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이규진 기자] 5일, 이재용(50) 삼성전자 부회장이 항소심에서 징역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고 석방된 것과 관련해 청와대 청원이 이뤄지는 등 후폭풍이 거세다. 지난 1심에서 ‘전형적인 정경유착’이라며 징역 5년이 선고된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을 두고 대다수 여론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날 서울고법 형사 13부 정형식 부장판사는 이 부회장의 혐의에 대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강요에 따른 피해자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에겐 ‘경영권 승계 현안’과 ‘부정청탁’이 없었고, 단순히 박 전 대통령과 최 씨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뇌물에 해당한다고 인지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승마지원 부분을 제외한 다른 뇌물공여 혐의가 모두 무죄라고 본 것이다. 더구나 가장 형량이 높았던 재산국외도피 혐의 역시 ‘범죄 의도’가 없었고, 송금 장소가 독일일 뿐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가 쟁점이 되었던 ‘경영권 승계 현안’과 ‘묵시적 청탁’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부회장이 받고 있는 5가지 혐의 가운데 핵심인 뇌물공여 혐의가 인정되기 위해선 두 가지가 전제돼야 한다고 봤다. 1심 재판부가 ‘포괄적 승계 현안에 대한 묵시적 청탁’을 인정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안정적 경영권 승계를 위해 현안이 추진됐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개별 현안들이 이 부회장의 지배력 확보에 직간접적으로 유리한 영향을 미치는 효과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지만, 사후적으로 확인될 뿐”이라고 했다. 경영권 승계 작업은 삼성전자의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삼성물산을 흡수해야 한다는 전략아래 제일모직과 합병하고 삼성물산의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던 국민연금공단이 수천억원의 손실을 감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재판부는 삼성 각 계열사 운영을 미래전략실이 맡고 있고, 미래전략실 임직원들이 이 부회장을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승계작업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삼성 측 주장을 모두 받아들였다.그러면서 “설령 승계 작업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를 도와달라는 취지의 청탁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못 박았다.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연금공단을 움직여 합병에 찬성하게 만들었던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2년6월의 실형을 대법원으로부터 확정받아 형을 살고 있는 상황에서 재판부만 증거가 없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최고 정치권력자인 대통령이 국내 최대 기업집단인 삼성그룹 경영진을 겁박했다”고 강조했다.
이는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라고 꾸짖은 1심 재판부 판단과 180도 다른 결론을 내린 것이다. 부정한 청탁이 없었다고 판단한 재판부는 제3자 뇌물공여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단을 받았던 16억원 상당의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도 무죄로 봤다.
1심에서 무죄로 인정된 미르ㆍK스포츠재단 출연금 부분도 그대로 유지됐다. 부정한 청탁이 없었다는 이유다. 다만 승마지원과 관련해선 “삼성이 코어스포츠에 송금한 돈은 최 씨와 딸 개인에 대한 지원금이 됐고, 피고인들도 이 사실을 알았다”는 취지에서 유죄로 인정됐지만 이 부분도 1심(77억여원)보다 훨씬 줄어든 36억원 가량만 인정됐다. 뇌물 혐의 대부분이 깨지면서 뒤따라오는 횡령ㆍ재산국외도피 등의 혐의도 무죄가 나오거나 액수가 줄었다. 특히 유죄가 나올 경우 형량이 가장 높은 재산국외도피 혐의 무죄는 집행유예 선고에 큰 영향을 줬다. 1심은 삼성이 독일 코어스포츠에 보낸 용역대금 36억원 가량에 대해 “도피의 뜻이 있었다”고 유죄를 인정했지만, 2심은 “이 사건 용역대금은 뇌물공여 의사이지 재산국외도피 의사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포괄적 현안인 경영권 승계작업을 대가로 한 뇌물제공이라는 특검 논리를 뒷받침했던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업무수첩과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는 증거로서 아예 인정을 하지 않았다.특검이 박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간의 3차례 독대 이전의 만남, 이른바 ‘0차 독대’가 부정한 청탁의 정황이라며 항소심에서 강력하게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안종범 수첩과 ‘0차 독대’라는 핵심 쟁점에 대해 재판부가 삼성 측 손을 들어주면서 특검 전략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재판부가 안 전 수석 증언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지시가 그대로 반영된 사실이 확인된 수첩내용과 이 부회장의 계열사 지배력 확보 등 승계문제가 기록돼 박 전 대통령에까지 보고됐다는 청와대 캐비닛 문건의 증거능력까지 부정한 것은 삼성 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물론, 문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실형을 확정받고 형을 살고 있는 것에 비교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재판부는 청와대에서 발견된 캐비닛 문건에 대해서도 “박 전 대통령이 이 보고서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부정한 청탁의 대상으로서 승계 작업 추진에 관해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애매모호한 판단을 내렸다.
징역 2년6월이 선고된 문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재판에선 이 같은 증거들이 토대가 돼, 박 전 대통령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찬성을 지시했다는 특검 주장이 인정된 것과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더구나 안종범 수첩은 이미 이화여대 입시비리 사건, 차은택ㆍ안종범ㆍ장시호 사건의 재판부가 증거로 받아들인 바 있어, 결국 이재용 항소심에서만 배척되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를 낸 것이다.
박채윤 씨도 안종범 수첩을 증거로 인정했고, 그에 따라 실형을 살고 있는데, 유독 이번 이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의 판단대로라면, 지금까지 ‘국정농단’과 관련된 대다수의 피고인들이 석방되어야 하며, 이 부회장처럼 무죄가 되어야 한다. 이번 항소심 재판을 맡은 정형식 부장판사는 지난 2013년 서울고법 형사6부 재판장시절,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정치자금 9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기호된 한명숙 전 총리의 항소심을 맡아 무죄를 선고했던 1심과 달리 징역 2년과 추징금 8억8천만원을 선고했었다. 당시 정 부장판사는 “한 전 총리가 한 전 대표로부터 받은 금원을 사적으로 사용했고 책임을 통감하지 않아 죄질이 무겁다”면서 “엄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넸다고 말했던 한 전 대표는 검찰수사 때는 돈을 건넸다고 했던 증언을 1심 법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주지 않았다’고 번복했었다. 다시 말해 한 전 총리의 유죄에 가장 큰 증언을 했던 증인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암묵적.묵시적’으로 뇌물을 받은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정 부장판사는 이번 재판에서는 누가 봐도 뻔한 증거와 증언을 모조리 무시해 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시민단체와 여론이 정 부장판사의 판결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한 예이다. 더구나 박채윤 씨는 5천여만원에도 징역 1년을 살고 있는데, 한 발 물러서 재판부의 판단대로 뇌물을 36억원만 인정한다고 해도 집행유예란 것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현행 법에 따르면 5억이상의 뇌물은 10년이상 무기징역까지 선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검이 “이재용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한 판결”이라고 강력 반발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