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이종선 기자]할아버지는 점심을 왕대포(막걸리)로 대신하고, 할머니는 칭얼대며 조르는 손자 손잡고 약장수 구경에 빠져 늦게 서야 길거리 긴 나무의자에 걸터앉자 장국밥 말아 먹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장날 장터에서나 구경할 수 있었던 정감 가는 사라진 용품들이 수두룩하다.
됫박성냥, 꽝밥, 비과, 십리사탕, 당원, 걸레빵, 노랑고무신, 참빗, 색경, 동동구루모, 고쟁이, 몸빼, 삐딱구두 등등….
그런데 불과 십수년 전부터 규모도 환경도 좋은 대형할인매장이 속속 들어서면서 장 보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 서민의 애환을 함께해 온 재래시장 풍경은 이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20세기 추억 속에 묻혔다.
예산군은 예로부터 전국에서 알아주는 큰 장터가 있어 보부상들이 호황을 누렸으며, 그때 그들의 발자취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조선시대 상인조직의 하나로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보부상들의 활동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예덕상무사 유품’이 바로 그 것이다.
덕산면 사동리에 보존된 예덕상무사는 조선시대 말 보부상을 거느려 다스리던 정부기관으로 중요민속자료 30호로 지정된 28점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보부상(褓負商)이란 당시 값비싼 사치품(필묵.금.은.동)을 지니고 팔러 다니던 보상 즉 봇짐장수와 지게에 생선, 소금, 옹기, 나무그릇 등 부피가 크고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을 지고 다녔던 부상인 등짐장수인 2개 상단을 일컬어 속칭 장돌뱅이라 불렀다.
주로 패랭이 모자나 삿갓을 쓰고 다녔던 이들의 행상은 일제 강점기 보부상 말살정책에도 꿋꿋하게 예산지역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 1936년 장항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5일장으로 한층 발달했다.
바로 고덕면 한내장이 4.3 만세운동의 집결지로 5일장에 5000여명의 장꾼들이 모여 왜경과 맞섰던 대표적인 전통 재래시장이다.
그때 이미 예산은 특산품이었던 사과를 길가나 상점 어디든 쌓아놓고 흔하게 팔았으며, 이정표도 빨간사과를 그려 넣어 홍보했던 자료가 남아 있어 보부상들의 상품과 사과는 함께 높은 인기를 누렸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 후 예산읍 상설시장과 역전시장이 날짜를 달리해 지금까지 각각 5일장이 2번서는 것은 전국에서도 드문 일로 과거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시장이 크게 성행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난장판이 벌어지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온 마을 사람들 수만명이 몰려나와 밤낮 따로 없이 즐겼던 예산의 큰 자랑거리였으나, 이제는 그때를 재현할 수 없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난장판이란 원래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몰려든 선비들이 질서 없이 들끓은 데서 유래됐다고 하지만, 요즘처럼 상점이나 대형마트가 없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날짜를 정해 서로 필요한 물건을 사고팔았다.
그리고 이를 알리기 위해 장이 서는 며칠 동안을 장마당에서 씨름, 줄다리기, 윷놀이, 남사당패 놀이, 화투놀음 등 온갖 민속놀이를 즐긴 데서 비롯됐다.
현재 예산읍 예산리 6구는 그 당시 시장 길이가 무려 오리(2km)나 돼 오리장뻘로 불리었다.
장터와 난장판도 함께 자취를 감춰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지금은 어지러운 간판만이 즐비하게 들어선 한적한 상가로 변해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한때 18만에 이르렀던 예산군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면서 시장경제가 자꾸만 침체돼 가고 있는 것이다.
물건을 사는 사람보다 오히려 상인 숫자가 더 많아진 과거 보부상들의 활동무대였던 오리장터, 지금은 코로나의 여파로 여기를 지키는 한 상인의 긴 한숨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 깃든 상념은 그저 애처롭기만 하다.
예산군은 내포문화권 개발사업의 핵심사업인 내포보부상촌 조성사업을 오는 4월 개장을 목표로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내포보부상촌은 덕산면 사동리 일원 6만3784㎡ 터에 국.도.군비 등 총 사업비 479억원이 투입돼 유통문화전시관 1동(연면적 4926㎡)을 비롯해 난장, 장터, 어귀, 전통체험마당, 체험공방, 테마거리, 보부상 체험길 등이 조성된다.
내포보부상촌이 개장되면 지역의 역사.문화 보전 및 발굴, 내포문화 관광산업 활성화, 내포신도시 휴양시설 확충 등 전국을 대표하는 보부상의 근거지로 각광받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