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사카 츠루하시역에서 이쿠노 코리아타운 방향으로 걸다보면 바로 입구에 ‘미유키모리신사(御幸森神社)’가 있다. 이곳 경내에는 오랜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를 기념하는 ‘난바나루터(難波津の歌)의 노래비’가 있다.
“ 이 지역은 이카이노(猪飼野)라고 불리어 고대로부터 일본과 조선반도의 사람들이 교류해왔습니다. 약 1,600년 전 미유키모리신사(御幸森神社)의 제신(祭神)인 닌토쿠천왕(仁德天皇)의 즉위(卽位)를 축하하여 백제(百濟)에서 도래(渡來)한 왕인박사(王人博士)가 ‘나니와즈노우타’란 와카(和歌)를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일본과 조선의 선린, 우호 사절단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일본 12회(오사카에는 11회) 왔습니다. 이 통신사의 방문을 축하하여 쓰시마번(對馬藩)의 통역관인 운메이(雲明)가 와카(和歌) ‘나니와즈(오사카)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매화꽃이 피웠습니다’라고 하는 ‘나니와즈 사쿠야코노하나 후유고모리 이마와 하루베토 사쿠야코노하나’(현대문 표기)를 한글로 써서 드렸다고 합니다. 1994년 조선통신사 연구가인 신기수(辛基修)에 의해 효고현 타쓰노시의 구가 야세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일본과 한국, 조선과의 우호, 공생 시대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이 가비(歌碑)를 오사카 이카이노 땅에 건립합니다. “
'난바나루터의 노래'(나니와쓰노우타, 難波津の歌) 한글 노래비 건립위원회(2009년 10월)
당시 왜(倭)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인 백제문화의 흔적들은 지금도 오사카 곳곳에 걸쳐 있다. 일본어로 ‘구다라나이(百濟無い)’는 직역으로는 ‘백제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가치’가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 쓰이며 흔히 '하찮다' 또는 '시시하다'는 뜻이다.
제주도 중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바오젠거리'에서 만난, 작년 정년 퇴직을 하고 세계 일주 중인 야마야(山谷)씨는 그런 고대 백제에서의 어원(語源)을 설명하니까 깜짝 놀란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렇듯 오래전부터 일본에서 한류(韓流)의 흔적은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牧方市)에 위치한 왕인 박사의 묘역 등을 비롯하여 백제사적(百濟寺跡)을 볼 수 있다. 일본으로 건너 온 왕족 자손들에 의해 이어온 백제의 문화는 일본인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으로 건너 온 것이 백제의 귀족문화였던 것 만큼이나 우아하고 세련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을 통칭(統稱)해서 '검이불루 화이불이(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라고 했다. 한반도 교류의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현대의 일본 지식인들도 고대 백제문화의 영향에 대해서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신뢰(信)를 나누고 교류(通)하다’는 뜻으로 이백 수십 년간 에도시대 바쿠후(幕府, 이하 '막부'로 표기함)가 초청한 사절단인 조선통신사가 작년 2017년 세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울, 부산, 쓰시마, 이키, 시모노세키를 거쳐 세토우치에 도착, 다시 도쿄까지 이어진 긴 여정이었다.
이들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300~ 500 여명의 조선통신사들은 날씨나 그 지역의 여건 등 여러 상황에 따라 5개월에서 10개월까지 소요되는 긴 여정을 하게 된다. 한양을 출발하여 충주, 안동, 경주, 부산을 거쳐 대마도, 이키, 아이노시마, 시모노세키, 가미노세키, 우시마도, 무로쓰, 효고, 오사카, 교토, 히코네, 나고야, 오카자키, 시즈오카, 하코네 에도(도쿄) 혹은 닛코(日光)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조선통신사에는 조선의 정사, 부사를 비롯해 통역, 유학자, 화가, 승려, 기예 예능인, 행렬악대 등 큰 규모로 많을 때는 500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일본 측에서는 숙소관리자, 요리사, 지방관리 등 총 2천여명이 이 행렬에 참가했다 하니 당시로써는 평생 한번 보기도 힘든 장관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조선통신사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는 지역축제들이 다수 있다. 오카야마 우시마도(牛窓)에서 매년 10월 행해지는 ‘가라코춤'(唐子り, からこおどり)은 마치 색동저고리를 입은 두 명의 어린이가 재롱을 피우는 모습으로 춤을 춘다. 흔히 과거 조선통신사 일행들이 우시마도 지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카야마 세토우치시(瀬戸内市) 축제 소개 페이지에서는 이 가라코춤은 그 초원(初源) 불명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미 고증에 의해서 380년 전 혼렌지(本蓮寺)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가 숙박했던 혼렌지(本蓮寺)에는 그들이 남긴 글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 이곳에 머물던 조선통신사 일행들이 이곳 사찰 마당에서 '소동(小童)들의 연희(演戱)'을 일행들이 즐기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구경하던 지역의 아이들이 소동들의 몸짓을 기억해두었다가 그것을 그 지역에서 시연했던 것이 그 축제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출처: 出島と朝鮮通信使, 1994년)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 중에는 조선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소동’(小童)이라고 했다. 이 아이들은 일행을 수행하면서 견문을 넓혔으며, 춤이나 노래 등으로 조선통신사 일행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지금도 일본의 우시마도에는 당시 소동들이 추었다고 여겨지는 '가라(唐)코 춤'이 전해진 것이라 생각된다. '가라'(唐)는 '중국'을 뜻하기도 했지만 '조선'의 문물을 뜻하기도 했다.
조선통신사의 행렬이 지나간 곳인 순푸(駿府), 지금의 시즈오카(静岡)현 시내의 큰 서점을 둘러보다가 서점 한 곳에 조선통신사에 관한 서적들을 모아 진열하였는데 그 숫자가 많아서 놀랐다. 일본에서 조선통신사에 관련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의해 국교는 단절되고 에도 막부는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대마도번(對馬島潘, 이하 '대마번(對馬潘)으로 표기함)의 중개로 교섭을 거듭한 결과 국교가 회복되었고 1607년 선조 40년 일본 막부(幕府)에 조선의 사절을 처음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외교 사절로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했다. 에도 막부는 쇼군이 바뀌면 대마도 번사를 부산에 파견해 그 사실을 알리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대마도사절단은 부산의 '초량왜관'(草梁倭館)에서 기다리며 한성에서 통신사 일행이 오면 그들을 대마도로 안내 하였다. 대마도에서 도쿄까지의 안내와 경호도 대마번이 담당하였다. 막부는 조선 국왕과의 국서를 주고받고 통신사를 접대하며 국내외에 그 위신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거액의 비용을 아낌없이 사용하였고 최고 수준의 의례로 대접하였다.
또한 일반인이나 학자, 문화인의 사이에서도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 통신사가 통과하는 각 지역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일본측에서의 조선통신사에 대한 접대비용으로 100만 량(현재의 가치로 약 500억 엔 정도)에 달했다.
조선통신사 일행인 신유한(申維翰)이 쓴 ‘회유록’(海游録, 1719년 ) 제9회 조선 통신사는 4월 11일에 한양을 출발 해 육로 부산에 6 월 13일 부산에 도착. 한양에서 2개월 이상 걸렸다고 한다. 부산과 대마도의 거리는 약 50km로 가가운 거리지만 바다 풍속과 파고(波高)에 따라 위험한 해로(海路)이기도 했다. 부산에서 풍속 등을 살펴보다가 6월 20일에 출항한 당일 대마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대마도에서는 1개월을 체류하였다.
이러한 조선통신사의 화려한 행렬을 그린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이 이즈하라의 나카사키현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2018년 현재 휴관중)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길이는 15.58m에 달한다. 그림에는 청도(淸道)기를 선두로 악사, 무인, 통역사, 정사, 부사 및 소동(小童) 500여명의 통신사를 대마번주가 호위하며 행렬하는 모습이 화려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그 때 800여 명의 대마번(潘) 관계자가 500여 명의 통신사 일행을 에도( 江戸, えど, 지금의 도쿄)까지 수행하였고, 조선통신사가 통과하는 길에 있는 34여개 번(潘)의 다이묘(大名, 지방영주)들은 말과 인력, 숙소를 제공하고 환영연회를 열었다. 행렬의 총인원은 약 2천 명에 달했으며 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모였다.
신유한(申維翰)의 '회유록'에 의하면,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에서 오사카항으로 이동하는 선단(船團)에는 조선통신사 일행을 태운 5척, 에도까지 일행을 수행하는 대마번 관계자들을 태운 15척, 오카야마번에서 나와서 이들 일행과 수행한 배가 845척으로 인원으로만 총 3,700 여명이 참여해 장관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통신사와 대마도는 관계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위지왜인전'에 기록되어 있듯이, 대마도는 깍아 지른 듯한 산들이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경작에는 별로 적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 본토보다는 한반도에 가까워 이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대마도 사람들은 예로부터 조선과의 무역을 하면서 생활을 해왔다. 그만큼이나 '조선'과는 밀접한 관계였다. 그리고 미묘한 역사적인 시기에 조선통신사가 실현된 만큼이나 통신사를 대하는대마번의 입장은 엄중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를 에도까지 수행하는 것은 막부의 지시에 의해 대마도주의 소관하였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대마도에 도착하면 오사카를 거쳐 도쿄에 갔다가 대마도로 돌아오기까지 대마도주는 조선통신사 일행들을 안전하게 지켜가며 따라 갔다가 다시 와야 했다. 그 만큼 조선통신사의 수행에 있어서 안전하게 에도 막부에게 이끌고 가는 것, 다시 안전하게 조선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 대마번에서는 그들의 '국경의 섬'으로써 그 생존(生存)을 담보라는 것이었다.
대마도(쓰시마, 對馬島)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딸린 섬이지만, 부산에서 더 가까운 섬으로 그리고 가깝고 또 가까운 느낌을 가장 잘 피부로 와 닿은 그런 곳이 바로 이 대마도이다.
서울에서 출발해서 부산을 떠나 이곳에서 머물었던 조선통신사 일행이 이곳에 머문 흔적들이 많아 매년 8월 '이즈하라항축제'에서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행사를 매년 부산시와 협력(부산문화재단 주관)에 의하여 축제로 발전시키고 있다.
대마도는 제주도 면적의 40%이고 이 섬의 89%는 산림지대이다. 우리나라 거제도보다는 조금 큰 섬이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불과 31,953명(2016년 9월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가 한 때 7만 명을 넘기기도 했으나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어업과 수산업이 이 지역민들이 생업으로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본 섬 2 개와 98개의 작은 섬(유인도 5개)으로 되어 있다. 노인 인구의 증가와 젊은이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해나가고 있다. 그래서 생산성이 활발한 지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있는 원인 중에는 대마도에 대학이 없다는 데에도 요인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산악지역이 많지만 장점으로 천연(天然)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많아 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국경의 섬으로서 천연의 대마도 섬의 그 자연을 활용한 문화 레저 관광을 연계한 대마도 관광 활성화 에 주력하고 있다. 거기에 시즌별 이어지는 대마도 '지역축제'가 있다. 국경의 섬 대마도를 '끊임이 없는 화제의 발신기지'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들이 거쳐간 곳은 아직도 일본의 곳곳에 그 흔적들이 많이 산재되어 있다. 또한 한국에서 가장 가깝고 고대부터 오래동안 교류를 해왔던 첫 기착지인 '대마도'(對馬島)는 조선통신사의 흔적의 뿌리는 깊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