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가 왜?
CBS 뉴스쇼가 6월 18일 ‘이한영 살해 사건’을 다뤘다. 아주 엉터리로!「[탐정 손수호] 대동강 로열패밀리 이한영, 왜 죽였나」. 이한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조카로 1982년 안기부에 의해 납치돼 서울에 왔고, 1997년 2월 15일 밤 9시 50분 경, 더부살이 해 온 한양대 선배(한양대 직원)의 분당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피격, 열흘 뒤 사망했다.
CBS 뉴스쇼는 이한영 사건을 다룬 이유에 대해 “최근 남북관계가 좋지 않아서”라고 밝혔다. “지난 2년 동안 분위기가 그래도 좋았기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분단 이후 그동안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97년 이한영 피살 사건”이라고 부연했다.
남북관계가 가끔 좋은 때도 있지만, 북측은 항시 어떤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앵커의 끝 멘트는 조금 뉘앙스가 달랐지만 주된 논조는 그랬다). 분단체제 아래 체화된 무의식에 잠재된 진심이다. 이 땅의 분단체제가 70년째 지속되고 있는 근원을 발설한 것이다. 남북관계가 좋아질 만하면 어떤 - 조작된 - 악몽을 상기하며 적대적 분단 구조에 안주하게 만드는 자기기만적 장치다. 남북분단체제가 만든 - 남북분단체제를 조작하고 지탱하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 정신병적 상태 바로 그것이다.
이한영 사건이 일어난 때는 북녘이 ‘100년만의 대홍수’(1995)에 이어 1996년부터 내리 3년 극심한 가뭄 등으로 대기근이 시작될 때였다. 김영삼 정권이 ‘대북 흡수통일론’에 흠뻑 도취해 있을 때였다. 제네바합의를 못마땅해 하는 미국 매파가 이 합의 이행에 제동을 걸기 위해 갖은 수를 쓸 때이기도 했다.
[이 씨 피격이 황[장엽] 비서 망명 요청에 대한 연쇄보복의 신호탄인지, 경고성 단발 사건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렇잖아도 경색됐던 남북관계가 더욱 얼어붙을 ... 22일로 예정됐던 북한 신포 경수로발전소 7차 부지조사단의 파견은 ... 불투명해졌다. 또한 남북교역의 계속 진행도 재검토 ... 정부가 대북 현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 한 발 후퇴해 속도를 늦추거나 잘 해야 현상태를 유지 ... 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이후 조문 문제로 난조에 빠진 남북관계는 ... 또다시 정면충돌의 위기를 맞았다.](<동아일보> 1997.2.17)
이한영 사건에 대한 CBS 제작진의 이해는 23년 전 사건 발생 당시의 ‘안기부 해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중.동도 아니고 CBS가 왜 ‘안기부 빨대’ 같은 짓을 할까.
『스위스에 간 지 한 2주쯤 지나서 이한영이 ...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어요. “나는 북한 외교관이다. 내가 북한 외교관 여권도 있고 공무원 여권도 있고 여권이 총 3개 있는데, 혹시 미국 여행을 할 방법이 없겠느냐.”(앵커 : 그렇게 한국대사관에 물어봤어요?) 우리 대사관이 발칵 뒤집혔죠. 그래서 일단 만나자고 해서 만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정보기관의 작전 하에 프랑스, 벨기에, 독일, 필리핀, 대만 거쳐서 김포공항으로 들어옵니다. ... “일단 한국에 가면 그 다음에는 언제든 미국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일단 서울로 가자.” 이런 설득이 통한 거죠. (앵커 : 우리 정보기관이 설득한 거군요. 망명을.)』(CBS 뉴스쇼)
CBS 뉴스쇼는 23년 전 안기부 해설에만 근거해 스크립트를 만들었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의혹이 제기됐고, 누구는 공개적으로 그 정황을 밝혔다. CBS는 이 사실을 외면했다. 그러면서 뉴스쇼 진행자와 출연자가 말을 주고받으면서 ‘설득에 의한 자발적 망명’이라고 우겼다. 안기부의 역사 조작에 가담한 셈이다.
이한영 서울행은 ‘납치’
‘이한영의 사건’과 관련해 가장 중시해야 할 것은 그가 납치돼 왔다는 사실이다. 물론 안기부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고, 공개적으로는 그 누구도 이 해설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니 ‘단정’하지 마라? 그건 안기부가 할 소리! 언론은 어느 쪽 이야기가 맞는지를 면밀히 살핀 뒤 나름의 ‘소결론’을 내려줘야 한다. 그는 납치돼 온 것이 분명하다고! 아니면 납치돼 온 것 같다고! 스위스에 나와 있다 미국에 가고 싶어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는 말은 이한영도 부인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소설가 황석영 씨는 2002년 1월 3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언론인권센터 창립대회에서 “이한영으로부터 ‘강제로 납치돼 한국으로 오게 됐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황 씨는 ‘무허가 방북’ 때문에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었고, 1993년 여름 이한영이 사기죄로 이곳에 들어와 함께 있었다.
운동 시간에 이한영이 먼저 다가 와 자신의 신분과 한국에 오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미국에 가고 싶어 한국대사관에 전화했고, 며칠이 지난 1997년 1월 28일 한국대사관 직원을 만나 그와 함께 택시를 탔는데 깨어나 보니 서울이었다고 이야기했다(저쪽 로열패밀리라는 애들이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을까. 남한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모른단 말인가. 우리는 어릴 적부터 ‘북한 = 무시무시한 생지옥’이라는 세뇌를 받았는데!).
이한영은 그렇게 말한 뒤 “선생님이 기자를 불러주면 제가 납치된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황 씨는 뭐라 했을까? “그런 얘기 하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충고했다 한다. 딱한 처지에 놓인 애가 자칫 큰일을 치를 수도 있겠다 싶었을 것이다. 어린 애가 미쳤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한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조카가 한국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몇 안 됐기 때문이다. 이한영은 황 씨에게 그런 말을 건넨 뒤 곧 석방됐다.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온 황 씨와 이한영을 같은 구치소에 계속 둘 수 없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CBS는 이런 사실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뉴스쇼가 끝난 뒤 ‘댓꿀쇼’라는 유튜브 방송 말미에 출연자가 “자발적으로 왔든, 강제로 왔든 ...”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한영의 납치 정황을 인지는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일단 한국에 가면 그 다음에는 언제든 미국 갈 수 있다. ... 이런 설득이 통한 거죠.” “우리 정보기관이 설득한 거군요, 망명을.”이라고 스크립트를 쓴 것은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했다는 뜻이다(안기부 빨대가 되기는 매우 쉽다).
또 그런 엉터리 결론을 뒷받침한답시고, “이한영이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고 남한 사회를 동경”한 것처럼 떠벌리면서 이한영 사건의 진상을 또 한 번 왜곡했다. 황 씨의 폭로 직후 <오마이뉴스> 기자는 2주 간 심층 취재 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황 씨의 증언 이후 <오마이뉴스>는 10여 일 간에 걸쳐 이한영이 쓴 자서전, 그의 어머니 성혜랑(66)의 자서전, 당시 국내 언론의 보도 내용, 그리고 한국 체류 시절 [이한영이] 가깝게 교류한 주변 인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82년 이 씨의 ‘귀순’ 당시의 상황을 정밀 점검한 결과 이 씨의 ‘한국 귀순’은 다분히 타의로 이뤄진, 즉 ‘납치’ 쪽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결론내렸다.](손병관 기자「이한영씨, 생전에 “나는 납치됐다” 소설가 황석영씨에 주장」 <오마이뉴스> 2002.2.14)
이한영의 납치 정황을 외면한 CBS는 이 씨의 이름 ‘한영’이 “한국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민증 번호 중 (생년)월일이 그가 서울에 온 날이라고도. 그럴까? 그 이름과 주민증 번호 역시 그를 납치해 온 안기부가 조작한 것 아니었겠나. 이한영의 주민번호는 서울에 온 날이 아니고 스위스에서 안기부 요원들을 만난 날이다(XX0128)!
언론의 본분은 끊임없는 회의와 사유다. 거짓과 왜곡으로 점철된 남북관계의 역사를 다룰 때는 더 많이 회의하고 사유해야 한다(하기는 ... 남북관계사가 온통 거짓과 왜곡으로 점철돼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안기부가 조작한 살해 목격담
다음은 이 씨가 분당의 아파트 14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살해될 때의 상황.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맞은편 집에 살던 박 모 씨 ... 현관 밖에서 소리가 나니까 본 거에요. 현관문에 렌즈가 있었잖아요. ... 권총을 겨눈 남자를 보고 즉시 112와 119에 신고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밖을 봤더니, 한 남자가 권총에 소음기를 꼈고요, ... 두 발을 발사 ... 범인들은 즉각 도주 ... 공작원들이 현장을 떠난 후 목격자 박 씨도 밖으로 나왔어요. [이 씨가] 맞은편에 있던 선배 집 문을 두드렸고, 선배 아내가 나와서 이한영 씨를 보고 이게 무슨 일이냐 물어봐요. ... 이한영 씨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면서 간첩, 간첩이라고 말했어요. 이후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 』(CBS 뉴스쇼)
CBS는 안기부 각본대로, ‘정체불명의 괴한’을 ‘(북한)공작원’이라고 확언한다. 그런데 위 목격담은 안기부가 합동수사반을 앞세워 경찰을 따돌리고 초기 목격담을 조작해 만든 것이다. 수사 단계에서 그 조작 정황이 다 드러났었다.
[이한영 씨가 피격 직후 쓰러진 상태에서 “간첩이다”라고 외마디 소리를 했다는 남상화(南相華. 43.여) 씨의 목격자 진술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씨가 피격당하기 전까지 더부살이를 해 온 김장현(44) 씨의 부인인 남 씨는 18일 “사건 당시 문을 열고 나가 이 씨의 피를 닦으면서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는 들었으나, 내용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남 씨가 들은 것으로 경찰에 조사돼 있는 “간첩이다”라는 이 씨의 마지막 목소리는 합동수사본부가 이 사건을 간첩의 소행으로 규정하는 주요 근거가 됐었다. 남 씨는 이날 밤 재조사를 위해 아파트로 찾아 온 수사관들에게 “사건 직후 주변에서 ‘간첩 아니냐’며 웅엉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며 “그러나 경찰에서 처음 조사받을 때는 다른 사람도 ‘간첩이다’라는 말을 들었다는데 나만 아니라고 하면 주위 사람들이 난처해질 듯 해 얼떨결에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합동수사본부는 이날 밤 이 대목이 논란을 빚자 “남 씨를 상대로 다시 조사한 결과 그는 ‘최초의 진술을 번복한 바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하면서 남 씨와 취재진의 직접 대면은 허용하지 않았다.](「“간첩” 외마디 듣지 못했다」<한겨레신문> 1997.2.19)
“그러나 경찰에서 처음 조사받을 때는 다른 사람도 ‘간첩이다’라는 말을 들었다는데 나만 아니라고 하면 주위 사람들이 난처해질 듯 해 얼떨결에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한 것” 이게 무슨 말인지 추리가 안 돼? ‘다른 사람들이 간첩이라는데 당신만 왜 아니라고 해(요)!’ 안기부 수사관이 이렇게 은근히 압박했다는 말 아닌가.
[이 씨가 피격 직후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며 “간첩”이라고 말했다고 전한 최초 목격자 남상화(42.여)의 진술이 바뀌고 있다. 남 씨는 이날 “간첩이라는 말을 정확히 듣지 못했다”며 “옆에서 누군가가 ‘간첩이라잖아’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 씨가 자신의 집인 1402호 안에서 비디오폰으로 범행 현장을 보는 동안 남 씨와 마찬가지로 맞은편 집인 1401호 안에서 비디오폰을 토해 내다보다 밖으로 나와 남 씨와 함께 이 씨 옆에 있었던 박종은(朴鍾恩. 44) 씨도 “간첩이란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혼선 빚는 경찰 수사」<경향신문> 1997.2.19)
“옆에서 누군가가 ‘간첩이라잖아’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같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사건 현장 또는 조사 과정에 누군가 옆에서 ‘간첩’이라는 말을 진술서에 끼워 넣으려 했다는 말이다. 목격자의 진술이 엇갈리자 <경향신문>은 1401호 주민 박종은 씨의 진술을 토대로 “피격 전후 상황을 재구성”했다.
[이 씨의 임시 거처인 1402호와 마주하고 있는 1401호의 박 씨는 무의식적으로 비디오폰을 통해 ... 남자 2-3명이 복도에 서서 싸우는 듯 ... 즉시 경비원에게 인터폰으로 알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인터폰 통화를 포기하고 계속 비디오폰으로 살펴보니 남자 2명이 황급히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고 ... 이 씨는 쓰러진 채 1402호의 철제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즉시 112와 119로 전화를 한 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이웃인 남 씨가 먼저 나와 있었다. ... 총소리는 없었고 화약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남 씨가 얼굴을 이 씨 가까이 대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예인 아빠, 누가 이렇게 했어[?]”라고 물었다. 한참 후[?] 경비원 김제희 씨가 현장으로 달려왔다. 박 씨는 이 씨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했다.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남 씨가 박 씨에게 “뭐라고 얘기하는 것이냐”라고 묻거나 이때 자신이 “간첩이라잖아”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는 것. ... 5분 정도 지나 도착한 구급대가 이 씨를 병원으로 옮겼다. 박 씨는 현장에 달려 온 경찰이 “당시 상황을 말해 보라”고 묻자 “이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진술했을 뿐이었다.](「앞집 목격자가 본 ‘피격 순간’ : “2명 황급히 도주...화약 냄새도 안 나”」<경향신문> 1997.2.19)
증언자가 또 있었다! 아파트 경비원 김 씨. 애초부터 안기부는 경비원 김 씨의 진술을 숨긴 채 주민 두 사람의 이야기만으로 목격담을 구성하려 했던 것이다. 마치 경비원 김 씨가 ‘간첩이라잖아요’라고 말하는 것을 다른 주민들이 들은 것처럼 꾸미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 씨도 ‘간첩’ 어쩌고 하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모두 조작이었다.
[목격자인 남상화 씨와 남 씨의 이웃인 박종은 씨는 각각 “이 씨가 그런 말을 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 이들보다 늦게 현장에 도착했던 아파트 경비원 김제희(김제희, 58) 씨도 “당초 남 씨가 ‘뒤에서 누군가 간첩이라잖아요’라고 말했다며 나를 지목하고 있으나 나는 간첩이라는 말을 한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이 씨 피격 전문 재수사 ... 목격자 진술 번복, ‘벨기에제 권총’도 근거 없어」<경향신문> 1997.2.20)
[남상화 씨는 18일 ... 재조사 과정에서 “간첩이란 말은 처음에 직접 듣지 못했고, 당시 사건 현장에 달려 온 아파트 경비원 김제희(60) 씨가 ‘간첩이라잖아’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이 씨의 입술 모양을 읽어 알게 된 것이다”고 말해 애초 진술에 대한 신빙성 논란을 일으켰다. 한편 남 씨에게 간첩이란 얘기를 해 줬다는 김 씨는 “전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내가 목격자 중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이 씨의 피를 닦아주었으며 이 과정에서 이 씨로부터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고 밝혀 남 씨와 동떨어진 진술을 했다.](「예단 갖고 한 수사 ‘흔들’ ... 목격자들 ‘간첩 ...’ 진술 엇갈려」<한겨레신문> 1997.2.20)
안기부와 기무사, 정보사 및 경찰 등이 관여하는 소위 ‘합신조’(합동신문조) 수사 및 발표가 모두 엉터리였다는 지적이 나온 것은 당연지사.
[이에따라 대공수사에 무게를 둬 왔던 경찰은 뜻밖의 암초에 부딪치면서 수사 방향이 총기 논란에 이어 또다시 헝클어지게 된 셈이다. 더욱이 경찰은 그동안 이 씨가 쓰러진 장소에 있던 목격자의 수가 정확히 몇 명인지도 파악하지 못하는가 하면, 이들의 엇갈린 진술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수사본부가 이렇게 불명확한 남 씨 한 사람의 진술 등에 의존해 수사의 금기인 ‘예단’으로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고 닷새를 보냈다가 원점에서 재수사가 불가피해짐에 따라 이번 사건 수사는 자칫 미궁으로 빠져들 우려를 낳고 있다.](「예단 갖고 한 수사 ‘흔들’ ... 목격자들 ‘간첩 ...’ 진술 엇갈려」<한겨레신문> 1997.2.20) <계속> 강진욱/ (<1983 버마>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