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차종목 논설위원] 인간의 인생관은 가치관으로 대변할 수 있다. 가치관이란 인간이 세계내의 삶에서 어떤 대상이나 사물에 대해 사고와 감정을 통해 무엇이 좋고, 옳고, 바람직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관점이다. 그러면 가치관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가치관은 성격, 삶의 패턴, 인성, 인격에서 비롯된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생사고락(生死苦樂)인 삶과 죽음과 성공하고 실패하고 전쟁과 살인 거짓과 윤리와 비도덕적인 행위 등 모든 행동들이 성격(character)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즉 인간의 행동패턴을 도덕적인 옳고 그름으로 보거나 좋고 싫음에 따른 반응으로 보지 않고 성격형성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바라본다.
한편, 일본의 전국시대(1500년대) 『대망(大望)』에 등장하는 일본의 3대 영웅의 인생관을 살펴보면서 성격에 대한 이해를 넓혀본다.
일본이 통일되기 전에는 나라 전체가 혼란 그 자체였다. 일본은 통일되면서 차례로 패권을 쥐었던 사람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일본의 한 작가는 두견새를 비유해서 이 세 사람의 인생관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오다 노부가나: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 버리겠다.
*도요도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 두견새를 울게 하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
위에서 열거한 오다 노부가나, 도요도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인생관은 곧 개개인의 성격으로 대변할 수 있음을 심리학에서 설명한다. 많은 철학가 심리학자들이 탐구하는 "인간은 무엇인가?" "너 자신을 알라"에 대한 물음에서 볼 때 "인간의 성격은 무엇이고 자기인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행동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어느 정도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어떤 논자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다리는 성격으로 좋게 평가한다. 그러나 직면하면 성격을 “좋은성격” “나쁜성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성격은 단지 그 사람의 살아가는 삶의 패턴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표현으로 “나쁜 성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행동결과가 사회에서 정한 법의 테두리와 규범에서 정한 범위를 이탈했을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성격 그 자체를 가지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인간관계 방식에 비추어 어느 누구도 좋은 성격 나쁜 성격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격과 관련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인격(personality)”은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와는 달리 정신과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서 “인격”이란 "개인과 사회가 통합되고 사회를 수용할 수 있는 성격"이라 정의할 수 있다. 유사 사용단어로서는 “인성”과 “성품”에 가깝다.
이러한 성격과 인격은 모두 어릴 때 부모와 자녀간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자아로 보며 자아형성은 『효경(孝敬)』에서 나타낸 “부자자효”를 가장 중요한 성장과정으로 지목하고 있다.
다시 두견새의 줄거리로 돌아가서 세 명의 성격을 빗댄 이 이야기 중 노부나가가 새를 죽인다고 묘사한 것은 오히려 노부나가의 과단성이나 결단력 혹은 잔혹함을 묘사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이에야스의 구절에서 두견새는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가 집권하기 직전 대항마로 떠오른 마에다 토시이에를 빗댄 것으로 토시이에의 죽음을 기다렸다가 정권을 잡는 움직임을 보인 이에야스의 행동을 빗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즉, 인간은 정치적 목적과 성격에 따라 어떤 것을 결정하여 행동할지는 달라지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는 동일한 결과를 기대한다는 심리적 배경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본다.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해 평가를 할 때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의 평가는 현대에 들어서 어느덧 도덕의 기준보다는 사회계약에 의한 법과 규범을 가장 우선시 하고 있다. 옳음의 기준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공리성과 평등성과 인권 등을 최근 들어서 도덕적인 기준과 함께 조금씩 개입하고는 있지만 현대는 절대적으로 법의 기준을 근거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회계약에 의한 법과 규범을 우선시 판단하는 관점에서 나타난 행위의 결과는 성격 행동패턴과는 분리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는 인간 동기의 중심을 도덕적 기준으로서 가장 중시한 판단이었다면 현대는 이를 객관화하고 사실적인 증거를 채택하고 있다. 특히 성격행동패턴에서 나타난 결과가 도덕적 관점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것을 법으로 정했거나 사회계약적 규범으로 정했다면 행위의 결과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략적 정치적이든 간에 합법적인 행동일 때 도덕적인 행위를 더 이상 논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 불만족하여 전체 또는 다수가 위헌이라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면 또 다른 사회계약방식이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결국 좋고 나쁨의 성격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계약으로 정한 범위에서 수용할 수 있는 행동인가 아닌가를 보고 좋은 행동인가 나쁜 행동인가를 판단한다.
성격은 패턴으로 설명할 수 있다. 동물의 예를 들어보면 호랑이는 토끼를 잡아먹는 성격(성질) 즉 패턴을 가지고 있다. 토끼의 입장에서는 나쁜 호랑이지만 창조주 관점에서는 패턴을 정한 섭리적인 현상일 뿐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의 행위는 일반적으로 나쁜 행동의 패턴으로 여긴다. 그러나 군인이 국가의 적을 살인하는 군인은 영웅으로서 아름다운 마음의 패턴으로 본다. 여기에서 성격 패턴 중 적을 살인할 수 있는 강한 성격이 있는가 하면 적의 마음을 돌려서 아군 편으로 만드는 온유한 성격도 있다. 그렇다고 강한 성격은 “나쁜 성격” 온유한 성격은 “좋은 성격”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상황과 사회계약에 따라서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어지고 적용되어지는가가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될 뿐, 이러한 모두의 나타나는 현상들은 정치와 사회현상의 변화와 함께 시대에 따라 새롭게 재정립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