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타계하신 백기완 선생과 나는 특별한 인연은 없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녔고, 소위 운동권도 아니었으며, 또 대학 졸업 후 보수성향의 신문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럼에도 백 선생은 내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자, 내 마음속의 스승과도 같은 분이었다. 이제 고인이 되신 선생을 추념하면서 책으로 맺어진 선생과의 ‘사소한 추억담’ 두 가지를 기록해둔다.
1.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시인사, 1979)
나는 박정희 독재정권 말기인 1978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 시절 한국사회 전반이 그러했듯이 대학가도 암울했다. 캠퍼스 곳곳에 감시의 눈초리가 도사리고 있었고, 대학언론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
수업이 비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캠퍼스 벤취에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책 외판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당시 신입생들은 타임지나 영어회화 테이프를 사서 영어공부를 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 같았다.
대화 말미에 그 외판원은 주위를 살피더니 낯선 책자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흰색 표지에 두께가 얇고 한글 제호의 잡지였다. <씨알의 소리>였다. ‘씨알’(‘씨앗’이 아니고)이라는 말도, 발행인 함석헌 선생의 이름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내 친구들도 아마 그랬지 싶다.
2학년 올라가서 우연히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 누가 내게 읽어보라고 추천을 한 건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없다. 저자 백기완을 그때 처음 알았다. 문장 첫머리에 ‘내 딸 담아’로 시작하는 편지체여서 술술 읽혔다.
입시공부에 매몰돼 고교시절을 보낸 나(혹은 우리)에게는 이 책의 서술방식이나 내용 모두 낯설었고, 또 한편으로는 신선했다. 춘향전 얘기, 장산곶매 얘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만해도 가부장적 사회여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그해 10월, 이른바 ‘10.26 사건’이 터졌고, 나는 군입대를 위해 휴학했다. 이듬해 80년 봄, 광주에서 민주항쟁이 터지면서 입대가 연기돼 9월에야 입대했다. 제대 후 복학하여 평범한 대학생활을 마치고 취직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87년, 92년 대선 때 ‘백기완’ 이름 석 자를 접하였으나 현실속의 내 삶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2. <임종국평전>(2006, 시대의창)
내가 역사와 시대의식에 눈 뜬 것은 1988년 말 친일연구가 임종국 선생을 알게 되면서 부터였다. 12년간의 정규교육 과정에서 미처 배우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를 내게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 바로 임종국이었다. 나는 마치 열병을 앓듯이 그에게 빠져들었고, 그의 저작을 단기간에 섭렵했다.
이제는 그를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마음 먹고 일정을 잡던 중 89년 가을 어느날 조간신문에서 그의 부음을 접했다. 당시 임 선생은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천안으로 내려가 밤농사를 지으며 주경야독하고 있었다. 장례가 끝난 후 나는 천안으로 내려가 선생의 흔적을 살핀 후 선생의 삶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임 선생이 쓴 수많은 글을 읽고, 선생과 관련된 편린을 모으고, 선생을 기억하는 가족과 지인.선후배 등 관계자 30여 명을 인터뷰했다. 그 과정에서 우연하게도 ‘백기완’ 석 자를 다시 접하게 됐다. 생각해보니 임종국과 백기완은 서로 알고도 남을 사이였다. 85년(?) 2월경, 백기완은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면서도 지팡이를 짚고 천안으로 임종국을 찾아가 만난 적도 있다.(임종국 여동생 증언)
백기완은 친일반민족사 연구에 일생을 바친 임종국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 자신이 진보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면서 “한국의 진보는 임종국부터 출발했다”는 놀라운 말을 남겼다. 그런 연유로 백기완은 감옥에 있으면서 임종국의 대표저작인 <친일문학론> 보급(?)에 적극 앞장섰다. 그래서 당시 감옥 안에서 ‘<친일문학론> 판매사원이 백 아무개’라는 우스개말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이 우스개는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다. 증인이 여럿 있다. 연세대 운동권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 문재인 정부에서 시민사회수석을 지낸 김거성 목사, 6.3세대 출신으로 이른바 ‘민비연 사건’으로 구속됐다가(67.8) 무죄로 풀려난 김도현 전 문체부 차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친일문학론>을 펴낸 평화출판사 허창성 사장도 같은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임종국 선생은 1929년생(1989년 타계), 백 선생은 1932년생. 서로 타관에서 만났으니 벗으로 지내도 허물이 안될 사이다. 일생을 통해 시대와 역사를 고민하며 희생적 삶을 살다 가신 두 스승께 삼가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