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흥행에 관한 논란
‘국제시장’이 1천만 관객을 빨아들였다(한국 영화 사상 11번째). 인구 5천만이 안되는 나라에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를 놓고,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땅의 고단한 아버지의 삶의 역정을 생생하게 보여준 영화에 대한, 대중의 당연한 갈채라는 의견과, 영화적 스킬이 기대에 비해 함량 미달이며, 영화에서 다룬 근대사에 대한 냉철한 의식도 부족한데도 감성팔이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는 혹평이 서로 흥분의 콧김을 높여가며 댓글굴비를 양산하는 상황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수구(守舊) 보수적인 정파의 문화책략에 1천만명이 넘어갔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1천만명의 의미에 대해 민감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충무공을 다룬 영화 ‘명량’이 흥행을 거뒀을 때는, 많은 이들이 국난을 극복할 진정한 리더십의 갈증 때문이라고 했고, ‘변호인’은 노무현전대통령에 대한 민심이라고들 했지만, 기실 관객이 그런 기민한 판단을 거쳐 엄선한 것이 아니라, 영화 관객의 저변이 확대되어 일정하게 재미와 화제성이 갖춰지면 입소문을 타고 그런 괴력의 숫자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장이 되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래야 ‘도둑들’이나 ‘겨울왕국’, ‘인터스텔라’의 흥행까지도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국제시장’의 1천만명 동원에 대해 지나친 의미부여는 난센스라는 얘기다. 그저 최루(催淚)만으로도 흥행은 충분하다.
하지만 윤제균감독(그는 ‘해운대’에 이어 두 번째 천만 흥행 영화를 만들어냈다)의 기량과 역사의식에 관한 품평과 맞물려 대중들이 ‘수준 미달의 영화’에 속은 것이라는 진단은 좀 어이없게 느껴진다. 전문가들이 체계적으로 수립해온 ‘영화의 수준’이 있고 그에 미치지 못하면 흥행해서는 곤란하다는 관점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흥행이란 영화를 자발적으로 즐기며 본 사람들의 숫자이지, 영화 품평가들이 치밀한 저울질을 거쳐 선택한 ‘투표’가 아니지 않는가.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그 원인을 분석할 수는 있겠지만, 거꾸로 그 원인이 충족되지 않았는데 왜 대중이 그렇게 몰려들었느냐고 꾸짖는다면 본말의 전도이다. 작품성과 흥행이 정비례하지 않는 까닭은, 양쪽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감독의 흥행 전략이 성공했다면 그것을 다른 잣대로 비웃을 것이 아니라 그 성과를 짚고 분석해주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2. 흥남부두 금순이와 막순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 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들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 날이 오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 안고 춤도 추어보자
굳세어라 금순아 / 현인 노래,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영화에서 덕수의 손녀가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 영화 ‘국제시장’은, 저 노래 한곡 속에 들어있는 아우성과 비원(悲願)을 2015년 천만명의 감수성으로 되살려낸, 하나의 이채로운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 오랫동안 이 노래는 이 땅에 울려퍼졌다. 전쟁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실감지수 100의 피눈물나는 기억이었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국제시장은 영화 제목이 되었고, 금순이는 막순이가 되어 부활했다.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나는 금순이가 국제시장 장사치기(장사치)의 애인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야 비련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제균감독은 그때 인파 속에서 손을 놓친 어린 여동생이라고 읽어냈던 모양이다. 이게 훨씬 사실적이다. 영화에서 막순이는 1945년생(해방둥이)으로 나온다. 그러면 덕수는 1942년생쯤 될 것이다. 흥남부두에서 동생과 헤어질 때 덕수의 나이는 9살, 막순이는 6살이었다.
흥남은 2005년에 지명이 사라졌지만 함경남도 함흥의 남동쪽 12km에 있다. 한반도 지도로 보자면, 흥남은 호랑이의 뒷목 부근인 동해안의 부두이다. 그때 그날로 가보자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차갑던 흥남부두는 1950년 12월23일 상황이다. 1.4 이후 나 홀로 왔다는 건, 사람파도처럼 밀려내려오는 중국공산군에 쫓긴 1.4 후퇴의 피난대열에 끼어, 흥남 부두에 여동생을 둔 채 부산으로 내려왔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1950년 6월 이후 남쪽으로 밀려내려가 부산 근방까지 후퇴했던 유엔군과 국군은 석달 만인 9월 15일 맥아더원수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승기를 잡는다. 이에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가 38선을 돌파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한다. 통일을 코 앞에 둔 때에 북측에서 중공군이 합세하여 대반격을 함으로써 다시 전세가 뒤집힌다. 워낙 남하 속도가 빨라서 적군이 먼저 내려와 남쪽 후방을 차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맥아더 사령부는 퇴로가 막힌 유엔군과 국군을 흥남 항구에서 동해안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것이 50년 12월12일이었다. 이 작전에 동원된 미군 수송선은 193척이었으며, 미 10군단과 한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 등 병력 10만5천명이 이 배를 타고 남하했다. 차량 1만7500대, 연료 2만9000드럼, 탄약 9000톤 등 장비 35만톤도 함께 수송했다.
그런데 이때 한국의 쉰들러 리스트로 불리게 된 28세의 한국인 군의관 한 사람이 있었다. 2007년 11월 25일 타계한 현봉학 박사가 그분이다. 그는 당시의 미10군 단장인 알몬드 장군과 미국 상선인 메레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의 선장인 레너드 라루 선장(2001년 타계)을 열흘에 걸쳐 집요하게 설득하여, 흥남부두로 몰려든 피란민들을 수송하도록 한다. 그는 알몬드 장군(당시 소장)의 통역관이 된다.
화물선이었던(탑승 정원은 47명이었다는 얘기도 있다)의 메레디스호의 최대 탑승 가능 인원은 2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무려 1만4천명을 태웠다. 몰려드는 사람을 태우는 시간만도 13시간 40분이 걸렸다. 올라타면 살고 못 타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배로 오르는 밧줄을 잡았다. 대롱대롱 매달리고 젖먹던 힘을 다해 기어 올랐다. 한국말을 모르는 미군들은 오직 한 가지 말만 했다. “빨리 빨리!” 영하 30도의 혹한에 눈보라까지 들이쳤다. 승선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부두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마침내 탄 사람과 남은 사람의 운명이 갈라진다.
콩나물시루 배는 23일 오전11시에 출항했다. 덕수의 여동생 막순이가 밧줄에서 떨어진 것도 그 무렵이다. 마지막 배가 떠난 뒤 흥남부두는 미군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그곳에 있던 군수물자 생산 시설들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거제도 장승포 항에 정박한 것은 크리스마스인 25일 낮 12시42분이었다. 라루 선장은 1960년 이런 발언을 했다. “10년 전 크리스마스 때 지구 반대편에서 한 놀랍고 경이로운 항해를 잊을 수 없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사흘 동안 신이 우리와 함께 항해했다고 나는 믿는다.” 항해 동안 그 많은 피란민 중에서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메레디스호는 최다 인명 구출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오히려 5인의 새 생명이 탄생했다. 미군들은 그 아이들을 ‘김치 파이브(5)’로 불렀다.
다시 ‘굳세어라 금순아’로 돌아가자.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떠나온 덕수는 영도다리 난간에 뜬 초생달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막순이를 생각한다. 자기가 손을 놓는 바람에 놓친 여동생. 그에게 주문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굳세어달라’는 막연하고 막연한 부탁 뿐이다. 생을 포기하지 말고, 만남을 포기하지 말고, 통일되는 날까지 기다려만 달라는 것이다. 윤감독이 영화의 후반부에 이산상봉 스토리를 넣은 것은, 저 노래의 희망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현인은 어떻게 이 노래를 불렀을까. 현씨가 그리 흔한 성도 아닌데, 흥남 쉰들러인 현봉학씨와 흥남 금순이를 노래한 현인이 동씨(同氏)인 것이 범상치 않게 느껴진다. 현인은 그러나 부산 구포에서 태어난(1919년생) 사람으로 일제 말에 일본으로 건너가 우에노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일제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태양’이란 악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해방 뒤인 1946년에 귀국해 악단 활동을 했는데 이 무렵 작곡가 박시춘을 만나서 가수로 데뷔한다.
한편 작사가 강사랑은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부산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영도다리 옆 항구다방에서 파이프를 물고 서 있다가, 배에 씌어진 ‘금순’이라는 낙서를 보고 착상이 떠올라 이 노랫말을 썼다고 한다. 금순이라고 씌어진 그 낙서의 실제인물은 ‘조금순’이라고 한다. 강사랑은 대구 오리엔트 레코드사의 문예부장으로 있던 옛 친구 박시춘을 찾아가 더부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에게 이 노랫말을 전해준다. 박시춘은 크게 감명을 받아 레코드사 2층의 다방에 앉아 바로 작곡을 했다고 한다. 마침 자정이 넘어버렸는데, 가수 현인을 불러 군용담요로 겹겹이 가리고 이 노래를 녹음했다. 모두 전해지는 얘기들이니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전쟁통에 만들어지고 불린 노래의 숨찬 탄생 배경을 증언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3. 아버지가 없는 나라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Ode to my father'(내 아버지에게 바치는 노래, 아버지頌)이다. IMF시절 ‘아버지’라는 소설이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대박을 터뜨린 일이 있지만, 어느때부터인가 ‘아버지’는 정치색이 생기기 시작한 듯하다. ‘어버이연합’이란 이름의 단체가 주도하는 시위나 ‘가스통할배’나 ‘일베’로 상징되는 극우적 기치들이, 아버지를 대표하는 한 이미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덕수 또한 일흔을 넘긴 나이다. 늙어가는 아버지들은 국가가 챙겨주는 푼돈으로 근근히 노년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어떤 때에는 자식의 도움보다 더 귀하고 고맙다. 이분들의 표가 보수정권의 정치적 입지를 먹여살리는 중요한 기반인 점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아버지는 대한민국에서 그냥 생물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굴절과 폭압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권력 추수(追隨)적인 그림자를 드리운 아버지가 된 점이 있다. 그 점이 이 영화에 대한 오해나 불편한 시선을 부르는 이유가 되었다.
덕수는 흥남부두에서 아버지와 헤어졌고, 다시는 못 만났다. 어린 날의 실부(失父)는 그의 인생 모두를 바꿔놓았다. 비록 어렸지만 맏이로서 가장 노릇을 해야했고, 동생들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인생 모두를 희생했다. 자기의 삶이 없는 세대. 자신은 아버지를 잃었지만, 평생 아버지여야만 했던 인생. 그 아버지를 윤제균은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은 사실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렇게 아버지 역할만 하고 평생을 살아왔지만, 정작 자식들에게선 ‘아버지’ 대접을 받지 못하고 한켠으로 밀려나 독거노인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지금 현재 얼어붙은 방구석의 아버지. 그 아버지가 다시 이 땅에 있는 그 남자들의 현재적인 도메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거기까지 말하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이야기까지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현실의 발바닥 밑에 있는, 지난 날의 숨찬 이야기만으로도, 아버지를 재발견해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흥남부두와 이산상봉 사이, ‘국제시장’은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을 담았다. 파독(派獨)광부와 월남파병이 그것이다. 아버지가 겪은 현대사 중에서 왜 하필 이 두 가지를 택했는가. 4.19도 있었고, 유신타도 시위도 있었고, 대통령 시해와 권력 찬탈도 있었으며, 광주의 피비린내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다 빼먹고 왜 외국 가서 돈벌어오는 일만 ‘아버지의 역사’ 속에 넣었는가. 영화가 만만한 소재를 찾아서 넣었거나, 혹은 아버지의 얼룩을 줄이고 영광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것들만 넣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맨몸으로 내려와 국제시장 장사치로 살아내는 삶에서, ‘정치’는 멀었고 입에 풀칠을 해야하는 ‘경제’는 가까웠다. 파독과 파월은 제 목숨까지 내걸고 돈을 벌려고 했던 아버지의 몸부림을 표상하기에 알맞은 소재이다. 부산에 걸맞지 않은 ‘국제시장’이란 이름과, 독일과 베트남이라는 글로벌 시장은 일종의 기묘한 연장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평자들은, 덕수의 가치관이나 고뇌같은 것이 보이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지나치게 순응적이고 역사에 수동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주연으로서의 캐릭터가 구축되지 못했다는 평가이다. 물론 더 섬세한 방식이 있을 수는 있었겠지만, 덕수의 생에는 ‘자기’가 없다는 그 점이 가장 생생한 이력이 아닐까. 돈벌이는 그의 그림자를 숨기기 위한 알리바이가 아니라, 그것을 빼고나면 아무 것도 없어지는 바로 그 필사의 지점이었다.
덕수가 역사와 만나는 스토리를 엮기 위해 영화 ‘포레스토 검프’를 참고했다는 얘기가 있다. (첫 장면에서 시장통을 날아가는 나비도 그 영화에서 착안한 것이다)개인의 삶과 역사적 상황이나 순간이 접점을 이루면서 어떤 통찰과 위트를 자아내는 기법을 쓰고 싶었다는 얘기리라. 그런 시도에는 별로 성공한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가수 남진이 월남 참전 군인이었다는 점을 포착해, 그가 전쟁터에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덕수를 구해주는 상황을 만들고 그 은혜를 못 잊어, 나훈아보다 남진을 더 좋아하고 늙어서까지도 시장 상인들과 그에 대해 거친 논쟁을 벌이는 장면은 정교하고 맛있다. 김봉남(앙드레 김)과 정주영의 등장 또한 이 나라의 경제적 아이콘들을 국제시장 속으로 끌어들인 감독의 재치이다.
이것보다 더 잔잔한 여운을 남긴 것은, 아마도 국제시장의 낡은 간판 ‘꽃분이네’가 아닐까 싶다. 영화 첫 장면에서도 이 간판이 비친다. 이 간판은 덕수의 희망이다. 흥남부두에서 아버지는 배 위의 아들에게 소리쳤다. “국제시장 꽃분이네를 찾아가라. 나중에 거기서 만나자꾸나.”그 말 때문에 덕수는 이 가게를 인수했다(고모가 돌아간 뒤 고무부가 팔려고 하자 가게 살 돈을 만들기 위해 월남까지 다녀왔다). 덕수는 가족들이 그 가게를 팔자고 했을 때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 가게와 그 간판은 ‘아버지를 만날 유일한 랜드마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1910년생이라고 이산상봉 때 덕수가 밝혔다.(아버지 나이가 당시로선 조금 어색하다. 맏이인 덕수를 33세때 낳았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이로 하면 106세이시다. 더 이상 살아계실 확률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에야, 그 희망을 접은 것이다. 덕수는 평생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겐 아버지가 있는가. 우리에게 아버지는 무엇인가. 나는 누군가의 어떤 아버지이며, 어떤 아버지로 자리매김되어 있는가. 아버지가 ‘아빠’로 바뀌면서, 우리는 자식들과 드디어 소통도 하고 엄숙하고 딱딱하기만 한 자리에서 내려와 가족의 구성원으로 자리잡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존경은 그 호칭의 실종과 함께 꺼져가고, 대신 들어앉지도 나앉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무(無)권위의 가장이 되어, 덕수처럼 이해 못할 성질만 버럭버럭 내고 있는 건 아닌가. 어느 칼럼처럼, 애완견보다 후순위로 밀리는 신세가 되어 ‘개보다 남자’를 중얼거리는 그 아빠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가족들을 위해 나름으로 분투해온 삶이 모두 허사(虛事)처럼 느껴지는 참담의 노후를, 아버지의 굴레라고 다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가. 영화가 물컹하다고 ‘감성몰이’라고 말하기 전에, 저 영화가 누선을 자극하는 사회의 통증과 세상의 반면(反面)을 가만히 읽어내는 건 어떨까. 시대착오적이고 상투적인 옛날타령일 뿐이라고? 1000만에요.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