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몇 이름 있는 이들, 혹은 그들의 가족이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선 그 죽음이 어떤 시대를 상징할 수도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엊그제 세상을 떠난 백선엽의 죽음은 그 공과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보수 진영으로부터는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낸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그의 친일 행적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었고, 특히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을 위해 만든 ‘간도특설대’에서의 활동은 분명한 부역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친일파 경력을 가진 이들이 중용되고, 또 미국에 의해 친일세력이 군경의 주요 보직에 중용되며 해방공간에서 남한은 친일파의 천국이 됐습니다. 북한에서 숙청을 피해 내려온 친일파들이 이런 세력들에 더해지고, 미국을 휩쓴 반공주의의 광풍은 한국에도 당연히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 영국과의 성전’ 운운하던, 친일 경력을 가진 자들이 친미 반공 세력으로 자기들의 입장을 선회하는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새 나라의 요직을 장악했으니, 대한민국은 출발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셈이었습니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역사, 그 안에서 친일부역자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백선엽은 그 세력의 부침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고, 말 그대로 백수를 누리다 고이 갔습니다.
이 죽음을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많았을 벗님의 글을 몇 차례에 걸쳐 옮겨 봅니다. 함께 일독해 주시기 권합니다.
시애틀에서...권종상 / 서프라이즈 논객
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이제부터다(상) 우리네 보수 참칭 우익들에게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숭앙받던 백선엽이 백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형식논리로만 보면 참 오래도 사셨고 그만큼이나 인생에서 밝은 면 그리고 좋은 것을 너무도 많이도 누린 행복(?)했던 인생입니다. 불과 서른셋의 나이에 대한민국 최초의 사성장군인 대장이 되었고 두 번의 참모총장과 한 번의 합참의장을 역임한 화려한 군경력에 전역 후에는 교통부 장관과 각종 공기업의 요직을 두루 지냈습니다. 이후 아주 오랜 세월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미국 군인들에게까지 큰 존경을 받으며 천수까지 누렸으니 실로 성공한 멋진(?) 인생입니다. 형식논리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도 같은 질감과 균등한 재질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이제 그의 관을 닫고 땅에 묻게 되는 지금부터가 정말로 시작입니다. 객관적으로 한국전쟁 내내 백선엽은 실제 전투에서 같은 일본군 출신의 부역자였던 채병덕이나 유재흥 같은 무능 무책임한 인사들이 저질렀던 역대급 판단 착오나 비겁하기 짝이 없는 망동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대장이 되었던 정일권과 이형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재자 이승만과 한국군의 패트런이자 대부였던 미군의 말을 아주 잘 들었고 늘 순종했기에 그 빛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나하나 따져 보면; 백씨가 한국전쟁 초기와 이후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고요? 50년 6월 25일 당일 그는 1사단장으로 예비연대인 11연대와 함께 서울에 가까운 수색에 머물고 있었고 38선 최전방의 12연대와 13연대의 전투상황에 직접 개입하지 못했습니다. 개전 당일 12연대가 궤멸 되었으나 문산 쪽을 지키던 김익렬(제주 4.3의 진실을 유고로 남긴 분)대령의 13연대가 필사적으로 이틀이나 버틴 덕분에 전체 사단이 무너지지 않고 한강을 건너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요컨대 백선엽의 공로라고만 보기엔 어폐가 있다는 말입니다. 낙동강 전선의 혈투에 대해 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과 여러 인터뷰에서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라는 기개와 각오로 전선을 사수했다고 밝혔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버티거나 아니면 죽어라(Stand or Die)’ 하며 전선의 모든 부대에 ‘결사항전의 모토’를 하달한 이는 사실 백씨가 아니라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총지휘관인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었습니다. 그때의 미군과 한국군의 상황은 버티지 못하면 끝장인 절체절명그 자체였던 겁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안강과 기계를 사수하고 있었던 3사단장 이종찬 장군 역시도 ‘사수를 실패하면 자결한다’는 각오를 밝히며 분전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결국, 낙동강을 지키던 모든 부대의 지휘관들이 이와 비슷한 정신자세로 임했다고 봐야 합니다. 백씨의 공로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그러함을 유념해야 합니다. 거기에 더해 한국전쟁 내내 한국군의 역할이나 위상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절대적이거나 대단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대단히 안타깝게도 한국군은 전쟁기간 내내 크나큰 판단착오나 오류를 범해 전체 전선을 극도로 위험에 빠트린 결정적인 구멍역할(1.한국전 초기 축차투입 2.50년 겨울 2군단 붕괴 3.51년 봄 현리 3군단 붕괴)을 한 반면,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의 분전이나 가평전투에서의 캐나다 여단, 쌍굴다리 전투에서의 프랑스 몽클라 대대처럼 압도적인 적을 맞아 싸워 전황을 뒤바꾼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전쟁개시 10개월 동안 무려 11개 사단 분량의 장비와 물자를 망실해 적군에게 물자를 공급했던 호구였던 사실은 신생국가 초보 군대기에 어쩔 수 없다 쳐도 전투에선 등신이었으나 거창양민학살 사건과 같은 학살에는 귀신이었던 행적은 도저히 쉴드를 쳐줄래야 쳐줄 길이 없기에 이러한 어두운 이면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재평가가 이뤄진다면 백씨의 한국전쟁 공로는 사실 그닥 대단할 게 없습니다. 도리어 그보다 더한 공을 세우고도 여태 알려지지 않거나 상찬받지 못한 무수한 숨은 영웅들을 재발굴하여 현양해야 할 것입니다. 뒤져보면 혼자 한국전쟁의 영웅인양 떠드는 백씨의 행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의외로 같은 만군 출신들이 많답니다. 여기에 더해 백선엽이 처음 참모총장에 임명되던 시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권력자들과미군의 입맛에 입속의 혀처럼 굴었던 인물인지 잘 드러납니다. 그가 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건 바로 전임자인 6대 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이 이승만의 계엄령 포고와 군동원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표명한 유명한 훈령을 내걸면서 최고 권력자인 이승만의 눈 밖에 나서 해임되고서 임명된 후임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인사권자에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던 전임자 이종찬의 후임으로 백선엽이 선택된 게 무슨 의미였을까요? 그 자신의 회고록에는 첫 참모총장 발탁의 의미가 뭔지 자세히 나와 있진 않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이 이 대목을 긍정적으로 써줄지는 심히 의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이승만에게 언제나 ‘예스맨’이었고 그 덕분에 최초의 육군 대장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 한국군의 온갖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 대통령에게 제대로 건의하거나 시정을 취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이후 그가 군내 젊은 장교단에 의해 파벌의 수장 혹은 적폐로 비판받는 주된 원인이 됩니다. 거기에 더해 백씨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미군 지휘관들과 매우 좋은 관계를 형성하며 그들의 도움과 신뢰를 독차지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그게 다르게 보면 미군의 입맛과 기호를 알아서 잘 맞추는 처세이자 그의 출세비결은 아니었을까요? 한국전쟁 초기 모든 주력부대가 궤멸 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1주일이나 한강방어선을 지켜냈던 시흥지구 전투사령부(후일 우리 육군의 1군단의 모체가 됨)을 이끌었던 독립군 출신의 김홍일 중장 같은 유능하고 노련한 지휘관들은 미군에게 입바른 소리 혹은 독자적인 지휘권을 놓고 대립하거나 직언을 하다 해임되거나 한직으로 좌천되었던 무수한 사례는 어찌 해석하고 설명해야 할까요? 요컨대 당시 한반도의 미군은 우리 군내에서 김홍일이나 안춘생처럼 독립군 경력을 가지고 있거나 김석원처럼 전투경험이 풍부한 지휘관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이형근 정일권 백선엽과 같은 눈치 빠르고 순종적인 인물들을 중용하라고 이승만 행정부에 입김을 넣은 당사자가 미군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백선엽이 미군이나 이승만의 비위나 심기를 단 한 번이라도 건드렸다면 그가 그 화려한 위치에 설 수 있었겠는가는 질문에 백씨는 ‘나도 때론 할 말은 했다’ 라며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그에 대한 평가가 시작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편에는 군 경력이후의 그의 해바라기 행적과 친일부역경력을 다뤄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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