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총 증거 조작도 외면
CBS 제작진은 안기부가 사건의 정황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외면했을 뿐 아니라, ‘안기부 해설’에 신빙성을 부여하려 무진 애를 썼다. 범행에 사용된 권총에 대한 설명에서였다. CBS 제작진은 ‘댓꿀쇼’에서 “영화에서도 자주 나오지만 ... 암살용으로 쓰는 소형 권총”이라며 “총의 위력이 작아 두꺼운 잠바를 뚫지 못해 (탄환이) 옷 속에서 발견됐다”고 떠벌렸다. “가까이서 쏴 총알의 위력이 떨어졌다”고도 했다. ... 잠바도 못 뚫는 총으로 살인을 해? 총구에서 가까울수록 총알의 위력이 더 센 것 아닌가. ‘벨기에제 권총’ 어쩌고 하는 말도 안기부가 만들어낸 말이었다.
[이한영 씨 피격 사건에 사용된 권총이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이라는 합동수사본부의 최초 판단이 잘못됐던 것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 밝혀졌다. ... 탄피 2개의 경우 모두 체코 프라하의 ‘셀리어 앤드 벨럿’사에서 제작한 ... 탄피로 확인 ... 사건 직후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이 사용된 것으로 단정하고 ... 북한 쪽의 테러로 본 합동수사본부의 판단 능력에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브라우닝 권총 아니다 - 국과수 감정, 탄피 체코제로 밝혀져」<한겨레신문>1997.2.18)
[김 [수사]본부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목격자들이 진술을 번복하고 있다”면서 “범인들이 사용한 총기가 벨기에제 권총이라는 경찰의 당초 발표도 처음부터 추정이었다”고 말했다.](「이 씨 피격 전문 재수사 ... 목격자 진술 번복, ‘벨기에제 권총’도 근거 없어」<경향신문> 1997.2.20)
국과수는 안기부가 주도한 합수부의 조사 결과를 부인했지만 문제의 체코제 권총 실탄에 대해서는 “95년 충남 부여에 침투한 간첩 박광남이 지녔던 실탄을 만든 회사와 같다”고 밝혔다. 그러면 이한영을 죽인 범인을 ‘북한 간첩’이라고 단정할 수 있나. 견강부회 즉 억지 결론이다. ‘부여간첩 이야기’ 자체가 어설프니 짝이 없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1995년 10월 24일] 오후 2시 40분께 충남 부여군 석성면 정각사 부근 간첩 2명이 나타났다는 안기부 직원 신고에 따라[?] 군경 합동으로 수색작전을 벌이던 중 정각사에서 300m 떨어진 저수지에서 간첩들을 발견해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간첩 1명은 경찰이 쏜 총에 허벅지를 맞고 현장에서 붙잡혔으나 다른 1명은 군경 포위망을 피해 인근 야산으로 달아났다. ... 붙잡힌 간첩은 “올 8월 남파됐으며 이름은 김도식, 나이는 33살”이라고 진술했다고 ... 달아난 간첩 박광남(31)으로 ... ](<한겨레신문> 1995.10.25)
이 수상하기 짝이 없는 부여간첩이 등장한 때는 청진항 ‘인공기게양 사건’(1995.6.27) 넉 달 뒤, 북녘 주민들이 ‘100년 만의 물난리’를 당한 지 두 달 만이었다. ‘북한 붕괴론’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김영삼 정부는 이때는 물론 남은 임기 동안 민간단체들의 대북 식량 지원 노력을 방해했다(베트남에서 쌀을 사 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다는 말도 있다). 남북관계를 파탄지경으로 몰아야 할 때면 늘 ‘수상한 간첩 사건’이 대서특필되는 것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부여간첩 김동식’은 당시 학생운동권이었던 허인회. 함운경. 이인영. 우상호 등에게 “통일운동을 같이하자”며 접근했다 한다. 함 씨 등은 경찰 조사에서 “김동식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엉터리’ 수사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경찰청은 2월 19일 합동수사본부장인 김충남(金忠南) 분당경찰서장을 경질하고, “1960년 경찰에 들어온 이래 37년 동안 줄곧 대공 분야에만 근무”(<동아일보> 1997.2.20) 해 온 홍승상(洪承相) 전남 화순서장을 분당경찰서장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경찰 내부에서는 ‘안기부가 다 해 놓고 애먼 경찰만 잡는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분당경찰서 형사들은 “경찰이 겉으로만 수사 주체였지, 실제로는 대공 정보를 독점한 안기부가 이번 사건 수사를 주도했다”(<한겨레신문> 1997.2.21)고 말했다.
[실제로 경찰은 15일 밤 9시 52분 께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다음날 새벽 5시까지 현장감식도 하지 못했다. 그에 앞서 안기부원 4명이 15일 밤 10시 32분에 현장을 선점하고 탄피와 이 씨의 일기장 등 중요한 유류품을 ‘싹쓸이’하고 ... 경찰 감식반은 그 뒤 핏자국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거나 머리카락 몇 올 정도를 채집한 데 그쳤다. “간첩, 간첩이야”라는 이 씨의 외마디 진술을 [했다는] ... 목격자 남상화(44.여) 씨에 대한 초기 조사도 16일 새벽 안기부가 주도하는 합동신문조가 벌였다. 경찰 관계자는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이 사용됐다는 최초 발표도 안기부가 그렇다고 하기에 경찰은 발표만 맡았던 것”이라고 해명했다.](「분당경찰서장 경질에 형사들 “안기부가 다 해 놓고”」<한겨레신문> 1997.2.21)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안기부가 조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증언 번복’ 논란으로(번복이 아니라 조작된 증언을 바로잡은 것이겠지만), 안기부의 위신을 떨어뜨린 남상화 씨는 무사했을까? ... 섬뜩한 협박 편지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경찰은 “26일 오후 5시 20분 경 김 씨의 아파트 1층 우편함에서 김 씨가 협박편지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검은색 사인펜으로 쓴 이 편지는 ‘조국을 배신하고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를 배신한 죄로 일찍이 죽어야 했건만 조금 늦었을 뿐’이라며 수사에 협조한 김 씨 부부에 대한 보복은 물론 김 씨가 살고 있는 418동 아파트 건물을 폭파하겠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이 씨 선배 집 협박편지 수사」<동아일보> 1997.2.28)
북측이 이한영을 살해하고 그 사건 목격자까지 협박해 입을 막으려 한다고? 김영삼 정부 시절은 안기부가 이런 웃기는 각본을 국민들에게 내리먹이던 때였다.
[이한영 씨 피격 사건 목격자인 남상화 씨 앞으로 26일 날아든 보복 협박편지가 숱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 경찰이 27일 공개한 이 편지에는 남 씨와 남편 김장현 씨를 제거하고 현대아파트 418동을 폭파하겠다는 섬뜩한 내용이 담겨 있다.](「김장현 씨 집 협박편지」<경향신문> 1997.2.28)
이한영 살해 장면을 목격한 주민 때문에 자칫 범인이 잡힐지 모르는 상황, 또 더 많은 목격자들이 범인의 행색을 증언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목격담이 나오지 않도록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또 이한영의 선배인 김 씨와 그의 아내 남 씨는 이한영 및 그의 살해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증언으로 인해 안기부의 ‘이한영 스토리’ 및 ‘공작 시나리오’는 곧 거짓으로 드러날 수도 있었다. 특히 기자들의 접촉이 많은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이런 짓거리를 벌일 조직이 안기부나 정보사 대공조직 말고 또 있을까? <계속> 강진욱 / (<1983 버마>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