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조경환 _공간 콘텐츠 프로듀서]산동네('달동네'라고도 한다. 이하 '산동네'로 표기한다.)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최근에 들어 예술로 '마을만들기'를 통해 자주 접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산동네 '벽화마을'을 보려고 먼 길을 찾아가 보면 기대했던 것 보다는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 지역 정체성과 조화롭게 결합되지 않았던 '벽화 프로젝트'로 방향성을 잘못잡았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특색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세월이 지나서 초기의 의도와는 다르게 벽화 프로젝트가 퇴화되는 것도 있었다. 초기 화제가 되었던 곳도 그랬다. 초기 '열정'도 사라진 듯 보였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와 자치단체의 정책 간의 갈등도 보인 곳도 있었다. '창의성'과 '공공성', 그리고 '지역정책'과의 괴리감(乖離感, estrangement)이였다. 그래서 ‘벽화마을’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문제도 나타나고 있다. 일부 주목을 받고 있는 초기 '벽화마을'들은 ‘영감’과 ‘열정’이 남아있어 그나마 지역의 명소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벽화’로 마을은 개발되어 주목을 받으면서 외지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근처의 부동산 등이 급등하면서 외부 투기자본이 들어오면서 그곳의 원주민들이 밀려나는 모습도 본다.
벽화마을이 지역 문화자원으로 한때 주목을 부산의 산동네가 있었다. 부산 문현동은 벽화마을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2008년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 주거환경 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산동네 비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지붕이 낮은 집들이 붙어있고 담벼락에는 동심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벽화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려진 벽화도 퇴색되어져서 거의 초기의 의도와는 다르게 마을재생에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또 부산 안창마을은 원래 오리고기 촌으로 유명하다. 안창마을도 산동네를 벽화로도 특화시켜 마을을 재생시키려는 노력을 기우렸다. 안창마을은 6.25전쟁 시절부터 형성된 부산의 대표적인 이주민촌이었다. 이곳 마을 입구에 그려진 새총을 겨누고, 새총싸움을 하는 꼬마들의 벽화는 부산을 소개하는 책자에도 여러곳에 게재가 되었을 정도였다. 지금 이 두곳은 초기의 활력을 잃고 말았다. 지역주민들의 관심도 멀어진 듯하다.
충청북도 청주의 수암골 벽화마을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잘 관리되고 있는 '벽화마을' 중에 하나 일 것이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수암로 일대에 자리한 수암골은 이제 청주를 찾는 여행자들이 찾는 공간이 되었다. 한국전쟁 후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산동네로 한때 적막한 모습이었으나 2007년에 진행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하면서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곳곳에 앙증맞고 화사한 벽화가 그려지면서 동네는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당초의 '벽화'보다는 이곳을 찾는 외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카페'가 더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지금 수암골도 어느 정도의 '젠트리피케이션'(둥지의 내몰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후 '카인과 아벨', '제빵왕 김탁구' 등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수암골을 찾아드는 외지인들이 점점 늘었다. 우암산 자락에 위치해서 청주 시내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내려다보는 풍광이 아름답다. 드라마 세트장을 활용한 음식점과 전망 좋은 카페도 여럿 있다. 그러나 당초의 '벽화'보다 주변의 '카페'가 더 활성화되어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청주 수암골 지역재생 브랜드의 핵심이 '벽화'인 만큼 지금보다 더 창의성을 발휘하는 '벽화마을'을 기대해 본다.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 등대오름길은 묵호등대를 오르는 벽화 길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주최하고 동해문화원이 주관한 ‘논골담길 프로젝트’ 가 마무리 되면서 새로운 벽화길로 재탄생되었다.
논골담길에는 매일 새벽 명태와 오징어를 가득 실어 나르는 어선들로 활기를 띄었던 묵호항을 배경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인생 스토리가 재밌는 벽화로 그려졌다. 지역의 원형(어촌주민의 삶)과 스토리텔링을 연계해서 만든 곳으로 최근들어 이곳을 찾는 외지인들이 늘고 있다. 지역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만든 벽화는 외지인들도 쉽게 공감할 수가 있고 또 차별성이 있다. 아쉬운 점은 '벽화'의 지속적인 관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통영의 몽마르트 언덕이라고 하는 ‘동피랑’ 벽화마을이 있다. 동피랑은 동쪽에 있는 '비랑'(비탈의 지역 사투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쪽의 파도를 피하는 항구인 ‘동피항’이 가까이 있어서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통영 중앙시장 골목길에서 ‘동피랑’의 마을에 오르면 마을 담벼락마다 그려진 형형색색의 벽화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영화세트를 위해 만든 산동네 촬영장과도 같은 분위기이다.
동피랑 벽화마을 사업은 ‘지역혁신협의회’ 시범사업 공모로 우선 3천만 원을 지원받았다. 통영시 중앙동 산비탈 마을인 ‘동피랑’이 공원으로 재개발을 하기보다는 독특한 골목문화를 재조명하면서 그림이 있는 골목,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골목으로 해안도시의 수려한 경관을 갖추고 있는 통영의 또 다른 명소로 거듭나기 위해 2007년 7월 ‘지역혁신협의회’ 시범사업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주관단체인 '통영 21'의 활동가들은 '동피랑' 지역민들과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소통과 설득 그리고 이해와 협력을 통해서 전국에서 '벽화마을 만들기'에 공모한 화가들을 중심으로 19개 팀 40명으로 '벽화가 있는 골목, 동피랑' 작업들이 시작되었다. 다만 당시 예향(藝鄕)인 '통영'에서 지역화가들의 참여가 없음은 아쉬었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2008년 민관협력 포럼 최우수상(행정안전부장관상), 2008년 전국 마을 만들기 대회 최우수상, 2014년 지역브랜드 대상을 수상하였고, 2014년에는 유엔 지속가능발전 교육 공식 프로젝트로 인증을 받기도 하였다. 벽화마을로 지속적으로 유지 관리하는 것은 다른 지역의 사례를 보더라도 쉽지가 않다. 초기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리더들의 열정과 노력이 컸다.
이런 ‘마을 만들기’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과 조율하고 그것을 조정하고 합의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실행하는 것이다. 실행을 하면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리더쉽이 뛰어난 사람이 없으면 ‘마을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사람이 기본이고 시스템을 통해 잘 운용하지 않으면 마을 만들기는 효과를 거두기가 쉽지 않다. 그러한 점에서 '동피랑' 벽화마을의 전국적인 성과를 이루어 낸 이들의 공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그 유명세가 알려져 많은 외지인들이 이곳을 찾는다. 말 그대로 명소가 되었다. 한국의 나폴리라고 지칭되는 ‘통영항’이 앞에 위치해 있고 근처에는 통영의 부엌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시장’이 있다. 그렇게 연계되어 있어서인지 '강구안'의 여러 점포, '통피랑'의 벽화마을 카페, 중앙시장의 해산물이 연계되면서 이곳은 인파들이 끊이질 않는다. 지역경제에 끼치는 영향도 크다고 하겠다.
'동피랑' 지금 변화가 보인다. 세련된 게스트하우스도 들어서고 멋진 카페도 주변에 들어서지만 초기의 투박하고 서민적인 산동네의 '벽화마을'로서의 모습은 조금은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원체의 취지는 '살기 좋은 도시 마을 만들기'였고 그 가운데 핵심은 '벽화'를 통한 구도심(산동네) 재생이었다. 그리고 이곳 원주민들인 운영하는 구판장 등을 통해 추억을 회상하고 '할매 바리스타'가 만들어주는 커피를 마셨다. 그것은 즐거운 여행의 로망이었다.
‘동피랑’ 원주민들은 이곳을 ‘주전골’이라 부른다. 벽화가 만들어지고 외지 관광객들이 몰려왔다. 2년마다 벽화가 새로 덧칠을 하면서 지속적인 관리도 다른 곳에 비해 잘되어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3년 이상 실제로 거주 안 하면 ‘동피랑’에서 가게를 열지 못했지만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를 겸하는 카페부터 시작해서 외부 자본이 들어오면서 처음 ‘마을 만들기’의 모습에서 많은 변화가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동피랑’이 지금 위기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마을은 개발됐는데 원주민 대부분이 자본에 밀려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둥지의 내몰림’을 뜻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이곳 ‘동피랑’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처음 의도 벽화를 통한 ‘동피랑’의 활기찬 마을 만들기가 살아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감도 든다. 지금까지 벽화마을에 걸 맞는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원주민들이 삶의 현장으로서 또한 예향으로서의 통영스러운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으면 싶다.
부산 사하구의 감천문화마을은 2009년 '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 2012년 '마을미술 골목길 프로젝트' 로 세인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부산이라는 곳이 한국전쟁의 피난처로서 임시 수도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실향민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부산이 산동네가 많고 또한 독특한 부산만의 골목길 문화가 발달되었다.
감천마을은 한국전쟁 후에 태극교도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태극도는 1918년 조철제(趙哲濟)가 증산사상을 바탕으로 세운 종교로 사천 여 명의 태극도 신도들이 이 반달고개 주변에 모여 집단촌을 형성하였다. 이 태극도 신앙촌이 중심이 되어 1958년 지금의 감천 2동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산동네로서 독특한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잡마다 알록달록한 페인트칠을 한 집들이 많았다. 그러한 모습에 주목한 예술가들이 지역민들과 협력하면서 지금의 감천문화마을을 마을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큰 변화를 시도하였다. 마을의 벽에는 그림이 그려졌고 마을입구에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재미난 조형물을 설치되어져서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사진 갤러리를 비롯해 예술공방들이 이곳에 들어서게 되었다. 점차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이곳이 알려졌고 이제는 수많은 외지인들이 찾는 부산의 명소가 된 것이다. 특히 SNS, 인터넷 블로그 등을 통해 여행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해외에서도 방송이나 인터넷, 책자 등을 통해 이곳 감천문화마을이 소개되면서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도시여행이 그 지역의 콘텐츠 탐방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감천문화마을가 도시의 콘텐츠로서 해외 관광객들에게도 부산의 도시 명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체류형으로 감천문화마을에는 도자기공방, 목공방, 섬유공방 등 다양한 창작공방이 있어서 천연염색, 도자기 만들기, 자화상 그리기 등 각종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흔히 '벽화마을'의 경우 관광지화가 되면서 외지인들이 많이 찾지만 실제적으로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혜택은 거의 없다. 그리고 주변 부동산만 상승한다. 그리고 원주민 그 지역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자주 본다. 그것을 '젠트리피케이션'(둥지의 내몰림) 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역재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주민들이 그 사업의 취지를 납득하는 것이다. 그 마을의 미래를 같이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민들이 공동체의 미래의 모습을 납득하면 지역공동체와의 협력도 순조롭다. 부산 감천문화마을은 우선 ‘엄마손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감천2동 재래시장의 빈 점포를 활용하여 먹거리를 개발하고, 문화마을 입주작가와 지역주민을 연결하여 주민작가 양성 및 문화상품을 개발, 생산, 판매하여 주민 소득을 증대시키면서 지역민들의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이 목표다.
그리고 사단법인 감천문화마을 주민협의회는 감천문화마을 내 마을기업 등을 운영하고 있다.
산하의 마을기업사업단, 매월 감천문화마을의 소식을 모아 신문을 발행하는 홍보단, 방문객을 맞이하며 안내 업무를 맡고 있는 봉사단, 주민들의 소규모 집수리 등 주민 환원사업을 시행하는 생활개선사업단이다. 그리고 민박사업을 총괄하는 민박사업단, 마을축제 및 문화공연 지원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문화예술사업단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감천문화마을 내 '방가방가 게스트하우스'가 오픈하였다. 게스트하우스 등을 운영하는 감천문화마을주민협의회에서는 스탬프 지도 판매와 마을기업 수익금으로 지역민들을 위한 다양한 편의, 복지서비스에 수익금을 활용하고 있다. 그것은 아래의 내용과 같다.
⑴ 감천행복버스의 운영: 주민들을 위해 지하철과 시내중심지를 연결하는 무료셔틀버스
⑵ 집수리사업: 노후 주택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위한 도배, 장판교체 등 집수리사업
⑶ 감내작은목간의 운영: 목욕공간이 없는 협소주택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위해 마을공동목욕탕인 감내작은목간의 운영
⑷ 감내빨래방의 조성: 어르신들을 위해 무상으로 이불빨래서비스
⑸ 학교지원사업: 김정초등학교 방학급식비, 교육프로그램 운영비, 장학금의 지원
※ 감천 2동 전세대에 종량제봉투, 황토가마소금의 배부, 경로당 난방비 및 경로잔치의 지원, 저소득층을 위한 김장김치의 나눔에 수익금을 사용하고 있다.
최근 부산시는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 유산’이 문화재청의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부산이라는 곳이 한국전행의 피난처로서 임시 수도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실향민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부산이 산동네가 많고 또한 독특한 산동네 골목길 문화의 특색이 있다.
부산에 소재한 임시수도 대통령관저 등 13개 유산에 대해 문화재청이 한국의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조건부 등재된 것이다. 피란수도 부산 유산의 잠정목록 등재는 근대유산으로는 한국이 그 최초이다. 이제 이러한 대외적인 관심과 주목을 바탕으로 부산 산동네는 고유의 문화 관광 콘텐츠로서의 중요한 지역자원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도 부산이 산동네가 많고 또한 독특한 골목길 문화가 발달하고 있다. 지역재생이 돌파구가 '골목길'에 있다는 특이성이 있다.
공공미술과 결합된 차별성, 대와적인 주목성 때문이라도 부산 사하구 감천문화마을은 추억의 골목길 문화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해운대지역 중심의 신도시 조성 정책이 부산의 新도시정책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구도심 산동네는 더욱 공동화 현상으로 인해서 도시의 활성화에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장소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구도심의 공동화는 선진국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슬럼화과정을 겪으면서 도시의 사양화에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지역재생이 당장은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지만 지속 발전 가능한 협력이 이루어진다면 감천문화마을이 원도심 지역재생의 새로운 전범(典範)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부산시에 거주하는 많은 화가들이 이러한 골목 산동네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참여한다면 지역 속에 살아 숨쉬는 지역 아티스트의 기여도로 인해 기타 지역에서의 지역재생과 구도심 활성화의 좋은 모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