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에 나는 『김남주 평전』이라는 책을 내었다. 혁명시인 김남주의 생애와 사상을 포괄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의 원고를 이미 1990년대 후반에 완성했으나 출판사를 찾지 못했다. 혁명시인 김남주의 전모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공안당국의 압력이 염려되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나는 이 원고를 오랫동안 책상서랍 안에 보관해야 했다. 원고 복사본을 몇 권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광주에 있는 <남풍>이라는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젊은 친구의 용기에 감동하여 나는 기꺼이 허락하였다.
내가 시인 김남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시집 『조국은 하나다』를 읽고서였다. 성격적으로 소심했던 나는 과감한 성격을 지닌 김남주와 그의 시들에 매료되었다. 그 후 그를 만나보고 그의 산문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시인에 대한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보통 평전이 아니라 그의 철학에 초점을 맞춘 평전이었다. 철학과 미학을 전공한 나에게 매우 매력적인 소재였다. 시인이 쓴 『옥중연서』, 『시와 혁명』등을 읽으면서 나는 이 시인의 인생관에 자리 잡은 철학을 명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옥중에서 열심히 철학을 공부하였다. 제도권의 철학이 아닌 올바른 철학, 곧 유물론을 습득하였다.
『김남주 평전』이 나오자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김남주의 문학과 세계관을 너무 주관적으로 해설했다는 쪽과 김남주의 특성에 맞게 잘 해설했다는 쪽이다. 공적인 평가도 엇갈렸다. 문예진흥원에서는 이 책을 ‘2004년 우수문학작품’(평론)으로 선정했고 2008년에 국방부는 이 책을 김남주의 시집과 함께 불온서적 23권에 포함시켰다. 나는 국방부의 선택을 수긍하였다. 그것은 내가 김남주의 시들을 충실하게 해설했다는 것을 반증해 준 셈이기 때문이다. 나의 책이 시집에 어긋나는 해석이었다면 둘 가운데 하나는 누락되었을 것이다.
반미색체가 강한 김남주의 시들에 내가 공감한 이유는 분단의 비극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사실의 인식 때문이다. 김남주 시인은 5.18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곧바로 만행을 저지른 군부세력의 뒤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시로 썼다. <학살>(1 ̴5)이 그 대표적 시인데 거기에는 “그리고 바다 건너 저편 아메리카에서는/ 학살의 원격조종자들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군사 작전권을 갖고 있는 미국의 승인이 없었다면 군 동원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고발한 것이다. 나는 김남주의 깊은 통찰력에 동감을 했다. 그리고 반미자주 정신이 빠진 5.18은 김남주의 핵심을 비켜간다고 생각했다.
『김남주평전』은 2017년에 도서출판 <시대의 창>에서 수정재판이 나왔다. 그러나 초판과 비교해서 내용상의 큰 차이는 없다. 나는 김남주 시인이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위대한 시를 쓸 수 있었던 동력이 그의 철학에 있다고 확신한다. 시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는 예술성과 사상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형식과 내용이 일치해야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시의 내용을 결정하는 사상성은 시인의 철학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시인의 인생관과 철학이 보이지 않게 작품을 주도한다. 인생관은 개인의 체험이나 독서를 통해서도 얻어지지만 보다 확실한 것은 철학공부를 통해서이다. 김남주가 옥중에서 철학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관을 흔들렸을 것이고 위대한 시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철학이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시를 창작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철학이 밑받침되어야 한다. 철학의 핵심문제이며 기본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구분이다. 그 구분을 정확하게 할 수 없는 사람은 철학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철학자들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념론철학자들이다. 그러한 구분을 통해서 관념론의 단점과 치부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시인 김남주가 옥중에서 깨달은 철학적 진리도 바로 유물론의 정당성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김남주평전』제2부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문제를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었고 왜 김남주 시인이 유물론자였는가를 규명하였다.
쉽게 말해서 유물론이란 물질적인 조건이 모든 것을 결정하며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주인공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이다. 김남주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내 시 세계의 특징이라면 사회적 현실과 인간관계를 유물론적이고 계급적인 관계에서 보는 데 있을 것이다.”(『시와 혁명』67쪽)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 시는 정신과 육체, 물질과 의식이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합일하는 유물론적인 통일 속에서 하나로 용해되어 있다.” (같은 책 86쪽)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제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 주고』30쪽)
유물론철학은 인류의 역사상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 존재했으며 보수적인 관념론철학에 반해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분단의 비극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민족도 유물론철학을 통해 자주·민주·통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김남주 시인은 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강조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시들에는 유물론적인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다.오늘날 우리의 시인들도 유물론을 습득하여 위대한 시를 창작하고 통일에 기여하는 것으로 김남주의 시 정신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분단시대의 시인은 통일의 전사이어야 하고 통일의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유물론으로 무장해야 한다. 무장은 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유물론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김남주의 삶과 문학이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강대석 유물론철학자>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강대석 유물론철학자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과와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 독일학술교류처(DAAD) 장학생으로 독일에 유학하여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 독문학, 독일사를 공부했고,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철학, 독문학, 미학을 연구했다. 광주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독일어과 및 대구 효성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국제헤겔학회 회원, 국제포이어바흐학회 창립회원이다. 주요 저서로는 『미학의 기초와 그 이론의 변천』(1984)을 비롯하여 『서양근세철학』(1985), 『그리스철학의 이해』(1987), 『현대철학의 이해』(1991), 『김남주평전』(2004), 『왜 철학인가』(2011), 『왜 인간인가?』(2012), 『왜 유물론인가?』(2012), 『니체의 고독』(2014), 『무신론자를 위한 철학』(2015),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vs. 불꽃을 품은 철학자 포이어바흐』(2016), 『루소와 볼테르』(2017),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꿈꾼 유토피아』(2018), 『카뮈와 사르트르』(2019), 『철학으로 예술읽기』(2020), 『유물론의 과거와 현재』(2020), 『플레하노프 생애와 예술철학』(2021) 등이 있다. 역서로는 포이어바흐의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2006)와 『기독교의 본질』(2008),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011)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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