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에 영웅이나 의인들은 많지만, 기인을 찾기는 쉽지 않다.
중국 역사에는 기억할 만한 기인(奇人)들이 있었다. 기인들은 대부분 구 왕조가 쇠하고 새로운 왕조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시기에 나타나 자신들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곤 했다. 이른바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 말은 기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황량한 벌판을 누비면서 병력을 지휘하고 적을 소탕하는 장수는 영웅(英雄)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기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뛰어난 지모로 치국과 안정의 지략을 제공하는 사람들도 현사(賢士)이지 기인은 아니다.
그럼 기인이란 무엇인가? 기인이란 과거에 통달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세사를 통찰할 수 있고 하늘과 인간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인이란 속세를 종횡무진(縱橫無盡), 하면서도 속세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중국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기인은 주 무왕이 주왕을 토벌했을 당시의 강자아(姜子牙-주나라 초기의 정치가, 공신으로 본명은 강상 姜尙이다. 속칭 강태공 姜太公)일 것이다. 강자아는 자신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지만, 시대와 운이 따르지 않아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국수를 팔려고 길거리에 나섰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 물건을 다 날려버리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고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말없이 운이 호전되기만을 기다리면서 위수 강가에 나가 낚시를 했다. 그가 사용한 바늘은 끝이 곧은 바늘이라 물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밥을 갖다 주러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버럭 화를 내며 낚시의 바늘을 구부려 강자아가 식사하는 동안 여러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놓았다. 강자아는 물고기를 전부 놓아주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모든 일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지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아내마저 그를 떠나버렸다. 그래도 그는 아무런 불평 없이 때를 기다렸다. 여든 살이 되었을 때 주공이 위수를 지나다가 강자아를 보고는 산에서 내려갈 것을 권했다. 주공은 직접 마차를 끌고 와 반나절을 기다렸고, 마침내 마음이 움직인 강자아는 산에서 내려와 주 무왕을 도와 주왕을 토벌했다.
강자아는 지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도술에 정통하여 주공에게 갖가지 지략을 제공하는 동시에 기상과 농사의 작황 등 미래의 자연현상을 예측하기도 했다. 강자아는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 제(齊)에 봉해졌고 장수(長壽)와 부귀(富貴)를 누렸다.
한편 진말한초(秦末漢初)의 장량(張良)도 기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기행은 네 가지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한(韓)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해 가산을 털어 자객을 구한 후 박랑사에서 진시황제를 칼로 찌르게 했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의 용기와 의기에는 기인의 기질이 농후했다. 둘째, 그는 우연하게 병법을 배웠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장량은 우연히 한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은 그에게 길에 버려진 신발을 주워서 신게 했고, 장량이 노인의 지시에 순순히 따르자 날이 밝을 무렵에 다시 만나 병법을 전수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장량이 노인을 두 번 만나러 갔으나 매번 노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노인은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는데, 장량은 비장한 각오로 초저녁부터 약속 장소로 가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 노인을 감동케 했다. 노인은 그의 품성이 훌륭하고 자질이 범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병법을 전수해주었다.
셋째, 그는 여러 차례 지략을 제공하여 유방을 곤경에서 구하고 항우를 격퇴함으로써 한나라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넷째, 그는 공을 세우고도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고 멀리 물러나 병법 연마에 전념함으로써 유방과 그의 아내 여후(呂后)가 공신들을 주살할 때 화를 면했고 소하처럼 굴욕을 당하지도 않았다.
유기도 이런 유형의 기인이었다.
유기(劉錡)는 자가 백온(伯溫)으로 절강 청전 출신이며, 1311년에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절강은 송대 이후 문화교육의 중심지로서 뛰어난 인재들을 다수 배출하면서 ‘산과 물, 인재의 고장 千山千水千秀才‘으로 유명했다.
유기의 선조들은 송대에 관직을 지내다가 남송이 남쪽으로 천도하자 절강 청천으로 이주했다. 남송의 태학상사(太學上舍)를 지냈던 유기의 조부는 박학다식하고 천문지리에 통달한 데다가 정직하고 의기가 투철하여 일찍이 반원(反元)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를 조직하기도 했다. 유기는 어려서부터 공을 세울 큰 뜻을 품고 있었고, 아첨하거나 시기하지 않는,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또 갖가지 재능을 나타냈는데 특히 뛰어난 기억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유기의 집 근처에는 책방이 하나 있었는데, 서당을 오가는 길에 항상 그 앞을 지나쳤다. 하루는 천문분야의 책을 집어 대충 읽었는데, 다음날 다시 들러 그 책을 펼쳤을 때는 내용을 완벽하게 외울 정도였다. 책방 주인이 몹시 놀라며 그 책을 유기에게 주자 유기가 말했다.
“이 책의 내용은 이미 제 머릿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가져가봤자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바를 알고 말하지 못하는 바를 말하기도 했다. 그의 스승은 그가 장차 큰 재목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열일곱 살이 되자 유기는 괄창산의 석문동으로 가서 당시의 명사였던 정복초(鄭復初)에게서 이정(李程-송대의 대 유학자인 정호(程顥)와 정이(程頤)형제)의 이학(理學)을 배웠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수많은 서적을 두루 통독했고, 특히 정통 경자사집(經子史集-중국의 고대 서적을 네 유형으로 나눈 것으로 경은 경전, 자는 제자백가서, 사는 역사서, 집은 문인들의 글 모음을 말한다) 외에 잡가의 저술에도 관심을 보여 의학과 농업, 천문, 지리 분야의 학문을 익혔다.
하지만 유기의 청소년 시절은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됐고, 1333년에야 간신히 진사에 급제하여 강서 고안현의 현승이 되었다. 당시 원 왕조의 정국은 혼란과 불안이 그치지 않았는데, 통치자의 취생몽사(醉生夢死-취한 속에서 살고 죽는다는 뜻으로 ’아무 뜻 없이 한세상을 흐리멍덩히 보냄‘을 이르는 말.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있는 통치자를 비유한다.)와 폭정이 계속됐고 각처에서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뜻있는 인사들은 거사의 기회를 엿보거나 과감하게 기의군의 대오에 뛰어들었다. 극소수의 지식인만이 원의 통치자에게 목숨을 팔았다.
유기는 현령을 보좌하는 말단직에 있으면서 적당히 부서의 요구에 응하긴 했지만 언젠가는 지식인의 양심과 정의를 지키는 데 전념하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그는 아첨과 영합에 염증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1340년, 청전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은사(隱士)의 생활을 시작했다.
유기의 학문과 품성은 이미 세상에 두루 알려져 절강의 행성에서 그에게 유학 부제거(副提擧)의 관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을 때 유기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부임해서 보니 모든 관장(官場)이 부패 되어 있었다. 성격이 곧은 유기는 불법행위에 대해 혹독한 질책을 서슴지 않았고, 그 결과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더 나아가 지권을 남용해 사소한 일까지 참견한다며 그를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또다시 울분을 품고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351년을 전후하여 방국진(方國珍) 형제가 반항과 투항을 거듭하며 온주와 대주, 경원 등지를 점령하고 수시로 상해에 출몰하여 소요을 일으키면서 연해 지역 백성들의 재난을 가중하고 있었다. 원나라 조정의 무능한 관리들은 유기가 훌륭한 인재라는 소문에 그를 절동원수부(浙東元帥府) 도사(都事)로 임명했다.
유기는 철저한 분산전략으로 군심을 뒤흔들어 방국진 형제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방국진은 행동이 의롭지 않아 부하들이 억지로 명령에 따를 뿐,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관부에서 방국진을 처벌하되 나머지 사람들을 달리 대하겠다는 포고문이 나붙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방국진의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1358년, 세 번째 사직하고 청전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유기의 나이는 40세가 넘어있었다. 스물 갓 넘어 진사에 합격한 후, 20여 년의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은거하며 언젠가 뜻을 펼쳐보겠다고 마음먹었으나 그 기회가 다한 것 같았다.
한편 곽자흥이 죽자 주원장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그는 ’성벽을 높이고 널리 양식을 비축하되 칭제를 미뤄야 한다‘는 주승(朱升)의 충고를 받아들여 몽골인의 공격을 피하면서 신속하게 세력을 키워나갔다. 특히 그는 군대의 규율을 매우 중시하여 훌륭한 위세와 명망을 세웠고, 가는 곳마다 현지의 뛰어난 인재들을 맞아들였다. 청주를 점령한 후 주원장은 유기가 청전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맞아들였다.
유기는 일찍이 주원장의 명망을 들어온 터이지만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관직 생활에서 느꼈던 염증 때문에 주원장의 첫 번째 요청을 거절했다. 주원장은 화를 내지 않고 다시 손염(孫炎)을 보내 간절하고 공손한 어투의 편지를 전했다. 손염이 주원장의 웅대한 뜻과 지략을 설명하며 재삼 간청하자 유기는 그제야 마음이 움직였다.
“저는 일찍이 관직을 버리고 서호에서 한가롭게 세월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서북방에서 이상한 기운을 발견했는데, 당시 저는 그것이 천자의 기운이고 10년 후에 금릉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지금 주씨의 대업이 흥성하면서 현사들을 크게 예우하여 하늘과 땅이 순조롭게 조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차 대성할 것이 분명합니다.”
유기는 이런 말로 주원장의 세 번째 요청에 응했다. 유기는 주원장을 만나 이른바 ’시무18책 時務十八策‘을 제시했고 주원장은 그가 군문에 들어오기도 전에 천하의 대세를 꿰뚫어 보는 불세출의 인재라 생각하고 즉시 명령을 내려 예현관(禮賢館)을 건립하게 하고 그를 상객으로 모셨다.
당시 주원장은 동쪽으로 장사성, 서쪽으로 진우량과 대치하고 있었다. 양군의 세력은 주원장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고, 합세하여 주원장을 제압하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원장의 군대는 사기충천해 있긴 하지만 동서 협공의 위험에 처해있어 장사성과 진우량의 공격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주원장은 마음을 비운 채 유기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주원장이 말했다.
“선생께선 절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좋은 생각이 있으시거든 기탄없이 말씀해주십시오. 선생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공께선 금릉을 차지하고 있어, 지세(地勢)는 매우 유리한 편입니다.
그러나 동쪽에는 장사성이 있고 서쪽에는 진우량이 있어 여러 차례 공격을 당한 바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천하를 얻고자 한다면 가장 시급한 일은 이 두 사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주원장도 바로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방법을 몰라 초조했던 터라 다시 유기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들을 제압할 수 있겠습니까?”
“적을 방어하려면 완급의 균형을 잡아야 하고 용병에도 앞뒤 순서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먼저 진우량을 대적하시고, 후에 장사성을 공격하시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장사성은 약소하지만 진우량은 매우 강대합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장수들은 먼저 약자를 제압하여 진우량의 날개를 꺾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먼저 약자를 공격하고 나서 강자와 대적하는 것이 병법의 상식인데 선생께선 어째서 약자를 제쳐두고 강자를 공격하라 합니까?”
“지금의 형세로는 병법에 구애될 필요가 없습니다. 장사성은 자기를 지키는 데 만족해하는 사람이라 웅대한 뜻을 품고 있지 못합니다. 공이 전력을 집중하여 진우량을 공격하면 그도 금릉을 공격하는 경거망동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진우량은 칭제(稱帝)한 이후로 한순간도 금릉을 잊은 적이 없고 지금은 장강 상류를 점거하고, 있는 상태라 순순히 남하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야심이 커서 군웅을 남김없이 모조리 쓸어버리려 해서 지금으로서는 그가 가장 큰 적수입니다. 병력을 집중하여 먼저 장사성을 공격한다면 그 틈을 이용하여 진우량이 밀고 들어올 텐데 공께선 그를 어떻게 막아내시겠습니까?”
제갈량을 방불케 하는 유기의 뛰어난 전략에 주원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주원장은 유기의 계책을 그대로 실행하여 천하를 평정하고 명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실제 전투에, 있어서도 유기는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그가 주원장의 막하로 들어온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진우량이 서수휘(徐壽輝)를 앞세워 장사성과 함께 동서 협공으로 공격해왔다.
당시 적군의 막강한 병력에 비해 주원장의 군대는 약세였고, 싸움에 임하는 장수들의 의견도 제각기 달랐다. 주전론자가 있는가 하면 도피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투항을 건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유기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먼저 투항과 도망을 주장하는 자들의 목을 베야만 승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도망친다 해도 갈 곳이 없고, 투항한다 해도 죽기는 마찬가지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우량의 세력이 강대하긴 하지만 의롭지 못한 군대이기 때문에, 사기가 높지 않은 데다가 먼길을 오느라 병사들이 몹시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군사를 매복시켜 기습공격을 가하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진우량은 너무 오만하고 지략이 부족하여 무모하게 전면전의 전략을 쓸 것이 분명한 만큼 아군의 승리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유기의 이런 주장은 당시의 상황에 정확하게 부합해서 주원장과 병사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대단한 기세로 밀고 나와 태평을 점령하여 스스로 칭제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했던 진우량은 주원장의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유기의 군대에 포위되어 꼼짝, 못하다가 결국 강주로 달아나고 말았다.
강주는 물가에 건설된 도시라 성벽이 대부분 물속에 세워져 있어 수비는 쉽지만, 공격이 몹시 어려웠다. 주원장이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워낙 난공불락의 성이라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에 방심한 진우량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이때 유기는 성벽의 높이를 측량한 다음 모든 배 끝에 사다리를 만들어 어둠을 틈타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진우량은 하늘에서 신병(神兵)이 내려왔다고 생각하고 황급히 처자식을 데리고 배에 올라 남창으로 도망쳤다. 그 후 파양호 대전에서도 유기는 뛰어난 지략으로 주원장의 공격을 도와 진우량을 호수 한가운데서 사살함으로써 대한정권을 무너뜨렸다.
한임아(韓林兒-원나라 말기 홍건군의 수령)를 소명왕(小明王)으로 봉하는 문제에 있어서 유기는 주원장과 생각이 달랐다. 주원장이 한임아의 봉작을 받아들인 목적은 사람들의 이목을 분산시켜 원군의 공격을 전부 한임아와 진우량 등에게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세력을 키울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형세의 추이로 볼 때 한임아를 받드는 것은 백해무익한 일이었다.
1361년 정월, 주원장은 금릉 중서성에서 소명왕을 모시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지만, 유기만이 꼿꼿이 서서 절을 올리지 않았다. 유기가 말했다.
“한임아가 한산동(韓山童-홍건군의 우두머리)의 아들이긴 하지만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일개 목동에 불과하고 성씨도 조(趙)가 아니라 한이기 때문에 송왕조의 후예라 할 수 없습니다. 송이 망한 지 이미 오래고 민심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굳이 전대의 연호를 빌려 쓸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대장부가 제업을 이루려면 어떤 견제도 뿌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 전대의 연호를 고집하다가는 스스로 설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주원장은 그 자리에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유기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 상태였다. 나중에 한임아를 구하려다 진우량에게 패할 뻔했던 주원장은 그 후로 유기의 말이라면 무조건 신임하고 따르게 되었다. 결국, 주원장은 한임아를 주살하고 스스로 대명제국의 기치를 들어 올렸다.
유기가 명 왕조의 개국에 세운 공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확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여 한임아를 죽이고 칭제를 단행함으로써 인심을 모으고 천하를 장악하게 했다. 둘째, 정확한 전략 방침을 정하여 먼저 진우량을 친 다음 장사성을 공격하여 대승을 이끌었다. 셋째, 모든 전투에서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개국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여 인(仁)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는 점이다.
한번은 주원장이 치국과 치민의 방법을 묻자 유기는 “백성을 살리는 길은 관인(寬仁)에 있다.”라는 말로 치국의 도리를 밝혔다. 아첨을 모르고 강직한 성품을 유지했다. 그는 문신의 우두머리인 이선장의 요구나 위협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사중승의 신분으로 이선장의 측근이자 부패 관리인 이빈(李彬)을 주살함으로써 조정을 뒤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선장의 모함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아예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효유용은 유기가 이전에 주원장의 면전에서 자신을 폄하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승상이 되자마자 유기의 아들을 모함하면서 동시에 유기가 왕기(王气)의 묘를 차지했다고 무고했다.
유기는 낙향하여 차를 음미하거나 장기를 두면서 소요자락(逍遙自樂)하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경사로 불려와 무고의 내용에 대해 시비를, 가리는 대질신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주원장이 그를 비호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화병이 생겨 1375년에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 영웅이나 열사, 지사와 의인들은 많았지만, 기인을 찾기는 쉽지 않다. 기인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자연스럽게 사모하게 되는 신비한 품격을 지니고 있기에 당대에는 이를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다.