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후 서울대 병원에서 마련된 고(故) 장준하 선생부인 김희숙여사의 미사에 참석한 가족들이 준비와 마지막 가시는 모습에 눈물을 닦고 있다.
고인은 장준하 선생의 동반자이자, 평생의 동지였다.
〈한겨레〉에 따르면, 1926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장준하 선생이 소학교 교사시절 제자이자 묵었던 하숙집의 딸로 인연을 맺어 1944년 18살 때 결혼했다. 일본 유학중이던 장 선생은 정신대(위안부)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 김 여사를 구하고자 귀국해 결혼식을 올렸다. 그 열흘 뒤 학도병으로 입대하면서 그는 어린 신부에게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탈출할 계획’을 털어놓으며 기도를 부탁했고, 김 여사는 그날부터 평생토록 천주교 신앙으로 인고의 한평생을 견뎌냈다.
고인은 50년대 한국전쟁 와중에 남편이 발행한 잡지 <사상계>를 만드는 데도 힘을 보탰다. 호권씨는 “잡지는 만들어야 하는데 형편이 어려워 직원이 없으니 어머니께서 편집도 도왔고 사무실 임대료와 인쇄할 종이값이 없을 때에는 당신의 외투를 몰래 팔아서 운영비를 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일제 만주군 출신 박정희는 75년 8월17일 장준하 선생 의문사 이후 중앙정보부를 통해 내내 유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일체 어떠한 생계 수단도 가질 수 없도록 괴롭혔다. 지난 2016년 1월 구순 생신잔치 때 고인은 “정보부원들이 장례식 때만 성당에 가도록 허락해줘서,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려야 하는 나날”이었고, “성당에서 주검을 씻기고 수의를 챙겨 입히는 입관 봉사를 하면 유족들이 이것저것 챙겨주어 아이들을 먹일 수 있던 시절”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