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지른 해안. 가파른 절벽, 험준한 산악. 해협을 가로지르는 거친 바람. 이런 척박한 곳에 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살았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명확히 알려진 게 없다. 12,000명? 그 이상? 아니면 8,000명? 추측만 할 뿐이다. 그들은 가혹한 고문과 착취에 시달리던 조선인 노동자들이었다.
‘귀국선 1호’, 출항 직후 예정항로 벗어나
일본 도호쿠 최북단 아오모리. 이곳으로 끌려왔던 조선인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래서 그들은 귀국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꿨다. 그들의 바람은 이뤄졌을까?
항복선언 직후, 일제는 오미나토 해군 경비부에 명령을 하달했다. 해군 수송선을 부산으로 급파해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데려오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특수임무는 곧 취소된다. 대신 새로운 명령이 주어졌다. 아오모리 지역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그 배에 실어 부산으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이 대목에 물음표가 붙는다.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대던 일제가 조선인 노동자들의 귀향을 알뜰살뜰 챙겼다? 이상하지 않은가.
1945년 8월 18일, 조선인 노동자들이 항구에 집결했다. 이들을 실어나를 배는 4,730톤급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 배의 정원은 4,000명 정도. 하지만 이 배에 태우기 위해 모아놓은 조선인 노동자의 숫자는 정원을 몇 배나 초과하는 규모였다.
탑승자 수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정확히 파악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관련 문건도 일제에 의해 상당수 파기된 상태. 게다가 명부에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채 탑승한 조선인 수가 수천 명에 이른다는 게 생존자(전원 사망한 것으로 추정)들의 증언이다.
소요가 발생했다. 12,000에서 8,000천명 사이의 조선인을 부산까지 데려가야 할 일본 해군 승조원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부산에서 일본인을 싣고 와야지 왜 조선인을 부산으로 데려다줘야 하느냐, 부산에 도착하면 조선인들이 우리에게 보복할 거 아니냐, 이러면서 항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쾅쾅쾅! 폭발 후 침몰, 선체는 고철로 팔렸다
8월 22일 오후 10시. 배가 출발했다. 출항지는 오미나토항. 현재에도 일본해상자위대 지방대가 주둔하고 있는 군사요충지다. 목적지는 부산항. 오마나토에서 부산까지 거리는 1574km. 뱃길로 사흘 잡으면 충분한 거리다. 그런데 출항 직후 배는 예정항로를 벗어나 남쪽으로 치우쳐 일본 연해를 따라 항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24일 오후 5시경 돌연 교토부 마이즈루항으로 향했다. 마이즈루 앞바다, 해안에서 300m 지점에서 배가 멈췄다. 이어 엄청난 폭발음이 연속으로 들렸고 배는 두 동강이 나 침몰했다. 24일 오후 5시 20분. 고국으로 가는 귀국선 1호는 이렇게 수장되고 말았다.
일제가 밝힌 우키시마호 탑승자 숫자는 3,725명. 이중 조선인 524명과 일본 승조원 25명이 사망했으며 실종자 수와 생존자 수는 미상이라고 발표했다. 미군정 당국에는 그나마 조선인 사망자 수를 260명으로 축소해 보고했다. 그러면서 ‘미군이 설치한 기뢰와 충돌해 침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생존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또다시 죽음의 공포와 마주해야 했다. 군부대에 수용돼 있던 생존자들이 의문의 증기 폭발사고를 당한 것이다. 이 사고로 상당수의 조선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고 원인 또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고의에 의한 사고였을까? 그렇다면 일제가 조선인 모두를 몰살시키려 했다는 얘기가 된다.
1954년 우키시마호 선체가 인양된다. 일본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다. 민간기업(이노사루메지社)이 인양 작업을 수행했다. 말이 인양이지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침몰한 배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한 후 잔해를 끄집어냈다. 그리곤 그것을 고철로 팔았다. 침몰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핵심 증거가 깡그리 사라지고 만 것이다.
침몰원인은 ‘계획된 자폭’? 그 정황과 증거들
희생자 유가족들이 세 차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공식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2001년 일본 교토지방법원은 원고 일부에 대해 각 300만 엔의 위로금을 지불하라고 판결했지만, 오사카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여전히 일본은 ‘미군 기뢰’에 의한 폭침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침몰원인이 ‘일제에 의한 계획된 자폭’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증거와 정황들이 수두룩하다.
▲최단항로(원산)가 아닌 ‘오미나토-부산’을 예정항로로 선택
▲출항 직후부터 예정항로를 벗어남
▲연안을 끼고 항해(기뢰를 피할 의도가 없었다는 증거)
▲배에 폭발물이 실려 있었다는 일본 정부 기록물(발신전보철/일본 방위청 문서)
▲정원을 두세 배 초과한 상태인데도 돌 350톤 선적
▲일본 정부의 거짓 발표(탑승자 수 등등)
▲인양했을 때 배의 선체가 모두 바깥쪽을 향해 휘어진 상태
▲3~4회 폭발음(기뢰 폭발로 보기엔 비정상적)
▲폭발 시 물기둥이 없었음(목격자 증언)
▲갑자기 마이즈루항에 입항하려던 이유(연료 보충 등)가 불충분
▲폭발 직전 일본 해군들이 황급히 배를 빠져나감(목격자 증언)
▲증거 인멸(선체 수중 폭파해 인양, 고철로 매각)
▲당시 미군은 ‘(침몰 지역의) 기뢰가 클리어된 상태’라고 밝힘(승조원과 미군 간 통화내용)
▲침몰 지점 지척에 일본 해군기지, 그러나 구조에 나서지 않았음
징용자 대량 학살, 진상규명도 안 된 사건 다수
아오모리의 시모키다 반도. 지형이 험하다. 일본 해군은 이곳에 비행장과 격납고, 탄약저장고, 방공호, 항만시설, 철도, 터널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가 공격받을 경우를 대비해 수개월 버틸 수 있는 군수물자를 보관할 군수기지 건설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원했던 것이다.
우키시마호 폭침과 생존자에게 가해진 의문의 폭발사고. 이로 인해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증언과 목격담 그리고 남아 있는 자료 등에 의하면 그 수는 적어도 5000명 이상일 거라는 게 중론이다. ‘우키시마희생자추모협회’와 생존자들은 사망자가 최대 8000명에 달할 거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보복성 수출 규제로 국민감정이 고조되며 일본 상품과 여행 불매 등 ‘일본 보이콧’이 한창이다. 여기서 그치면 안 된다. 일제는 패망 전후 강제징용 노동자들 상당수를 물건처럼 ‘폐기처분’했다. 하지만 진상조차 제대로 규명된 것이 별반 없다. ‘우키시마호 사건’도 그중 하나다. 진상을 규명하고 배상을 받아내는 데 정부가 발 벗고 나서야 할 때다. 곧 영화가 개봉된다. 징용노동자 귀국선 1호 침몰 사건을 다룬 <우키시마호>가 오는 9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