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집’은 각별했다. ‘내 집’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보여주는 척도였다. 보통 사람들에게 거의 유일한 재산증식 수단이기도 했다. 더 이상 끼어들 자리가 없을 것 같은 곳에도 자고 나면 또 집이 들어섰다.
그 사이 집이 필요한 사람은 거꾸로 빠르게 줄었다. 우리 경제는 젊은이들에게 결혼을 늦추거나 포기하게 했다. 주인을 찾지 못해 “여기 집이 있소!” 외치는 형형색색 주택분양 현수막이 거리를 점령했다. ‘빈집’이 스멀스멀 도시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지난주 ‘빈집 살리기’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6개월 이상 비어 있는 아파트나 빌라, 단독주택을 개보수해 저소득층 주거복지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만큼 서울에 빈집이 많다는 뜻이다.
‘전세대란’ 시기에 등장한 ‘빈집 살리기’ 정책. 이 아이러니는 한국사회에서 집의 위상도 양극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보다 먼저 저출산·고령화를 겪으며 부동산 거품이 꺼진 일본은 전국에 빈집이 1000만채나 된다. 혹시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 도시의 빈집들은 어떤 속사정을 안고 있을까.
스멀스멀 도시를 잠식하는 ‘빈집’
지난 10일 오전 찾은 인천 중구의 주택가. 지난해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재개발 소문이 돌던 곳이다. 흐지부지되면서 졸지에 빈집이 대거 생겨났다. 개발 차익을 노리고 낡은 집을 샀던 사람들이 들어가 살지도, 전세를 주지도 못한 채 버려두고 있다. 노인이 많은 동네여서 집주인이 고독사해 집만 덩그러니 남겨진 경우도 있었다.
골목은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큼 좁았다. 거뭇거뭇 먼지가 내려앉은 슬레이트 지붕에는 얇은 나무판자와 기왓장이 규칙 없이 덮여 있다. 주민센터에서 설치한 안전 장벽이 초라한 행색을 감춰주듯 빈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장벽 너머로 누군가 던져 넣은 깨진 소주병이 눈에 들어왔다.
200여m 떨어진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어른은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낮은 출입문에 검붉은 녹이 슬었다. 하늘색 페인트가 발린 담벼락은 옛 주인이 정성스레 꾸민 티를 살짝 내비쳤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담 위에 묻은 흙이 누군가 여길 밟고 넘어 다닌다는 짐작을 하게 했다.
이 동네에는 빈집이 11채 있다. 원래 18채였는데 지난해까지 7채가 철거됐다. 구청은 빈집이 사라진 자리에 운동기구와 벤치를 놔뒀다. 휴식공간으로 만들려는데 주변에 아직 철거되지 않은 빈집들이 버티고 서 있어 골치라고 한다. 주민센터 관계자는 “빈집 소유자들이 나서서 관리를 해야 하는데 대부분 방치하고 있다. 구청에서 매입해 녹지로 조성하려 해도 가격을 너무 높게 불러 번번이 실패하곤 한다”고 말했다.
인근 부동산 중개업자는 “노숙인이나 불량 청소년들이 드나들까봐 주민들은 철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런 움직임이 보이면 빈집 소유주들은 “내 집에 손대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재개발이 될 경우 땅만 있는 것과 그 땅에 집이 서 있는 것은 보상 가격이 다르다. 이 때문에 빈집과의 불안한 동거가 계속되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도 이런 ‘빈집촌’이 여러 곳 있다. 같은 날 오후 동대문구 이문1동 재개발구역에는 무려 55채가 비어 있었다. 역시 재개발 바람에 사고 팔리면서 주민이 떠나고 사람이 살지 않게 된 집들이다. 승용차로도 올라가기 힘들 만큼 비탈진 골목 구석구석에 ‘특별순찰구역’이란 표찰이 붙은 집들이 보였다. 관할인 동대문경찰서가 붙여 놓았다.
빈집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가 워낙 잦다보니 집주인들은 ‘침략자’와 전쟁을 벌인다. 출입문을 잠가놓고 철제 판재로 장벽을 치는 건 약과다. 집안에 일부러 건축폐기물을 쌓아놓거나 아예 철거하다시피 건물을 무너뜨려 놓기도 한다. 동네는 빠른 속도로 음침해졌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태다. 빈집 주변 주민들은 하나같이 큰 개를 기른다. 골목을 기웃거리는 기자에게 한 주민은 “도둑인 줄 알았다”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거기 사람이 있었다
산책 나온 고양이가 갑자기 멈춰 섰다. 코를 벌렁거리더니 재빠르게 한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고양이를 쫓아가 마주한 빈집에서는 누군가 목을 맨 채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난해 11월 충북 청주에 사는 A씨는 동네 재개발구역의 폐가에서 B씨(59)의 시신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담벼락에서 불과 3m 떨어진 지점이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이 동네를 자주 서성이던 B씨는 아팠다. 경찰은 그가 빈집에 머물다 지병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봤다.
빈집에선 많은 일이 일어난다. 지난해 5월에는 경남 통영시의 한 폐가에 불이 났다. 7년 전부터 비어 있던 집이다. 사람들이 “빈집이라 다행”이라고 쑥덕이던 사이 화재 현장에서 심하게 그을린 40대 남성의 시신이 나왔다. 누군가 소리 소문도 없이 빈집에 들어가 살다 화를 입은 것이다.
2011년 1월 경기도 화성시 주택가 빈집에선 여중생이 잠을 자다 불에 타 숨졌다. 3개월 전에 가출해 이곳저곳을 떠돌다 이 빈집에 ‘정착’한 경우였다. 소녀는 버려진 매트리스와 이불을 주워다 추위를 달랬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쓰던 게 화재로 이어졌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지난해 11월 시내 36개 재개발구역의 빈집 7535가구와 그 일대를 일제 수색했다. 노숙인 4명이 퇴거 조치됐고, 수배자 2명이 붙잡혔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가출해 갈 곳이 없어 빈집에 머물던 청소년 65명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경찰은 빈집마다 일일이 버려진 가재도구를 치우고 출입문을 봉쇄했다.
재개발구역을 제외한 도심 속 빈집은 정확한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상 정비사업구역에 있는 빈집은 관리할 근거가 있지만 재개발 해제구역이나 일반 지역의 집들은 얼마나 비어 있는지 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주택보급률은 2013년 103%를 넘어섰다. 전국 미분양 아파트는 지난해 말 기준 4만379가구나 된다. 이런 빈집들은 사고라도 나야 비로소 그 황량한 모습이 드러난다.
‘
하우스 노마드족’의 등장
빈집의 증식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다. 20, 30대는 빚을 내서 집을 샀다가 집값이 폭락해 ‘하우스푸어’로 전락하는 부모를 보며 컸다. 집에 거금을 들이려는 이가 많지 않다. ‘88만원 세대’를 쓴 경제학자 우석훈씨는 지난해 12월 한 강연에서 “독신자가 늘어나는 상황인데 일가족이 필요한 공간과 독신자가 필요한 공간이 다르다보니 기존의 집들이 많이 비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를 세계적 현상으로 봤다.
이런 추세가 빈집 증가세와 맞물려 ‘하우스 노마드(House Nomad)족’을 낳았다. ‘몸 누일 공간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만큼만 집을 빌려 사는 이들이다.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는 ‘빈마을’이라는 이름의 커뮤니티가 있다. 동네 빈집들을 누구나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는 개방형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한다. 숙박비는 하루 2000원. 집 관리는 들어와 사는 이들 각자의 몫이다. 살림을 가져올 수도 있다. 브라질 여행을 앞두고 거주지가 마땅찮게 된 청년, 조용한 곳에서 학위논문을 쓰고 싶은 대학원생 등이 산다. 이들에게 집은 ‘잠시 머무는 공간’일 뿐이다.
일가족의 이주나 독거노인의 사망 등으로 생기는 지방 도시의 빈집은 이런 하우스 노마드족에겐 훌륭한 안식처가 된다. ‘농어촌 빈집 주인찾기운동’을 벌이는 홍은숙씨는 “어떻게 하면 지방 빈집을 구할 수 있는지 묻는 사람이 많다”며 “쓸 만한 빈집은 1년에 30만원 안팎의 임대료를 받지만 무상으로 빌려주는 곳도 많다”고 했다.
빈집 활용한 지자체의 복지실험
우리보다 앞서 집값 폭락과 저출산·고령화를 겪은 일본에서도 빈집은 골칫거리다. 현재 도쿄에만 100만채, 전국에 1000만채 가까이 버려져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나가노현 사쿠시, 후쿠오카현 부젠시 등에는 빈집 관리와 임대 알선을 전담하는 ‘빈집은행’까지 등장했다. 우리나라 부동산 사이트 같은 홈페이지에 빈집 정보만 빼곡히 올려놓는다.
지난 5일 서울시는 ‘빈집 살리기’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6개월 이상 비어 있는 아파트나 단독주택 등을 민간 임대주택으로 바꿔 저소득층에게 제공하는 정책이다. 개보수 비용의 절반, 최대 2000만원까지 서울시가 대주고 나머지 비용은 2%대 이자로 싸게 빌려준다. 처치 곤란한 집을 가진 이들과 그런 집도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취지다.
집을 집으로만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사례도 있다. 지난해 대구 중구에서는 빈집을 텃밭으로 꾸미는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인근 경북대 학생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마을 분위기가 달라지고 범죄 걱정도 줄었다고 한다. 도시의 빈집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