이미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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