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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광복회 등 "친일경찰 무차별 폭행, 반민특위 급격 와해"

이명수 기자 lms@pedien.com 입력 2020/06/06 21:23 수정 2020.06.06 21:56

 

시민단체가 1949년 6월 6일을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로 규정하고 경찰청장의 사과를 촉구했다. 군 관련 인권단체인 '군인권센터'(이하 센터)는 현충원에 친일 군인 56명이 묻혀 있다며 6일 파묘와 이장을 요구했다. 센터는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부역한 군인들이 56명이나 현충원에 묻혀 시민 참배를 받고 있다"며 "관련 법률 개정을 통해 이른 시일 안에 이들 묘지를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일인명사전'을 참고해 센터가 이날 발표한 친일 군인 56명의 명단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김정렬·정일권 전 국무총리, 신태영·유재흥·이종찬·임충식 전 국방부장관 등이 포함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군대(만주군)에 속해 중위까지 진급했다. 박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김정렬·정일권 전 국무총리는 각각 일본군 대위, 만주군 상위(대위)였다.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이들도 임충식 전 장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신태영·유재흥·이종찬 전 국방부장관은 모두 일본군에 속해 각각 중좌(중령), 대위, 소좌(소령)까지 진급했다. 임 전 장관은 해방 전 최종 계급이 만주군 간도특설대 준위였다. 센터는 또 친일 및 반민족행위 전력으로 논란이 된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현충원 안장 계획에 대해 "친일 행적에 대한 한마디 사죄도 없이 오만하기 짝이 없다"면서 "함께 일제에 부역했던 동료들이 버젓이 현충원에 들어가 시민들의 참배를 받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들 56명 중 32명은 국립서울현충원에, 24명은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1949년] 경찰, 반민특위 습격사건 

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30분쯤 윤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중부서 및 서울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80여명이 남대문로 2가에 있는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청사 앞에 도착, 삼엄한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선 출근길의 특위 조사관들을 연행, 무기를 압수한 뒤 청사에 난입했다. 경찰은 특위 조사관들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하면서 책상 위의 서류를 찢었다. 직원 주소록 경비전화 자동차 4대 등도 압수했다.

반민특위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1948년 10월 23일 발족했다. 반민특위는 출범 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들이었고 이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 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이승만도 반민특위가 눈에 가시였다. 이승만은 노덕술, 최연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했다.

이 사건은 그날로 뜨거운 정치문제가 됐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약화돼 결국 석달 후인 1949년 9월 22일 와해되고 말았다.

--------------------영화 암살(2015) 중에서--------------------

재판장: 검사측 발언하세요.

검사: 본 검사는 피고인을 반민법 44항 밀정 혐의 4 6항 군, 경 또는 관리로서 일제 치하 악질적 행위로 민족에 해를 가한 혐의로 기소합니다.

피고: 역사적으로나 민족정기를 생각할 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투서 한장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독립운동 외에는 한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윗옷을 벗고) 내 몸 속에 일본 놈들의 총알이 여섯개나 박혀 있습니다. 1912년 경성에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때 총맞은 자리입니다. 구멍이 두개지요. 여긴 22년 상하이 황포탄에서, 27년 하바롭스크에서, 32년 이치구 폭파 사건 때, 그리고 이 심장 옆은 33년에, 내가 동지 셋을 팔았다고 하셨는데, 그 친구들 제가 직접 뽑았습니다. 그 젊은 청춘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모릅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보냈는지~그건 죽음을 불사하는 항전의 거름이었습니다, 재판장님!

--------------70년 동안 친일파 청산, 이루지 못한 꿈-----------반민특위

최원정/KBS 아나운서: 262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해방후 70년 동안 우리 사회의 뜨거운 잇슈중의 하나가 친일파 청산문제인데 아직까지도 이 잇슈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자체가 안타깝습니다. 방금 보신 영상은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암살의 한 장면인데 이게 반민특위에 검거된 친일파의 재판을 모티브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정재씨의 연기가 너무 뛰어나서 그런지 몰입을 하면서 저 변명을 듣게 되네요.

박상영/작가: 그러니까요. 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확 빨려 들어가서 진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저래서 청산이 안됐구나 싶기도 하구요.

이시원/배우: 누가보면 독립투사가 지금 억울하게 끌려온 걸로 알겠어요. 저걸 보면서 정말 사람들이 저렇게 뻔뻔할 수도 있겠구나 수치를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저는 개인적으로 아이히만 재판과 되게 많이 비교가 되었어요.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독일 나치 친위대의 중령,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체포), 아돌프 아이히만 이라는 사람이 나치였는데 이제 유대인 학살을 아주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결국 아르헨티나에서 이 사람이 스파이 혐의로 잡혀서 61년도에 재판받고 62년에 사형당했거든요. 독일에서는 아직까지 90세 넘은 할아버지들도 2차 대전 때 나치를 도왔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 한국 상황을 보면 안타까운 게 확실히 있네요.

박상영: 확실히 부럽다.

허진모/작가: 사실은 저 장면이 반민특위 재판에 회부됐던 모든 사람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이미지였습니다. 저기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사과한 사람은 극소수였거든요. 그러니까 저렇게 종합적으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독일 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90녀대말까지 전범 반역자 재판이 이루어졌는데 우리는 안타까운 모습이죠.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처리해야 할 때 제때 처리가 안되니까 이 문제가 70년 동안 계속해서 물고물고 물려서 오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친일파 또 얘기하니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이 있어요. 처리되었어야 할 문제가 그때 처리가 안되었으니 이런 식의 상황이 오네요~

최원정: 반민특위 라고 얘기하는데 이게 반민족행위별조사원회의 준말인 거죠. 정식명칭이 길군요. 이게 어떻게 만들어진 조직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 교수님, 설명 부탁드립니다.

박태균: 제헌헌법 (1948.7.17), 7 17일날 생길 때 101조에 그 내용이 들어갑니다. 101조 내용을 보면 단기 4278(1945) 8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1948.9.7에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통과되었고, 1948.9.22에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공포되고, 1948.10.12에 반민특위가 출범됩니다.

이시원: 들어보니까 이제 새로운 나라의 출범과 함께 어떻게 보면 합법적으로 국가기관에서 친일파를 청산하겠다 라고 선언을 한 거네요.

허진모: 그렇습니다. 반민법은 그 유명한 101조에 의해서 만들어진건데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이 존재하기 이전에 있었던 죄를 처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굉장히 예외적이고 굉장히 상징적인 법이었습니다. 그 반민특위는 법에 의거해서 일제 강점기 동안에 있었던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특별기구죠. 그래서 친일검거를 좀 더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 특별경찰대도 따로 조직했습니다.

최원정: 경찰권도 갖고 있었어요?

허진모: 그렇죠, 사법권

박상영: 상당히 강력한 권력이었네요.

이시원: 진짜 이걸 들어보면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의 염원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가 있는데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 친일파 몇 명 적어보라고 하면 적을 수 있잖아요. 이 수가 상당했을텐데 어떻게 색출했는지 궁금하거든요.

허진모: 그걸 알려면 일단 조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볼 필요가 있는데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이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거물 친일파, 전국구 친일파는 중앙에서 처리를 했습니다. 중앙사무국이 있었구요. 그리고 지역, 지방 친일파 그러니까 시골친일파는 그 지역에서 따로 처리했죠. 9개의 도조사부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민특위가 구성되기 이전부터 악질 친일파들이 유명했기 때문에 리스트가 돌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나쁜 짓을 했는데 민간인들이 몰랐을리 없겠죠. 저 죽일놈이라구~ 그래서 독립운동진영에서는 널리 공유한 친일파 명단(1948)이 있었는데 아마 반민특위가 만들어진 다음에는 여기에 있었던 대상들이 우선 검거대상이되었을 것이다 (언론계-김기진 이광수 김동인 백철) 라고 추정할 수 있죠. 그리고 좀 더 눈에 뛰는 것은 전국 단위로 친일파 고발을 접수 받았습니다.

이시원: 요즘으로 치면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한테 직접 제보를 받는 거네요.

최원정: 국민참여형 국가 초대형 이벤트 같이 했겠네요.

이시원: 쌓인게 많았으니까 투서와 고발이 엄청났을 것 같은데요.

최원정: 저런 식으로 생각나는 친일파 명단을 자기가 써서 넣는 거예요?

박상영: 하여튼 고객의 소리 같은 그런 느낌이야~

이시원: 통 안에 투서함 안터졌나요?

박태균: 사실 35년 동안 너무나 한이 쌓여 있었는데 이제 나라가 해방이 되고 독립이 됐는데도 이 문제가 처리가 안됐고 그 사람들이 또 그 자리에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컸고~

박상영: 혹시 검거된 친일파 중에서 지금 저희가 알만한 유명 인사들도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

허진모: 사실은 호응 자체가 대단했고 국민의 굉장한 지지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반민특위의 행보는 굉장히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첫 타자가 누가 될 것이냐가 관심사였습니다. 누구냐 바로 박흥식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박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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