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이규진 기자] 박준기 중사 자살미수사건 해결을 위한 1인시위가 서울 서대문구 국민권익위원회앞에서 진행됐다. 군이 재조사를 거부해 큰 논란을 낳은 군대 내 대표적인 미제사건으로 꼽히는 박준기 중사(당시 24세) 자살 미수 사건은 육군 제2군단사령부 정보처 선임하사(중사)로 복무 중이던 1994년 12월 17일 10시30경 음주 교통사고 후 사고자들이 병원으로 이송 후에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원인불명의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은 사건이다.
20여 년 넘게 박 중사와 가족들은 국방부 검찰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받아 들일 수 없어 국민권익위의 재조사 결정을 바라는 1인 시위를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박 중사는 지난해 6월 ‘광화문1번가’ 특별 프로그램 ‘국민마이크’를 통해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알려졌고 국민인수위에 사연이 접수됐다. 따라서 지난해 9월 출범한 군 적폐청산위원회는 국방부를 통해 국민권익위에 재조사를 의뢰했다.
다음은 박준기중사와 가족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국방부 검찰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주장 내용이다
1. 교통사고후 112 출동 헌병에 연락하고 신변인계 했음에도 수사에는 사고후 연락을 받고 출동했다고 한점. 2017년도에 춘천경찰청에서 보내온 문서에는 교통사고 후 군인 신분이라 헌병에 연락 박중기중사를 인계했다는 공문을 받아봄. 그러나 헌병 초동수사에는 추락후 연락을 받고 출동 했다고함. 그러나 국방부와 검찰은 경찰공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한 점.
2. 추락지점에서 14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의사의 진술서를 국방부는 받아들이수 없다고 한점.
3. 교통사고 시간을 8시 정도로 진술한 차주의 진술서를 김**은 10시30분으로 수정된 점.
4. 지문, 혈흔이 있었다고 수사상 기록 그러나 감식이나 검사를 하지 않은점.
5. 창문규격에 대한 의문점 병원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87~88년쯤 영아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반으로 줄였다고 한 증언. 초동수사 21cm, 중수단 24cm, 국방부조사 30cm, 조사결과 마다 창문의 개방폭은 달라진 점.
6. 증거사진 새벽에 찍었어야 맞는데 사진으로 보면 낮에 촬영한것으로 추정.
7. 박준기중사는 기억을 2011년도 다시 찾았고 이를 이야기 했음에도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묵살한 점.
8. 교통사고 난 후 춘천한림대학교에서 사고 그러나 경찰과 공조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은점.
9. 교통사고 직 후 두다리 절단 종용. 그러나 내상에 의한 출혈로 인해 생명이 위급한 상태인 점.
10. 추락높이도 초동수사 결과 보고서에는 15미터로 기재, 실제높이는22미터, 2015년도 5월 조사결과 22미터로 수정 그러나 국방부와 검찰은 초동수사에 문제없다 주장한 점.
11. 추락 이후 병원과 초동수사에는 발목부상만 기재, 상체 상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점.
12. 21016년도에 국과수 높이에 대하여 의뢰결과 초동수사와는 상반됨에도 국방부와 검찰은 국과수결정에 받으들이수 없다고 한점.
13. 박중기중사는 기억 찾은 후 진술은 헌병이 계단에서 폭행 후 실신상태였는데 어떻게 창문을 통해 투신시도 했는가의 의문점 등이다.
당시 육군 제2군단사령부 정보처 선임하사(중사)로 복무 중이던 1994년 12월 17일 박준기 씨(당시 24세)는 이날 친구인 김 아무개 씨와 춘천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김 씨의 차를 무면허로 음주운전 하다가 춘천 외곽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냈다.
이날 사고로 동갑내기 친구인 김 씨는 전치 10주간의 큰 부상을 입었고, 박 중사는 얼굴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고 춘천 한림대 성심병원 응급실로 후송, 이후 112에 신고돼 경찰을 통해 2군단 사령부 헌병대에 인계됐다.
그러나 멀쩡하게 걸어 들어간 박 중사는 11일 후에 깨어났으나 교통사고 이후의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의 몸 상태도 심각했다. 정신까지 잃고 갈비뼈와 척추의 골절로 인해 내장도 파열 됐다.
군 헌병의 조서를 보면 박 중사는 병원으로 친구를 데려온 뒤 병원 10층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15m 아래로 투신했다. 박 중사가 3층 옥상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병원 수위장 홍아무개씨가 처음 발견했다. 그때가 18일 0시 30분쯤이었다. 그 후 헌병이 도착했으며, 박 중사의 자살시도 이유는 ‘교통사고의 책임감 때문’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니까 박 중사가 교통사고를 낸 후 병원으로 갔다가 사고의 책임감 등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하려고 병원 10층에서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군 검찰 수사단의 자료에 따르면 박 중사는 이와 관련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 중사는 투신했다는 것도 “어머니가 ‘병원 10층에서 뛰어내렸다’고 해서 그렇게 알고 있다”고 답변한 것으로 적혀있다. 또한 박 중사는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이 없었지만 군이 내민 수사 자료를 보고는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95년 11월 전역해서 고향 군산으로 내려가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온 박 중사는 다리의 염증이 심해지면서 1996년 가을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했고, 15년 후인 20011년에는 나머지 한쪽 다리도 절단하면서 두 다리를 모두 잃었다. 그러던중 1999년부터 준기 씨의 잃었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박 중사는 자신의 사고가 “병원에서 투신한 것이 아니라 헌병 수사관에게 폭행당했다. 이로 인해 큰 부상을 입었고 헌병은 이를 은폐하려고 자살 시도로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경찰의 연락을 받고 온 헌병 수사관 2명이 병원으로 와서 박 중사를 별관으로 연행하는 도중 선임인 헌병 김 중사가 박 중사를 폭행해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고, 바로 실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헌병 수사관들이 박 중사에 대한 폭행을 은폐하려고 그를 살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박 중사는 또한 교통사고 시간, 발견 장소, 투신했다는 병원의 창문의 폭, 떨어진 높이, 방충망의 상태 등에서 큰 차이가 있어 군 당국에 재조사를 요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네 번에 걸쳐 재조사가 이뤄졌다.
그러나 2002년(2군단 헌병대)과 2006년(육군 수사단)은 “초동수사에 문제가 없다”며 기각했고, 박 중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2007년 국민권익위(당시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권익위는 7개월 정도의 조사기간을 거쳐 군의 초동 조서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니 육군본부가 재심의해서 공상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국방부장관에게 시정권고 했다. 특히 박 중사가 투신했다는 병원 창문으로는 사람이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진성준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2016년 4월 박 중사의 타당성 있는 호소로 판단하고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한민구 국방장관에게 초동수사 부실 등을 이유로 재조사를 촉구했다. 당시 한 장관은 "군의 조사를 못 믿으면 다른 민간과 함께 확인한다든지 그런 건 가능하다, 검토해보겠다"고 답했다. 군 검찰단은 이어 박씨 사건을 재조사하기 시작했으나, 양측의 견해는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지난해 9월 출범한 군 적폐청산위원회는 국방부를 통해 국민권익위에 재조사를 의뢰해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오는 3일 재조사를 결정 결과 나올 예정이다. 한편 박 중사 가족들은 하루 빨리 납득할수 있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