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뉴스프리존]김양훈 기자=매년 인천시민의 날만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인천시민의 날의 지정은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 13년(서기 1413년) 음력 10월15일(辛酉 日)에 작성된 조선왕조실록 제26권의 기록(지방행정 구역의 명칭을 개정하다)에 근거하고 있다.
인천시민의 날은 여러 번 날짜가 바뀌었다. 최초 공식적인 인천시민의 날은 1965년 6월 1일이었다. 이후 다섯 번이나 날짜가 바뀌었다. 양력 10월 15일이 인천시민의 날이란 사실을 아는 인천시민이 많지 않다.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한글날을 세종대왕과 매치시켜 생각한다. 인천광역시민의 날 조례 제1조에는 "선현들의 치적과 공로를 추모하고 시민의 친목 단합을 도모하여 애향심을 고취시켜 향토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여기서 선현은 누구를 말함인가? 인천시민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애향심을 고취할 만한 상징화된 이미지가 없다. 타 지역 사람들에게 인천과 관련한 이미지나 상징성을 물으면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인천상륙작전’과 그 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을 제시한다.
올해로 인천 정명(定名) 607년이 된다. 최근에 인천광역시 남구가 기존의 구명(區名)을 버리고 미추홀(彌鄒忽)로 개명하였다. 미추홀은 추모왕(鄒牟王)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할 때 인천의 지명이 미추홀이었다.
백제가 건국하면서 미추홀은 매소홀(買召忽)로 바뀌었다. 매소홀은 소서노(召西弩) 세력이 매입한 지역이라는 뜻이 내포된 지명이다. 660년 백제가 망하고 신라 경덕왕 때 매소홀이 소성(邵城)으로 바뀌었다. 소성의 소(邵)자에도 소서노의 이름이 들어있다.
인천이 역사적으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인주 이씨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부터다. 그 당시 인천은 인주(仁州) 또는 경원(慶源)으로 불렸으며, 7대어향(七大御鄕)으로 고려 왕실에서 성역처럼 여기던 지역이다.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이 모두 문종(文宗)의 비가 되면서 이후로 7대에 걸쳐 약 80여년간 인주 이씨가 고려 왕실의 외척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인주 이씨 출신의 왕비 중에서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분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 시대 왕도 였던 서울을 대표하는 인물은 너무 많다. 그러나 정명 607년이 된 인천을 대표할 만한 역사적 인물이 없다. 없는 게 아니다. 지난 600여년 동안 인천을 다스린 수장(首長)들이나 그 휘하의 관리들의 역사성 인식 부족을 탓하고 싶다. 맥아더는 아메리칸이다. 그는 미국의 국익을 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뿐이다. 그가 결코 인천을 상징하는 대표 인물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분의 헌신적인 고마움을 훼손하면 안 된다.
인천시의 위정자들은 인천에 진주(眞珠)가 있는데도 그것이 보물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한민족 역사상 여인의 신분으로 세 개의 나라를 건국한 인물은 소서노가 유일하다. 그녀는 추모왕과 협력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고,
인천 미추홀에 도착하여 그의 큰아들 비류(沸流)와 미추국(彌鄒國)을 세웠으며, 둘째 아들 온조와 백제를 건국하였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인천도 한때 한 나라의 왕도(王都)였으며, 찬란한 해양 문화를 꽃 피우던 지역이다. 다만, 백제의 멸망으로 인하여 백제 관련 역사나 유적이 신라에 의해 고의로 훼손되었을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이제는 진정으로 인천에 뿌리를 내린 선현들의 치적을 발굴하고 선양할 때가 되었다. 인천시 남동구가 3,4년전 소래포구 축제를 개최하면서 기존의 고루한 축제 아이템을 버리고 과감하게 소서노 모자의 미추홀 도래(到來)를 경축하는 거리 퍼레이드 행사를 개최하여 시민들로부터 열열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또한 축제 기간 중 소서노 관련 학술회의를 개최하면 남동구민에게 소래 일대가 백제 초기 시발지 임을 알리기도 했다. 인천시는 서울보다 600년이나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제는 인천시도 시를 상징하는 인물을 선정해야 할 때다. 방심하다가 고구려를 자신의 역사라고 억지 주장하는 지나족(支那族)에게 소서노 어하라를 빼앗길 수 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