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立春)을 일주일여 앞두고 찾은 바다건너 제주에는 봄기운이 물씬 풍깁니다. 한림공원 수선화 동산 매화나무 가지에 백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린 게 첫 신호였습니다. 뒤를 이어 대정읍 노리매공원의 매화나무도 봄 소식을 전합니다. 묵은 나뭇가지마다 순백의 매화가 다닥다닥 매달렸습니다. 서귀포의 칠십리시공원 매화동산의 홍매화는 선혈처럼 붉은 꽃을 피웠습니다. 매화뿐이 아닙니다. 산방산이 바라다보이는 대정들녘에는 진작부터 제주 수선화가 꽃을 피워냈고, 들판의 조각보밭들은 싱그러운 초록물결로 가득합니다. 위미리의 동백숲과 신천목장의 주황빛 이색풍경은 또 어떤가요.
이처럼 육지는 폭설과 한파로 봄은 아직 언감생심이지만 제주에는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올리듯 봄의 기운이 번져가고 있습니다.
제주의 명소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저마다의 정취가 빼어나지만 봄맞이가 목적이라면 서남쪽 한림읍에서 시작해 안덕읍을 거쳐 동쪽 성산 방향으로 잡는게 좋다.
봄의 전령 매화 소식은 한림공원에서 시작됐다. 수선화 정원의 매화나무 가지 끝에 톡 하고 백매화가 터진 것. 봄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올해 첫 매화였다.
가장 추운 시절인 동지 무렵에 꽃의 정(精)이 자라나기 시작해, 봄을 피우는 인동(忍冬)의 화군자(花君子)답게 순백의 꽃잎은 화사하고 향기는 그윽하다.
동행한 한림공원 송근우씨는 “올해는 지난해보다 조금 늦었지만 벌써 보름전 매화가 피웠다”고 했다.
한림공원의 명물은 70년 묵은 ‘수양매화’다. 흡사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축축 늘어진 ‘수양매화’는 금방이라도 꽃을 터트릴듯 부풀어 올라 있다.
백매화옆으로 ‘설중매(雪中梅)’로 이름붙여진 홍매화도 지천으로 피워났다. 매화의 발치에 무더기로 심어 놓은 수선화도 볼거리다.
한림공원의 매화는 이제 서귀포시 대정읍의 노리매공원으로 건너갔다. ‘노리매’란 ‘놀이’란 우리말에다 매화의 ‘매(梅)’자를 더해 만든 이름. 노리매공원은 아예 매화를 주제로 한 공원인데 묵은 나뭇가지에 드문드문 꽃을 피우는 옛사람들의 수묵화 ‘매화도’에서 만나는 진짜 매화다.
천지연폭포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서귀포 칠십리시공원 안에도 매화나무를 심어둔 작은공원이 있다. 26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한 곳에 심어져 있으니 한창 꽃이 피어날 때면 공원은 온통 그윽한 매화 향으로 가득찬다.
매화보다 먼저 봄을 알린것은 수선화다. 안덕면 사계리 일대는 산방산을 배경으로 피어나는 야생 제주 수선화의 정취가 으뜸이다. 잘 가꾼 정원도, 화원도 아닌 길섶에 가녀린 수선화가 무더기지어 아무렇게나 피어났다. 한번 피면 한 달 가까이 꽃대를 올리는 유채꽃과 달리 수선화는 짧게 피고 일순 져버린다. 봄날의 수선화가 더 귀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이런 수선화를 제주로 유배온 추사 김정희도 유독 좋아하고 아꼈다고 전해진다.
사계리 대정들녘 중에서도 대정향교와 산방산 사이의 도로변, 송악산~사계리 해안도로, 상모리 알뜨르비행장터 등지에서 야생 수선화를 볼 수 있다.
이곳의 수선화는 이른바 ‘금잔옥대’라 불리는 거문도 수선화와는 종류가 다르다. 제주의 수선화는 속 꽃잎이 마늘(마농)뿌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몰마농꽃’이라고 부른다.
몰마농꽃은 이제 제주에서도 흔하지 않다. 민가의 돌담 아래 가지런히 심어진 것은 십중팔구 ‘금잔옥대’들이다. 하지만 사계리의 묵은 밭과 들에 피어난 것은 모두 제주 수선화다. 그것도 화단을 일궈 키워낸 것이 아니라 밭 사이의 빈터나 돌담 아래 제멋대로 자라난 야생의 것이어서 감흥이 더하다.
수선화 피어나는 사계리의 밭과 들 앞에 서면 발아래로 야생화들이 화사하고 선명한 빛깔로 꽃을 피워내고 있다.
제주 수선화를 보고나면 인근에 있는 단산에 꼭 올라보자. 제주의 봄풍경을 바라보는 최고의 명당이다. 바굼지 오름이라고 불리는 단산은 오름의 형세가 박쥐를 닮아서 ‘바구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가 훗날 ‘바굼지’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단산은 벼랑과 바위로 이뤄진 험한 지형이지만 탐방로를 따라 오르면 정상까지 30분이면 충분하다. 단산에 오르면 산방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제주의 해안과 대정의 너른 들판이 마치 두루마리 지도를 편 듯 펼쳐진다.
배추, 마늘, 쪽파, 당근을 심어 놓은 진초록의 조각보밭 사이로 마을이 들어서 있고 그 너머는 모슬포 바다다. 바다 위로는 형제섬이 뚜렷하고 가파도와 마라도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서귀포시 신천리 신천목장도 들러보자. 제주 바다를 따라 꾸며진 올레 3코스와 맞닿아 있는 이곳은 초록바다와 오렌지 색깔이 더해진 이색풍광이 기다리고 있다.
드넓게 펼쳐진 바닷가 꽃밭은 짙푸른 바다와 대비돼 눈부시다. 따뜻해진 햇살에 주황빛이 도드라진 꽃밭은 다름아닌 귤 껍질이다.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맑은 날이면 귤 껍질 말리는 풍경이 장관이다. 잘 마른 귤피는 열풍 건조시킨 뒤 분쇄 과정을 거친다. 상등품(진피)은 한약재와 의약품ㆍ화장품 원료로, 하등품은 젖소 사료 등으로 사용된다. 진피는 위염이나 소화불량, 기관지염, 감기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울에 꽃을 피어 봄날까지 지고 피고를 거듭하는 동백은 겨울꽃이지만 사실 가장 아름다울때는 봄날이다. 아직 이르지만 봄의 춘기가 퍼지기 시작하며 동백들이 화르르 불붙듯이 타올랐다가 일제히 고개를 떨군다.
제주에서라면 구태여 찾아갈 필요 없이 어디서나 돌담을 두른 마을 어귀에서 동백꽃을 만날 수 있다. 도로변에 가로수처럼 심어진 동백나무도 흔하디흔하다.
이중 제주의 남쪽의 동백은 서귀포시 상예동, 남원읍 위미ㆍ신흥리가 대표적이다.
돌담을 따라 조성된 위미 동백 군락은 어린 나무에서부터 100살을 훌쩍 넘긴 늙은 나무까지 빼곡하다. 동백꽃은 가지 끝에 하나씩 매달려 붉은빛을 토해내고, 통째로 떨어진 낙화는 꽃길을 만들어 제 멋을 다한다. 숲으로 들면 꽃길과 어우러진 수평선이 아스라이 다가온다. 이웃한 신흥리 동백숲은 그 역사가 300년을 넘어선다.
눈길을 끄는 동백나무도 있다. 서귀포 이중섭갤러리 동산에 있는 동백나무는 붉은 색이 아닌 순백색의 홑동백꽃을 피운다. 아직 꽃잎을 열지는 않았지만 순백의 홑동백은 귀하디 귀하다.
제주=글 사진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jun21@asiae.co.kr
△가는길=제주 봄여행의 시작인 한림공원은 제주국제공항에서 1132 일주 해안도로를 타고 협재해변으로 가면 된다. 이어 차귀도 일몰, 노리매공원, 대정들녘 수선화, 단산, 용머리해안, 이중섭미술관, 위미동백숲, 신천목장, 성산일출봉 순으로 이동하면 봄을 만끽할 수 있다.
△이색체험=중문관광단지에 자리한 켄싱턴 제주호텔(www.kensingtonjeju.com)이 선보인 웰빙 프로그램이 눈길을 끈다. 2월말까지 운영하는 럭셔리 올인클루시브 '윈터 스토리' 패키지는 진정한 웰빙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모든 시설 무료 이용은 물론 국내 최초로 뷔페는 물론 한식, 이탈리안 등 정통 다이닝을 즐길 수 있다. 여기다 놀이도우미 '케니'와 함께하는 감귤 따기 체험, 커피 체험, 한라산 사라오름 , 바움지 오름 오르기 등 다양한 액티비티와 파티까지 모두 한번에 즐길 수 있다. 이중 '스카이피니티 풀'로 불리는 루프톱 풀은 환상이다. 옥상에 올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25m의 메인 수영장과 7m의 릴렉스 스파풀에 몸을 담그면 제주의 푸른 바다와 자연경관을 눈앞에 펼쳐진다. 아름다운 석양을 배경으로 사진촬영 서비스와 '원포인트 레슨 프로그램', 하우스 디제이가 선사하는 라운지 음악과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 '풀사이드 버블 파티' 등 즐길 거리도 다양하다. (가격 51만원부터~.) 1855-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