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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 日本人 가네코 후미코에 환호..
문화

영화 '박열', 日本人 가네코 후미코에 환호

강병준 기자 staff102bd@hanmail.net 입력 2017/06/29 21:12
▲ 박열 : 고향 문경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던 박열은 도쿄에 건너가 반제국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고,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불령사를 창립하여 항일활동에 매진했지만 간토 대지진 당시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장기간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민단 초대 단장으로 활동하다 귀국했지만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었다.[뉴스프리존= 강병준기자]  '박열'이 개봉 첫 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29일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지난 28일 개봉한 '박열'은 일 관객수 20만 1974명, 누적 관객수 22만 1151명을 모았다. 917개 스크린에서 4191회 상영됐다.  

영화 ‘박열’은 1923년 도쿄, 6천 명의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조선 최고 불량 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후미코’의 믿기 힘든 실화를 그린 영화. ‘박열’에서 일본 제국을 뒤흔든 ‘박열’의 신념의 동지이자 연인으로 완벽하게 몰입해 불꽃 투혼을 펼친 ‘박열’에서 역사보다 더 뜨거웠던 불덩이 같은 청춘 ‘박열’과 함께 거침없이 저항하며 불꽃같이 타올랐던 ‘가네코 후미코’ 만큼 한눈에 매료 시킨다.

박열이 가네코 후미코와의 만남

박열에게는 평생의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있었다. 본토인과 식민지 주민으로서 이전에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두 남녀가 도쿄에서 만나 생사를 함께 하게 된 사연은 드라마틱하면서도 비극적이다.
 
▲ 가네코 후미코요코하마 출신의 가네코 후미코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조선으로 건너와 7년 동안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부강리에 살면서 할머니와 고모에게 모진 학대를 받았다. 그로 인해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을 미워하게 되었고 그런 부조리한 상황을 야기한 제국주의 일본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1919년 4월 일본으로 돌아온 가네코 후미코는 도쿄에서 여학교 졸업검정시험을 치른 다음 여자의전에 진학하고자 했다. 하지만 금전에 눈이 먼 아버지가 자신을 외삼촌에게 팔아넘기려 하자 집을 뛰쳐나와 도쿄에서 신문판매대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어학원에 다녔다.

1920년 11월, 박열은 조선인 고학생, 노동자들과 함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고학생동우회를 창립했다. 간부는 그를 비롯하여 김약수, 백무, 최갑춘, 황석우, 임택룡 등이었고 회원 수는 200명이 넘었다. 그해 12월 9일 일본사회주의동맹이 결성되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듬해인 1921년 11월 29일 박열은 원종린, 김약수, 황석우, 백무, 손봉원, 정태성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망라한 흑도회를 결성하여 반제국주의투쟁을 전개했다.

그 무렵 이와사키 오뎅집 점원으로 일하던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 히라사와 다케노스케와 아나키스트 다카오 헤이베에 등 노동사 멤버들과 교류했고, 그들의 소개로 조선인 아나키스트 원종린, 공산주의자 정우영, 김약수, 정태성 등을 만났다. 당시 사회주의 잡지를 즐겨 읽던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2월, 정우영이 보여준 《청년조선》 교정쇄에서 박열이 지은 ‘개새끼’란 시를 읽고 전율을 느낀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 <개새끼>

이 시에 대한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네코 후미코는 정우영의 하숙집에서 박열을 만났다. 그 무렵 박열은 반일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소수의 권력자가 국가사회를 강제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실망한 나머지 무정부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 영화의 한 장면, 가네코 후미코과, 박열


당시 일본 사회운동가들의 배신과 변절에 염증을 느낀 박열은 ‘강자와 약자의 투쟁, 약육강식 관계가 우주의 대원칙’이라는 전제 하에 ‘모든 사물에 반역 복수함으로써 만물을 멸하는 것이 위대한 자연에 대한 합리적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한 상태였다. 거기에는 약자인 조선을 학대하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그렇듯 철저한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기성의 가치관에 저항하는 박열에게 깊은 신뢰와 사랑을 느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3월 초순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4월 하순부터 두 사람은 도쿄부 에바라군 세타가야의 데이지리에서 신발가게를 하는 아이카와 신사쿠의 이층 방을 얻어 동거를 시작했다.

1922년 7월 10일,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흑도회 기관지인 《흑도(黑濤)》를 창간하고 항일 세력 규합과 선전 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식민체제의 근본적인 파괴와 의열투쟁을 강조하는 박열과 대중적인 전위정당을 추구하던 김약수가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유 등은 흑우회를 세움으로써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흑도》를 폐간하고 역설적인 제호인 《뻔뻔스러운 조선인》을 창간했다. 이 잡지는 1923년 3월에 발간된 3호부터 《현사회》로 제호를 바꾸어 4호까지 발간했다. 그 무렵 두 사람은 불령선인의 지도자급을 가리키는 ‘요시찰 조선인 갑호 해당자’로서 일본경찰의 감시와 미행에 시달렸고 무려 50여회에 달하는 예비검속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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