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
조선의 제21대 왕으로서 숙종(肅宗) 20년인 1694년 출생하여 1776년 83세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영조(英祖)는 무려 52년을 통치하면서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재위 기간(52년, 1725∼1776)이 가장 긴 왕이 되었다.
영조는 1699년(숙종 25년) 6세 때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지고,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왕의 동생을 세자로 책봉하는 경우, 그 동생을 ‘왕세제’(王世弟)라 부른다. 조선에서는 두 번의 왕세제가 있었는데, 정종 때 세제로 책봉된 태종 이방원과 경종(景宗) 때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던 영조이다.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과열된 당파 경쟁을 제어하였으며, 조선의 그 어느 왕보다도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펼쳐 조선 시대 소수의 성군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평가받는다. 영조와 그의 세손인 정조 두 임금의 시대를 보통 조선후기 중흥기라 부른다.
탕평책 펼쳐 ‘왕권안정 민생정치’
영조의 탕평책은 오늘날 현대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지역성이 배제된 불편부당한 인사정책이다. 영조는 노론의 도움에 힘입어 즉위하지만 살육전이 난무하는 정쟁의 폐해를 몸소 겪은 터라,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 안정 도모를 위해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는 방편을 거듭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산물이 탕평책(蕩平策)이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인 격인 노론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관계로 경종 재임 시의 ‘신축(辛丑) 임인(壬寅)’ 옥사(獄事)에서 치명타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관직에서 내쫓았다.
또한 노론 중에서 소론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과격론자들을 제거하고 국왕이 명실상부하게 정국을 주도하여야 요 ·순의 시대처럼 구현될 수 있다는 왕정관을 명백히 표시하면서 이에 순응하는 자들 위주의 정책이 바로 탕평책이라 할 수 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핵심을 불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작업을 진두지휘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1728년의 무신란(戊申亂, 혹은 李麟佐의 亂)을 겪고 나서이다. 영조의 탕평책이 안정 추세에 접어들자 당색을 초월해 재능이 있는 자들을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으로 바뀌어갔다.
이제 숙종, 경종, 영조 자신에게로 연결되는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노론은 물론 소론과 민초로부터 공인 받은 영조는 종전의 노·소론 사이의 탕평에서 탈피하여 노·소론은 물론 남·북인(北人)까지 함께 참여시키는 대탕평을 표방하고,탕평비에는 “남과 두루 친하되 편당을 가르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요, 편당만 짓고 남과 두루 친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배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라고 새겨져 있다.
탕평비에는 “남과 두루 친하되 편당을 가르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요, 편당만 짓고 남과 두루 친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배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라고 새겨져 있다.
부국강병 ‘경제와 국방’에서 대업
영조는 52년이라는 장기간 왕위에 있었고 또 비범한 정치력을 소유한데다 탕평책으로 인해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의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괄목할 치적을 쌓았다.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각종 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1750년 7월 ‘균역법’(均役法) 실시이다. 이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역의 불균형에 따른 일반 백성들의 군역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양역(良役)은 조선시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역역(力役, 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던 수취 제도) 징발과 재정확보를 위해 원칙적으로 16세 이상 60세까지의 양인(良人) 또는 양민(良民)의 남자 즉, 양정(良丁)에게 부과하던 각종 신역(身役, 나라에서 성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군역과 부역)의 통칭이다.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균역법의 시행은 물론 천인들에게도 공사천법(公私賤法)을 마련하였다. 1730년에 양처소생은 모두 양인이 되게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역, 여자는 모역에 따르게 하여 양역을 늘리는 방편을 마련하였다.
1774년 노비신공(奴婢身貢, 노비가 국가나 주인에게 신역을 바치지 않는 대신에 부담하는 물품)을 전면 혁파한 것도 획기적 조치로 평가되었다.
1729년에는 궁전 및 둔전(屯田,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한 토지)에도 정액 초과분에 대해서는 과세하였다. 한편 오가작통법(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어 조세를 합리적으로 부과하는 법)을 엄수하게 하여 탈세방지에 힘썼다.
1748년에는 세입 ·세출 제도의 확립을 목적으로 ‘탁지정례(度支定例)’를 편찬하기 이른다.
영조는 자주국방 강화 차원에서 구축과 무기개량에도 그 힘을 쏟았다. 1730년 수어청(守禦廳)에 명하여 조총(鳥銃)을 만들게 하여 군기(軍器)의 수급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는가 하면, 1742년에 ‘병장도설(兵將圖說)’을 편찬한 이래, 5군영의 병권을 병조판서 아래로 일원화하여 왕권수호의 첨병이 되도록 하는 체제를 꾀하였다.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을 개축, 이듬해 완성하였다.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변란이 발발하면 도성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도성민과 함께 수성한다는 신전략을 세워 1745년에 훈련도감 ·금위영·어영청 등 3군문이 도성을 분담하게 하고, 1751년 9월에 수성윤음(守城綸音)을 내려 도성의 5부 방민(坊民, 행정구역 단위인 방 안에서 사는 백성을 이르던 말)이 유사시를 대비하여 삼군문 지휘 아래 실전 훈련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대대적 수리사업! ‘법치주의 근간’ 확립
영조의 치적으로 대대적 수리사업(水利事業)을 들 수 있다. 영조의 삼대 치적으로는 탕평 ·균역 외에 준천(濬川), 즉 청계천(淸溪川)을 준설한 것이 꼽힌다. 도성 가운데를 흐르는 개천을 오랫동안 방치하여 홍수 때 범람이 잦아 1760년에 준천사(濬川司)를 설립하여 준설의 대사역을 진행시켰다. 1773년 6월에는 개천의 양변을 돌로 쌓아 흙이 내려가지 않도록 하여 홍수에 만전을 기하였다.
영조는 농업정책의 개선에도 업적을 남겼다. 1734년에 농정의 기본골격을 잡기 위해 ‘농가집성’(農家集成)을 대량 인쇄하여 보급하였다. 1763년에는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입수함으로써 기근 시에 구황식량을 수급하는 데 획기적 일익을 담당하였다.
영조 22년인 1746년, 시대적 변화상을 반영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법령 중에서 시행할 법령만을 추려서 편찬한 통일 법전이 바로 ‘속대전’(續大典)이다. 또한 잔인한 형벌제도를 고치고, 양반들이 사적으로 백성들을 징계하는 것을 금하였다.
1725년 영조는 압슬형(壓膝刑, 꿇어앉은 죄인의 무릎 위에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고 고통을 가중시키는 형벌)을 폐지하고,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三覆法, 사형수에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함)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하였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1732년에는 낙형(烙刑, 화형의 일종으로 단근질하는 형벌)을 각각 폐지하였다.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 재위 25년 이후 50여 회나 궁성을 나와 거리 행차를 하였으며, 1773년에는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고하도록 하는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를 부활시켜 경희궁 건명문(建明門)에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서얼차대(庶孼差待, 첩의 자식 및 그 자손을 배려하던 일)로 사회참여 불균등의 불만 해소 방편으로 서자도 관리로 등용시키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학문과 문화의 ‘최대 부흥기’
영조 시대 들어 학문과 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한다. 왕이 중심이 되는 탕평의 왕도정치를 펼치려면 임금이 신하들보다 월등해야 한다고 생각한 영조는 공부와 강론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인쇄술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 필요한 것은 널리 반포시켜 일반 백성들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영조는 조선왕조 임금 중 경연(經筵, 임금이 신하들과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공부하는 자리)을 가장 부지런히 한 임금이다. 재위 52년간 무려 3,458회를 열었다.
1732년에는 이황(李滉)의 학문세계인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을, 여성을 위한 ‘여사서’(女四書)를 언역(諺譯)하여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다. 1749년에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리들의 필독서로 ‘무원록’(無寃錄)을 각 도에 반포하였다.
영조는 학문적으로 특히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1758년에 성균관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대학’에 ‘어제서’(御製序)를 붙였다. 또한 ‘경세문답’(警世問答, 1762), ‘경세편’(警世編, 1764), ‘백행록’(百行錄, 1765) 등 후세 왕들을 위해 등불을 밝히는 저술들을 다수 남겼다.
1740년에는 개성부 행차 때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선죽교에 비석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역사의 충신들에 대한 추존사업을 크게 벌였으며 1771년 10월에는 왕조의 시조묘가 없는 사실을 깨닫고 전주 경기전에 조경묘(肇慶廟)를 건립하게 했다.
영조 본인이 학문을 숭상하였기에, 새로운 학풍을 진작시켜 실학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실학(實學)이 확대되면서 실학자들의 서적 역시 편찬·간행하도록 했는데, 1765년 북학파 홍대용(洪大容)의 ‘연행록’(燕行錄)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이 간행되었다.
1757년∼1765년에 전국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은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발간하였다. 1770년에는 조선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만들어 상고(上古)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총망라하여 분류 정리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골간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