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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전, 마산 3·15 의거를 기억하세요?..
기획

60년전, 마산 3·15 의거를 기억하세요?

김용택 기자 chamstory@hanmail.net 입력 2020/03/16 10:17 수정 2020.03.16 10:23

“그들을 용서는 해 주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유대인들의 수난사를 재현해 놓은 ‘야드바셈’이란 역사박물관 출구에 적혀있는 글귀다. 히틀러에게 6백만 명이 학살당한 역사를 두고 이스라엘 국민들의 가슴에 새기자는 글이다. 우리 국민은 60년 전, 1960년 3월 15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어제는 경남 마산에서 일어난 3·15의거 60주년을 맞는 날이다. 코르나 19 때문이기만 할까? 2·28대구의거, 3·15마산의거… 일찍이 민족의 선각자 단재신채호선생님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1. 4할 사전투표: 선거당일 자연 기권표와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전체 유권자 4할 정도의 표를 미리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함에 넣어둔다.

2.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미리 짜둔 3인조, 5인조 별로 조장의 확인 아래 투표하여 자유당 선거위원에게 보여준 다음 투표함에 넣는다.

3. 완장부대 활용: 자유당 완장을 찬 사람들을 여럿 투표소 주변에 배치시켜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자유당에게 투표하도록 유도한다.

4. 야당 참관인 축출: 민주당 측 참관인을 매수해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구실을 붙여 투표장에서 축출한다.

이승만정권이 장기집권에 눈이 어두워 민주주의를 파괴한 부정선거. 투표함 교체, 개표 시 표 바꿔치기 등 모든 투표구에서 자유당 후보 득표율이 85프로 이상이 되게 할 것… 등을 지시한 부정선거 행동지침이다. 이승만의 자유당은 대선 직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유세기간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이승만의 당선이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당시, 85세의 고령에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던 이승만 사후를 대비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 계획을 세운다.

투표함의 30%정도를 이승만 이기붕으로 미리 채워놓고, 선거 전에 미리 이기붕 표로 채우거나 이기붕 표로 채워진 투표함으로 바꿔치기, 선거 전에 미리 이기붕 표로 채우거나 이기붕 표로 채워진 투표함으로 바꿔치기, 선거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들을 지도한다며 3~5인씩 한 조로 투표하게 한 것. 물론 각 조의 조장은 당연히 자유당 후보를 찍게 유도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재물을 뿌리면서 자유당 투표를 독려하거나 심지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선거인 명부에 올리기까지 했다.

선거 결과는 당연히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되었다. 그런데 선거결과, 조작을 너무 열성적으로 한 나머지 이기붕의 득표율이 99%를 찍고, 일부 지역은 총유권자를 넘긴 115%가 나오기도 했다. 당황한 그들은 이승만 80%, 이기붕 70%로 줄여서 발표하는 어이없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유권자들은 이 기막힌 부정선거에 투표권을 우롱당한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온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던 경찰은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경찰과 충돌하게 된다. 1·2차 마산 시위에서는 마산시내 8개 고등학교가 모두 참가 하자 당황한 경찰이 무차별 총기를 발사. 80여 명의 사상자(14명 사망)가 발생하고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공산당으로 몰려 참혹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부정선거에 항의한 3·15의거를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4월 11일 3·15의거 후 행방불명이 됐던 마산상고 입학생(당시는 4월 1일이 개학 일이었다) 김주열군의 시신이 27일 만에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 떠올랐던 것이다.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처참한 모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월 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전 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고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4·19혁명은 이렇게 3·15의거의 연장 선상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4·19혁명은 어느 날 우연히 일어난 혁명이 아니다. 장기집권에 눈이 어두웠던 이승만정권은 3·15선거승리를 위해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 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하는가 하면 야당선거일에 학생들의 소요가 두려워 일요일인 2월 28일 등교를 지시한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며 자유당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된 2·28대구학생의거. 그리고 경찰의 총칼에 맞서 부정선거에 항거한 3·15마산의거가 없었다면 어떻게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은 선열들의 피 흘려 싸운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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