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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젊은층의 시각,. 한반도 평화 어느 정도?..
정치

남북정상회담, 젊은층의 시각,. 한반도 평화 어느 정도?

김선영 기자 libra3333333@gmail.com 입력 2018/06/04 13:22 수정 2018.06.04 17:39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나는 모습(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

▶ 2018년이 되며 남북정세에 큰 변화가 있었다. 특히 북한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개방을 시사하고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중 제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는 남북평화에 큰 방향을 제시했다.

11년 만에 만난 정상들

4월 27일, 한반도의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 바로 노무현 전대통령이 북한을 다녀온 뒤 한 번도 진행하지 않았던 3,4차 남북정상회담(이하 정상회담)이 개최된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체재를 공고히하기 위해 남북대화를 기피하며 도발과 위협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 집권 이후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그중 김 국무위원장의 2018년 신년사는 남북관계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됐다. 김 국무위원장은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며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 만남과 대화를 할 용의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한의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이야기하고 나중에 말을 바꾸겠지’, ‘우리가 한두 번 속느냐’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상황은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지난 2월 10일 북한이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참석과 단일팀 출전 등 합의를 위해 청와대로 특사를 파견했는데 특사 명단에 놀라운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은 김 국무위원장의 친여동생인 김여정으로 북한 김일성 주석의 직계혈통인 ‘백두혈통’이 남한에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김여정은 문 대통령과 만나 “문 대통령을 이른 시일에 만날 용의가 있다. 편하신 시간에 북한을 방문해 주실 것을 요청한다”며 김 국무위원장의 의지를 전했다. 이렇게 북한이 먼저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은 분단이후 처음이다.

이후 3월 6일에 청와대는 북한으로 특사단을 파견해 김 국무위원장을 직접만나 정상회담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눴다. 3월 29일 판문점에서 양측은 입장을 정리한 후 4월 27일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두 가지이다. 먼저 이전과 달리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서 진행된 것이 아닌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판문점에서 이뤄진 점이다. 판문점은 남한의 영토로 남한에서 최초로 진행된 정상회담이다. 다음은 당일치기로 이뤄진 점이다. 이전 정상회담은 2박 3일간 이뤄진 것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짧은 일정이다. 그렇기에 회담이 끝난 후 발표할 선언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다.

취재열기도 뜨거웠는데 총 3,000여명의 기자가 취재센터에 들어왔다. 이 인원은 이전 두 정상회담을 취재한 기자를 다 합한 수와 비슷하다. 엄청난 관심이었다는 게 실감나는 숫자다. 34개국 196개사 920여명의 해외기자가 역사의 현장을 함께했다.

군사분계선에서 만난 두 정상은 양국의 영토를 번갈아 밟았다. 처음 계획에는 김 국무위원장만 넘어오는 것이었지만 국무위원장의 권유로 문 대통령이 북한의 땅을 잠깐 밟게 됐다. 이후 일정에서 도보다리 산책에서는 두 대표가 보좌관도 없이 대화를 나눴다. 40분 가량 대화가 이어지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냈다.

이전의 정상회담은?

1차 정상회담은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진행됐다. 같은 해 6월 12일부터 3일간 정상회담이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회담 전날인 11일에 북한이 준비가 부족하다며 하루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고, 청와대는 이를 받아들여 13일부터 정상회담이 진행됐다.

1차 정상회담의 결과로 ‘6.15 남북 공동 선언(이하 공동선언)’이 발표됐다. 공동선언을 이행한 행사는 같은 해 광복절에 이뤄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다. 역사상 두 번째 이산가족 상봉이었던 이 행사는 선언문의 내용을 그대로 이행한 것이다. 또한 시드니 올림픽 공동 출전이 있다. 특히 개막식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과 함께 입장할 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2차 정상회담은 2007년 10월 2일부터 3일간 진행됐다. 이 날짜도 처음 계획한 날짜는 아니다. 원래 같은 달 28일부터 3일간 진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늘이 돕지 않았다. 예정일을 10일 남기고 북한은 대규모 수해를 입었다. 이에 북한은 정상회담 연기를 요청했고 계획보다 35일 늦어진 10월 2일에 회담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 가장 큰 이슈는 대통령 부부가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이다. 남한대표가 휴전의 상징물이자 전쟁의 증거인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것이 한반도 평화메시지가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당 정상회담에서도 마지막 날에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전 공동선언과 비교할 때 구체적 합의가 이전에 비해 많아졌다. 또한 이전 공동선언을 기초로 하는 항목들이 많아 지키지 못했던 부분을 지켜나갈 것이라 예상했지만 김 대통령이 집권할 때만큼의 이행 성과는 없었다. 개성공단 화물열차가 개통된 것 이외에는 알려진 게 없다. 당시 노 대통령은 임기를 얼마 남기지 못한 시기였기에 그랬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대학생들이 바라 본 정상회담

학생들은 이번 정상회담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대다수의 학생들은 정상회담에 대해 긍정적(93.6%)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회담이후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었다. 절반정도의 학생(47.8%)이 변화가 미비할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한 학생은 ‘남한이 색안경을 쓰지 않는다면 크게 변할 것 같다’는 의견을 이야기했다.

이번 회담의 백미였던 ‘판문점 선언(이하 선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많은 학생(26.9%)이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한 합의는 ‘종전선언 추진’이다. 선언 3조 3항을 보면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후략)’이라고 명시했다. 정확한 날짜는 없지만 올해 안에 정전을 선언하겠단 의지가 보이는 부분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정전협정 체결이 있은지 65년 되는 날인 올해 7월 27일에 종전선언을 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통일’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양국의 합의로 각자의 체재를 인정하고 전쟁을 끝내는 방법이 제시된 것이다. 종전이 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군대의 징병제의 모병제로의 변화이다. 전문가들은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독일이 통일 이후 21년이 지난 후에야 징병제가 지원병제로 변화한 걸 미뤄보아 한국은 정전 이후 큰 변화를 보이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학생들이 많이 선택한 합의는 ‘완전한 비핵화 의사 표기’(25.2%)다. 또한 많은 학생들이 최우선으로 추진해야 할 합의로 꼽은 것도 ‘완전한 비핵화(35.7%)’다. 그만큼 핵 없는 한반도를 꿈꾼다는 의미로 보인다. 선언 3조 4항에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고 명시했다. 또한 비핵화를 통해 국제사회에 협력하겠다는 이야기도 선언 말미에 적혀있다. 북한도 완전한 핵 폐기라는 국제적 분위기에 동참할 것인지 보여주기 식으로 핵을 숨길지는 우리가 계속해서 지켜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세 번째로 많이 선택한 합의는 ‘남·북 양측의 활발한 소통 약속(16.0%)’이었다. 소통의 일환으로 올해 가을에 평양에서 다시 한 번 정상회담을 진행할 예정이다. 또한 양측 직통전화를 이용해 꾸준한 통화를 통해 소통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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